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33회... 조엄(趙曮) 해사일기(海槎日記)

기사입력 2023.07.2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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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33회... 조엄(趙曮) 해사일기(海槎日記)

 

조엄[趙曮.1719년(숙종 45년) ~ 1777년(정조 1년)]은 조선후기 공조판서,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조중운(趙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 ·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 · 한성부우윤, 예조 · 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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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적 고찰

고구마를 가져와 구황작물로 자리잡게 한 조엄선생의 묘역은 어떤가? 부길산(150m)에서 행도를 시작한 용(龍)은 정미(丁未)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경유(庚酉)룡으로 힘차게 달려와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낙맥을 하고 과협처를 거쳐 정미(丁未)로 입수를 하였다.


주산은 준수하고 백호는 주인에게 예로써 호위를 하고. 청룡은 주인에게 예를 갖추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기념관 쪽으로 달려간다. 안산은 단아한 자태로 주인을 향해 있다. 내룡에 비해 당판은 옹골차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좌향(坐向)은 축좌미향(丑坐未向). 파구(破口)는 곤파(坤破)다. 이는 양균송 선사의 88향법의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관대룡.우선룡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 정미향에 곤신파는 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이는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이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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