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23회... 삼척 공양왕릉

기사입력 2023.05.08 23:03
댓글 0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사본 -AS4B12.png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23회... 삼척 공양왕릉

 


[한국풍수신문] 삼척 공양왕릉(恭讓王陵)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제34대, 재위기간 1389-1392)의 능묘이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교살(絞殺) 되었다고 전한다.


왕릉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현종 3년(1837) 정유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많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그저 천추의 한(恨)을 품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묘소는 1942년 면장 김기덕과 이 지방인사들이 다시 개축하고 1977년 6월 면장 최문갑이 봉축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공양왕릉이 두 군데 있는데 이 곳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남아있다. 경기도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공양왕릉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 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조선조 헌종 3년(1837)에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奎憲)이 개축을 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태조실록>과 <양촌집> 등에는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려 왕조의 왕씨를 위해 삼척, 강화, 거제에서 수륙제(水陸齋)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사본 -AS7B4A.png

 

이 곳의 지명 유래에 따르면 궁촌은 임금이 유배된 속이라 하고 마을 뒷길 고돌산에 공양왕이 살해되었다는 살해재가 있다. 또한 공양왕의 맏아들 왕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이라는 지명도 전한다.


궁촌리에서는 3년마다 해신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왕릉에 와서 제사를 추모하고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71호(1995.09.18 지정) (참고문헌 :대한민국 구석구석 )


PS.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어떻게든 일으켜보고자 절치부심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판세에 결국은 강제 폐위되고 목숨까지 잃은 비운의 왕.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무덤과 이곳 삼척시 근덕면에 있는 무덤 진위를 떠나 한이 서려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대왕산에서 출맥한 용은 간인(艮寅)ㅡ을진(乙辰)ㅡ손사(巽巳)룡으로 입수하여 해좌(亥坐)로 자리잡았다. 취기처 명당은 아니지만 바다를 등지고 동남향을 하고 청룡이 해풍(海風)을 막고 해수(海水)의 수세(水勢)를 잠재우고.백호는 청룡과 교쇄를 하였지만 지기명당(地氣明堂)보다는 납기명당(納氣明堂)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넋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한국풍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