검색결과
-
[풍수] 주암선생 문화탐방 65회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5회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 성승[成勝,?~ 세조 2년(1456)], 호는 적곡(赤谷),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창녕(昌寧), 조부는 개성유후 성석용(成 石瑢),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成達生),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세종 22년(1440)에 경상도병마절제사, 1446 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고, 문종 즉위년(1450)에 정조사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 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같은 해 의주목사에 제수되 었다. 세조 1년(1455)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세조가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즉위하자 아들인 성삼문을 비롯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류성원(柳誠源) ·김질(金礦) 등 집현전학사들과 유응부(兪應孚) ·박쟁(朴崝) 등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 치를 벌일 때 거사하기로 하였다. 동지중지추원사 유응부와 당상 무신인 박쟁과 함께,왕 뒤에 별운검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이에 뒷날 관가(觀 稼)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사실을 상의하자 정창손이 곧바로 세조에게 고발하였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와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되었다. 이 때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 聘)·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숙종18년(1692년) 3월 25일 고 부총관 성승의 관작을 복구.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두산 백과.)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병자 9월 7일자 내용이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ㆍ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ㆍ딸 내은금(內隱今)ㆍ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ㆍ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ㆍ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ㆍ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ㆍ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ㆍ딸 가구지(加仇之)ㆍ말비(末非)ㆍ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ㆍ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ㆍ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ㆍ딸 불덕(佛德)ㆍ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ㆍ딸 요문(要文)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ㆍ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남(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ㆍ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ㆍ딸 산비(山非)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ㆍ딸 금정(金正)ㆍ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ㆍ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이렇게 그녀들은 공신이나 대신들에게 노리개나 종으로 내려주어 그 치욕을 감당하게 한다 그렇게 세상 못볼꼴, 못할꼴 다보고 몇 십년만에 겨우 풀려난 성삼문 아내 차옥과 딸 효옥은 그래도 끝까지 지아비이자 아버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렸다 한다 그 후 순조 때 정식 제사를 국가에서 관여했다 고(故) 문충공(文忠公) 성삼문(成三問)에 대해 그 방손(傍孫)으로 하여금 따로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를 대신 지내는 의리에다 부조(不祧)의 예(禮)를 적용시키라 명하였으니,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 인한 것이었다. 옛날 현묘조(顯廟朝) 때 성삼문의 신주(神主)가 백악산(白嶽山)의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나왔었는데, 아직까지 사손(祀孫)을 정하지 못하였기에 방손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택정(擇定)할 것을 청하자,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고 묘당(廟堂)에서 0품처(稟處)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삼문은 조선의 가장 절의있는 인물이 되기까지 4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극한의 고통을 겪다 살아난 인물이 된다 ● 풍수적 고찰 주군이었던 세조의 하명(嘏命)을 지키고자 거사를 계획했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돼 멸문지화를 당한 성삼문 부친 성승장군의 유택(幽宅)은 어떤가? 주산은 닭제산으로 닭제산(165.7m)에서 경유룡(庚酉龍)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서진하다 병오룡(丙午龍)으로 횡룡(橫龍)하여 기복굴곡(起伏屈曲)을 거쳐 곤신(坤申)으로 변신하여 다시 병오(丙午).미곤(未곤).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경유룡(庚酉龍) 횡룡(橫龍)입수하였다. 성승장군 묘는 횡룡결작(橫龍結作)으로 보아 용사한 묘다. 횡룡(橫龍)의 필수는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이 있어야 한다.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은 혈(穴) 뒤쪽에서 불어오는 곡풍(谷風)을 막아주고 주룡의 생기의 설기를 막아주기에 귀성은 짧고 단단한 것이 좋은데 이곳은 귀성이 강하게 밀어 주지 않고 계축룡(癸丑龍)으로 산진처를 향해 내려가는 형국이라 당판(當坂) 형성이 풍만하지 못하기에 계절(階節)이 협소하다. 당판은 좌우 균형을 이룬듯하나 취기가 미약하다. 안산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 화목과 안온함을 주고. 용호는 미약하여 주인을 잘 보호하지를 못하고 있다. 만약 절손이 되지 않고 후손이 이어졌드라면 귀(貴)보다는 화목이 우선시되는 곳이다.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파구는 경파(庚破)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88향법에서 수(水)가 경유(庚酉)로 나가니 향상(向上)의 녹위[祿位(辛祿)은 酉]를 충파하는 소황천(小黃泉)이 된다. 이는 궁핍하고 요수하며 과부가 난다. 이 황천묘는 무수히 구묘를 경험해 보아도 혹간 수(壽)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지만 여러 형제가 많아도 결국은 핍사하고 곤궁하여 부자는 없다. 만약 술자상(戌字上)을 침범하고 창도(鎗刀)와 악석(惡石)이 있으면 횡폭하여 투쟁을 좋아하 는 자손이 나리라.
-
[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3회 ...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先生遺墟址)(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3회 ...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先生遺墟址) 성삼문 선생 유허는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이다, 그의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있고, 왼쪽 언덕에 노은단이 있다.1973년 12월 24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담(朴膽)의 고택이 있던 곳이며, 성삼문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76년(숙종 2) 사인(舍人) 이량(李湸)과 유생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삼문의 탄생지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1685년(숙종 11)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를 추가 배향하였다. 1692년(숙종 18) 조정에서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하였다가 1712년(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다. ‘노은’은 민진후(閔鎭厚, 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宋時烈)이 노산(魯山)의 ‘노’자와 은의(恩義)의 ‘은’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다. 1687년(숙종 13) 노은서원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성승(成勝, 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되어 신원된 후 제향되었다. 그러나 노은서원은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다. 당시 유생들은 사육신의 위패를 매안한 다음,그 위에 단을 쌓아 ‘노은단(魯恩檀)’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제향을 올렸다.1945년 광복이 되자 홍성고적현창회에서 삼문을 개축하고 정화하였다. ● 성삼문(成三問)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로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세조 부자를 죽이거나 거병을 하면 각지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김문기,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으로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바로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김문기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그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거사 당일 이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본 한명회와 신숙주의 권고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은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여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체포된 다음 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역자라며 꾸짖고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그는 성삼문 처형직전 마지막가는길에 술 한잔하고 그 뒤 성승, 이개, 하위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뒤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거열형에 처해진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조리돌림되었고, 그의 시신과 그의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김시습 등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 라 하였다. 한편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그 중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아들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만다.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 성종때의 학자 성담년 등은 그의 6촌 형제간이다. 아내 차산과 미혼의 장녀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석방 시점은 알 수 없으며[출처 필요] 차산(연안김씨)은 성삼문의 위패를 만들어서 제사지냈다 한다. 김씨부인이 죽은 후 성삼문의 제사는 차녀의 둘째 아들 박호가 승계했으나 후손이 없고, 임란에 인왕산에 성삼문과 그 외손 내외의 신주를 묻었는데 1672년 사태난 골짜기에서 신주 3위가 발견되어 송시열 등이 다시 묻지 않고 홍주로 이봉하였다. 성삼문 일가가 처형당할 무렵 박임경에게 시집간 그의 차녀와 엄정구에게 시집간 3녀는 연좌되지 않았다. 둘째아들 맹년의 딸은 유성원의 일족인 서산공 유자미가 비밀리에 피신시켜 길러서 자신의 일곱째 며느리(柳輯 부인)로 삼았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성삼문의 처로서 노비로 분배된 차산(김씨)은 1456년 9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의 노비로 끌려갔고, 뒤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성종 때인 1475년 5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다시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죽은 후 성삼문 신주는 외손 박호가로 갔으나 후손이 없어 인왕산에 묻혔다.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후손으로는 장녀 효옥, 박림경에게 시집간 차녀와 류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맏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둘째딸은 무안박씨 박림경에게 시집갔고 이후 성삼문의 제사는 둘째 외손자 박호에 의해 봉사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풍수적 고찰. 양택은 생자(生者)가 기거하는 곳을 말한다. 생자가 기거하는 곳으로 청나라 조정동은 1.배산임수(背山臨水-뒤는 산이요 앞은 물) 2.전저후고(前低候高-앞은 낮고 뒤는 높게) 3.전착후관(前窄後寬-입구는 좁고 안쪽은 넓게).해야 좋은 집터라고 했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는 터만 있고 집은 없어 전착후관(前窄後寬) 은 알 수 없지만 배산임수(背山臨水).전저후고(前低候高)은 완벽하게 갖춰진 곳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양택에서 큰 인물이 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기(地氣)인 생기(生氣)가 있어야 한다. 둘째 주산이 문필봉.귀인봉.노적봉..등이어야 한다. 셋째 안산이 주산과 궁합이 맞아야 하고 반듯해야 한다. 넷째 주변에 흉사(凶沙)가 없어야 한다. 다섯째 좌향과 맞는 궁합이어야 한다. 여섯째 사주팔자의 운을 잘 갖고 태어나야 한다. 일곱째 국세(局勢)가 언정정이어야 한다. 여덟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한다. 아홉째 인심이 좋아야 한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는 주산.안산.주변사...등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에 대해 어긋나는 부분이 없고 부합돠는 곳이다. 유허지의 좌향(坐向)은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정향(丁向)은 인정(人丁)을 요하는 향법이다. 파구(破口)는 곤파(坤破)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면 서(書)에서 이르기를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이라고 한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으로 ㄱ.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ㄴ.인정(人丁)이 대왕하며ㄷ.복수쌍전(福壽雙全) 한다고 한다. PS.유허 (遺墟)란? 유지(遺址) · 유적(遺蹟) · 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 · '옛터'의 뜻으로,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 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카드뉴스] 한국관광공사-제주올레‘바당길, 깨끗하길’시즌3 캠페인 시동
- 2[카드뉴스] 종로구, 가정의 달 기념 가족사랑 캠페인·공연 ‘다채’
- 3[카드뉴스] 남양주시 1호 휴먼북 주광덕 시장, 진로 특강 진행... 청소년의 꿈을 위한 디딤돌 놓아
- 4[카드뉴스] 한국수자원공사, 극한 강우 대비 댐 현장 특별점검...윤석대 사장 “국민 안전 최우선 비상체제 조기가동”
- 5[카드뉴스] 한국수자원공사, 이상 고온에 따른 녹조 확산에 맞서 신속 대응 협력체계 구축
- 6[카드뉴스] 호텔신라, 레저형 호텔 ‘신라스테이 플러스’ 이호테우 그랜드 오픈
- 7[카드뉴스] 남양주시, ‘학부모 미래교육공동체’ 워크숍 개최
- 8[카드뉴스] 문화재청, 종묘제례 준비 공간 ‘향대청’ 전시관과 망묘루의 문이 열린다
- 9[카드뉴스] 남양주시의회 의원연구단체, ‘남양주시 개인맞춤형 조기치매 예방‧관리서비스 연구모임’착수보고회 개최
- 10[카드뉴스] 속초문화관광재단, 세대 간 문화관계 형성 위한 북위38도 프로젝트 추진...청소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기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