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7회 ... 경복궁(景福宮)

기사입력 2024.02.0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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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7회 ... 경복궁(景福宮)


[한국풍수신문]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새로운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지어졌는데 동궐(창덕궁)이나 서궐(경희궁)에 비해 위치가 북쪽에 있어 '북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복궁(景福宮).이라는 단어는 태조실록에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경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라고 정도전이 아뢰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신진사대부가 계획한 궁궐이기 때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ㅡ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었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간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초기 5000칸이었던 것을 7225칸의 거대한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지.)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 갈며 소가 일을 못한다는 불평으로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리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경복궁은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火]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합방조약 이후 새로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 된 일본 식민체제는 직전의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식민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훼손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구석구석.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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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적 고찰

경복궁(景福宮)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산진처(山眞處)로 양택(陽宅)의 대국(大局)에 위치하고 있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맥(脈)으로 수우산(水于山)ㅡ대성산(大成山)ㅡ운악산(雲嶽山)ㅡ주엽산(注葉山)ㅡ불곡산(佛谷山)ㅡ홍복산(弘福山)ㅡ도봉산(道峰山)ㅡ삼각산(三角山)ㅡ노고산(老姑山)ㅡ현달산(見達山)ㅡ장명산(長命山)으로 행룡한다.


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면서 경복궁의 주산(主山)이다.


북악산의 정맥은 급한 기복굴곡(起伏屈曲)과 때로는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암석지대를 탈산(脫殺)을 하면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하나의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 취조(聚照)하는 정혈지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行龍)한다.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는 게 대원칙인데 경복궁이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중에서도 으뜸이다. 주산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문필봉(文筆峯)으로 무인(武人)보다는 문사(文士)의 기골이 득세하는 형상이다.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가 어우러진 곳에 주택의 좌향(坐向)이 제대로 된 곳이어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에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경복궁 근정전의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 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니 관대룡(冠帶龍). 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로 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 한다.고 한다.


대명당의 좌향은 좌와 향이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으로 구비된다. 경복궁의 지기(地氣)와 주산(主山)이 바라는 안산(案山)은 남산(南山, 262m),이다. 안산을 남산으로 하면 임좌(壬坐)로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人丁)이 대왕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경복궁은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뛰어난 곳으로 좌향만 자연대로 하면 나무랄데가 없는 대명당이다.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지세에 따른 집의 좌향.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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