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

기사입력 2024.01.2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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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 연천군에 묻혔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復辟)운동이 일어나기 딱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 때도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서 각각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것. 사실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도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참고로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 때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휴전선 남쪽에 들어와 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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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경순왕릉 묘비가 있는데 내용은"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ㅇ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마지막에는 영조 23년(1747년)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한국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풍수적 고찰

권불십년(權不十年-높은 권세라도 10년못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권력 맛을 본 사람은 죽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코자 자신의 핏줄인 자식에게까지도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헌데 천 년(935년간) 가까이 이어온 종묘사직을 통째로 넘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통일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 도중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빈 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은 자결을 명해 죽자 왕의 먼 친척인 김부(金傅)를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56대 경순왕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핍박(逼迫)을 당하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에 평화적으로 종묘사직을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결혼해서  

23년간 살다 76세에 생을 마쳤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료가 약하고 대신 장자인 마의태자는 울분을 삭이고자 산천을 헤매다 생을 마쳤고 나머지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럼 사후의 유택은 어떨까? 경순왕 묘가 맨 처음 있던 곳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1514.위쪽이었는데 1985년에 이장한 곳이 현재의 능이 있는 경가도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이다

  

좌향(坐向)은 계좌(癸坐)인 남향이다. 앞의 전순은 전부 쌓아 올린 것이고 좌우 용호사는 나(주인=혈)에게 다가온 듯하나 약하고  주산은 금성체로 가까이 있어 좋으나 너무나 내려오면서 퍼져 내려와 취기가 되질 않고 있다.

 

안산은 청룡작국이나 비주(飛走)하는 형태이다. 앞인 조당은 툭 터져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늑한 감을 주어 납기(納氣)명당은 괜찮아 보이나 자세히 보면 지기(地氣)는 약하고 용호(龍虎)의 호위가 약해 명당이라 말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인생을 100으로 본다면 살았을 때가 50% 사후가 50%인데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후에는 명당혈에 들어가야 편안하고 안온한 후생이 되는데 경순왕릉은 망국의 한(恨)을 간직한 분이라 후생에는 좋은 곳에 계셔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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