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

기사입력 2024.01.08 23:33
댓글 0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사본 -AS786E.png

(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

 

청와대(靑瓦臺)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2022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한 공간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열두 명의 대통령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명칭을 '청와대'로 변경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기에 건물의 보수·증축과 함께 녹지원 조성, 영빈관 신축 등 청와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에 관저와 춘추관을, 1991년에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현재의 청와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1993년 구 본관을 철거 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20대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청와대는 국민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1991년 지어진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이 집무와 외빈 접견 시에 사용한 곳이다. 본관 외부에는 전통 건축양식의 팔작지명에 15만 여장의 청기와를 올렸으며, 내부에는 현대적인 건축과 성을 갖추고 있다. 본관 중앙부에는 2층 한옥양식의 를 두고, 좌우에는 단층 한옥양식의 별채를 배치하였다. 

 

이는 2담회나 소규모 만찬장으로 사용한 인왕실, 영부인의 집무실과 무궁화실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접근 및 회의 긴소로 사용한 집현실이 있다. 서쪽의 별채에는 국무회의가 열렸던 사실, 동쪽의 별채에는 임명장 수여식 등에 사용된 층수 안에 있다 청와대(青瓦臺)의 이 터전을 고려조(高麗朝)의 이궁(離宮)으로 조선조(朝鮮朝) 경복궁(景福宫)의 후원(後園)으로 천년(千年)에 걸친 역사(魔史)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일제(日帝)가 우리의 옛 건물(建物)들을 헐고 이 곳에 지은 총독(總督)의 집을 국가원수(國家元首)가 건국(建國)이후 이제껏 써왔다 노태우대통령(盧泰愚大統領)은 1988년 12월 17일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전통(傳統)을 잇고 드높아진 나라의 위상에 어울리는 청와대(青瓦臺)를 신축(新築)토록 하였다

 

관저(官邸)가 1990년 10월 25일 완공(完工)되고 본관이 1991년 9월 4일 준공(竣工)되니 천하(天下)에 으뜸가는 복지(0福地)위에 겨레의 앞날을 무한히 밝혀줄 청와대(青瓦臺)가 새로 지어졌다

 

사본 -ASB26A.png

 

● 풍수적 고찰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청와대(靑瓦臺)로 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향명이치(嚮明而治)를 못하고임기 말년에 좋지 않는 행로를 보여 왔는데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먼저 청와대로 입수한 용맥부터 보자. 청와대는 한북정맥의 북악산 지룡의 산진처에 자리 잡았다. 주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악산(北岳山.342m)이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맥으로 수우산(水于山)·-대성산(大成山)·-운악산(雲嶽山)-·주엽산(注葉山)··불곡산(佛谷山)·홍복산(弘福山)·도봉산(道峰山)·삼각산(三角山)·노고산(老姑山)··현달산(見達山)··장명산(長命山)으로 행룡한다.

 

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면사 청와대의 주산(主山)이다.


북악산의 정맥은 급하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탈산(脫殺)을 하면서  암석 지대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하나의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 있는 곳으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行龍)한다. 청와대 주맥(主脈)은 소조산이 배면(背面)한 우측의 한 지맥이 청와대 본관으로 급하게 입수(入首)하고 있다.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는 게 대원칙이라 할 수가 있는데 청와대 본관이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이 아니라 음룡(陰龍)이다. 음룡이라 협소하니 용맥을 크게 절단하여 터를 넓혀 건축한 곳이라 지기(地氣)와 사세(四勢)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주산이 후덕(厚德)해야 거주자의 심신(心身)이 안정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가 어우러져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에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니 관대룡(冠帶龍).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로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한다고 하는데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미흡하다 보니 본관에 들어간 자마다.인정(人丁)보다는 금권(金權)에 눈이 멀어 자못 오점이 점철되지 않았을까.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지 집무실.회의실.등을 살펴보니 풍수이론에 합당하기보다는 합당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는 관계라 완전한  평화의 무대가 펼쳐진 것은 아니기에 최고의 책임자가 거처한 곳을 이전한 것은 섣부른 감이 있으나 청와대 본관이 성군이 머무르기에는 흡족한 곳이 아니기에 그렇게 나쁘게 볼일은 아니다. 다만 용와대의 대통령실은 가보지를 않아 가타부타 언급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앞으로 최고 통치자는 위에서 군림하는 권위보다는 국민이 바라는 성군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 천하제일복지.ㅡ구 청와대 본관 터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이 곳은 일찍이 명당 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後苑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융문당降文室, 융무당降武堂, 경농재, 벽화실碧華室, 오운각五閣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운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웅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秘地).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美軍政) 사령관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 관저를 건축했고 다음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 집으로 남게 되었다.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관사 건물을 철거한 후 옛 지형 그대로 복원해 원래 이 터의 이름을 따라 경무대구 본관 터라 하였다. 구(舊) 본관터는 1948년부터 43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한 구 본관이 있었던 자리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 현재의 본관과 관저를 신축하였고,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구 본관을 철거하였다.


● 풍수적 고찰

북악산(北岳山.342m)에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금성체의 아담한 소원봉을 이루고 석맥의 결인을 한 후 취기(聚氣)를 한 곳이 구(舊) 본관터다. 혈장(穴場)이 생각보다 넓지 않아 양택지(陽宅地)보다는 음택지(陰宅地)로 활용해야 할 곳이다. 지세(地勢)의 좌향(坐向)은 정남향(正南向)이 좋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한국풍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