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주암선생 문화탐방 65회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

기사입력 2024.04.0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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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5회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


성승[成勝,?~ 세조 2년(1456)], 호는 적곡(赤谷),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창녕(昌寧), 조부는 개성유후 성석용(成 石瑢),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成達生),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세종 22년(1440)에 경상도병마절제사, 1446 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고, 문종 즉위년(1450)에 정조사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 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같은 해 의주목사에 제수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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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년(1455)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세조가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즉위하자 아들인 성삼문을 비롯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류성원(柳誠源) ·김질(金礦) 등 집현전학사들과 유응부(兪應孚) ·박쟁(朴崝) 등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 치를 벌일 때 거사하기로 하였다. 동지중지추원사 유응부와 당상 무신인 박쟁과 함께,왕 뒤에 별운검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이에 뒷날 관가(觀 稼)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사실을 상의하자 정창손이 곧바로 세조에게 고발하였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와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되었다.


이 때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 聘)·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숙종18년(1692년) 3월 25일 고 부총관 성승의 관작을 복구.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두산 백과.)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병자 9월 7일자 내용이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ㆍ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ㆍ딸 내은금(內隱今)ㆍ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ㆍ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ㆍ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ㆍ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ㆍ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ㆍ딸 가구지(加仇之)ㆍ말비(末非)ㆍ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ㆍ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ㆍ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ㆍ딸 불덕(佛德)ㆍ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ㆍ딸 요문(要文)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ㆍ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남(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ㆍ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ㆍ딸 산비(山非)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ㆍ딸 금정(金正)ㆍ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ㆍ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이렇게 그녀들은 공신이나 대신들에게 노리개나 종으로 내려주어 그 치욕을 감당하게 한다 그렇게 세상 못볼꼴, 못할꼴 다보고 몇 십년만에 겨우 풀려난 성삼문 아내 차옥과 딸 효옥은 그래도 끝까지 지아비이자 아버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렸다 한다 그 후 순조 때 정식 제사를 국가에서 관여했다


고(故) 문충공(文忠公) 성삼문(成三問)에 대해 그 방손(傍孫)으로 하여금 따로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를 대신 지내는 의리에다 부조(不祧)의 예(禮)를 적용시키라 명하였으니,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 인한 것이었다.


옛날 현묘조(顯廟朝) 때 성삼문의 신주(神主)가 백악산(白嶽山)의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나왔었는데, 아직까지 사손(祀孫)을 정하지 못하였기에 방손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택정(擇定)할 것을 청하자,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고 묘당(廟堂)에서 0품처(稟處)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삼문은 조선의 가장 절의있는 인물이 되기까지 4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극한의 고통을 겪다 살아난 인물이 된다


● 풍수적 고찰


주군이었던 세조의 하명(嘏命)을 지키고자 거사를 계획했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돼 멸문지화를 당한 성삼문 부친 성승장군의 유택(幽宅)은 어떤가?


주산은 닭제산으로 닭제산(165.7m)에서 경유룡(庚酉龍)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서진하다 병오룡(丙午龍)으로 횡룡(橫龍)하여 기복굴곡(起伏屈曲)을 거쳐 곤신(坤申)으로 변신하여 다시 병오(丙午).미곤(未곤).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경유룡(庚酉龍) 횡룡(橫龍)입수하였다.


성승장군 묘는 횡룡결작(橫龍結作)으로 보아 용사한 묘다. 횡룡(橫龍)의 필수는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이 있어야 한다.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은 혈(穴) 뒤쪽에서 불어오는 곡풍(谷風)을 막아주고 주룡의 생기의 설기를 막아주기에 귀성은 짧고 단단한 것이 좋은데 이곳은 귀성이 강하게 밀어 주지 않고 계축룡(癸丑龍)으로 산진처를 향해 내려가는 형국이라 당판(當坂) 형성이 풍만하지 못하기에 계절(階節)이 협소하다.


당판은 좌우 균형을 이룬듯하나 취기가 미약하다. 안산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 화목과 안온함을 주고. 용호는 미약하여 주인을 잘 보호하지를 못하고 있다. 만약 절손이 되지 않고 후손이 이어졌드라면 귀(貴)보다는 화목이 우선시되는 곳이다.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파구는  경파(庚破)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88향법에서 수(水)가 경유(庚酉)로 나가니 향상(向上)의 녹위[祿位(辛祿)은 酉]를 충파하는 소황천(小黃泉)이 된다.


이는 궁핍하고 요수하며 과부가 난다. 이 황천묘는 무수히 구묘를 경험해 보아도 혹간 수(壽)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지만 여러 형제가 많아도 결국은 핍사하고 곤궁하여 부자는 없다. 만약 술자상(戌字上)을 침범하고 창도(鎗刀)와 악석(惡石)이 있으면 횡폭하여 투쟁을 좋아하 는 자손이 나리라.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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