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연재] 주엄선생 문화탐방 62회 ... 최영(崔瑩) 장군 사당.

기사입력 2024.03.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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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엄선생 문화탐방 62회 ... 최영(崔瑩) 장군 사당.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출생지 철원. 본관 동주(東州)배우자 정실 류씨 부인 첩실 은씨 자녀 슬하 1남 2녀 (생질)맹사성(손녀사위)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 최원직(崔元直)과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최영은 이를 그대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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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고려의 명장이다.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해 그 공으로 우달치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반원개혁을 단행해 영토수복을 위하여 인당, 신순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략해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서경을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됐다. 이후 신돈이 집권해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도되면서 좌천됐으며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됐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했을 때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 체포돼 유배되고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돼 참형을 당했다.


● 풍수적 고찰

견금여석(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하라는 아버지 유언을 실행한 최영장군. 반역과 불의에 맞서 최후까지 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명장의 사당이라 그런지 암반들이 질풍노도와 같이 몰아쳐 내려오는 석맥의 낙하처 중심지에 우뚝 서서 수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형국이다.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중첩되어 수 많은 군사들이 배출되고. 곡곡(谷谷)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 있는 조당(朝堂)에는 대인리(大仁里).인산리(仁山里) 마을 등에서 어진 큰 인물이 나와 장군의 휘하로 몰려와 기개를 펼치는 형국이다.


좌향은 임좌병향이다. 1차 수구(水口)는 손사파(巽巳破)로 향상의 임관(臨官)을 충파하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이다 살인대황천은 다 큰 자식이 상(喪)을 당하고 패절하며 절름발이.피부병.혈압.노질.토혈 등의 증세가 있는데 먼저 둘째 집이 상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


그러나 2차 水口는 左水가 右로 흘러 丁未方으로 나간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인으로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ㅡ쇠방으로는 물이 나가도 되고.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고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人丁)이 대왕하니 초창기에는 여러 난관이 예상되지만 후세로 갈수록 더욱 빛나고 명예가 회복될 것이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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