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주암선생 문화탐방 66회 ... 최영(崔瑩)장군 묘

기사입력 2024.04.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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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6회 ... 최영(崔瑩)장군 묘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아버지는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이다.시호는 무민공(武愍公)이다. 배우자 정실 문화류씨 자녀 슬하 1남 2녀장남 : 최담(崔潭) 우왕은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손녀 사위는 조선 초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이다.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이며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최영은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최영은 이를 그대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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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으로 출사하여 공민왕 때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고려의 명장.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해 그 공으로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으로 그곳을 명나라가 다스려야 한다고 우왕과 함께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 소(작은 나라)로서 대(큰나라)를 거역할 수는 없다. . 농사철에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 모든 군사가 북쪽으로 몰려간 틈에 왜구가 쳐들어올 소지가 있다.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쓰기 어렵고 군사들은 전염병에 시달린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했지만 이성계 등은 대국을 건드릴 수 없다 하며 위화도에서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를 맞아 싸우다가 이성계 일파에 붙잡혀 경기도 고봉[5](高峰 :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개경으로 소환된 뒤 죽임을 당할 때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실제로 그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아서, 이에 적분(赤墳)이라 하였으며, 588년이 지난 1976년 유가족이 풀을 심어 놓았다. 출처 : 다음백과


●풍수적 고찰


고려의 만고 불변의 충신인 최영장군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충성을 다한 고려의 만고 불변의 충신이다. 문신 가문인데도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출중해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으며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는 최영 장군


대한민국에서 " 수명장수, 안과태평" 의 신으로, 무속에서 모시는 신령 가운데 하나인 최영 장군의 유택은 어떤가? 매조산에서 출맥한 용은 계축(癸丑)의 북동으로 휘파람재를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계축방(癸丑方)치고 올라가다

 

건해(乾亥)의 북서로 방향을 틀어 곤신(坤申)의 남서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임자룡(壬子龍)으로 입수(入首)하여 좌정(坐定)하였다. 국세(局勢)는 양명하면서 편안한 곳이다. 대륙을 휘젓고.왜구를 물리치고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삶 속에서 시기(猜忌)와 질투(嫉妬).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판치는 속세와는 먼 삶을 살아서였을까!


주산(主山)은 높지는 않지만 목성체에서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내룡(來龍)하면서 가지를 치면서 행룡(行)龍)하고 청룡(靑龍)이 안산(案山) 역할을 하는 청룡작국(靑龍作局)이다. 백호(白虎)는 가까이서 주군(主君)을 위해 순하게 호위를 하면서 좌수(左水)를 막아주니 수구는 주밀(綢密)하여 수구불통주(水口不通舟)다.


당판은 음룡으로 힘이 넘치는 장유혈(長乳穴)이다. 안산(案山)은 주인에게 읍하면서 수구를 관쇄하고자 비주(飛走)를 하고 주맥(主脈)은 첨하(籤下)를 이룬듯하면서 산수동거(山水同去)를 하니 장유혈에 비해 취기(聚氣)와 응기점(應氣點)을 쉬이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근자에 묘역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철탑과 고압선이 지나 무민공(武愍公) 유택 명당(明堂)에 큰 흠이 되고 있어 안따깝다.


좌향(坐向)은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정미파(丁未破)다. 이는 양공楊公.834~900. 唐의 국사)의 88향 진신수법상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 이다. 이는 임관룡.우선룡에 좌수도우.병오향에 정미파.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쇠방으로 물이 나가도 되고 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고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오래 살고 인정(人丁)이 왕(旺)한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혼신의 함을 다하고 최후에도 " 내 행적에 오점이 없다." 며 사후 유택까지 언급한 장군의 기개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된 점은 참교육의 현장이 아닌가 싶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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