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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장수문화원-동현풍수학회 장원기 교수 관광 마을 스토리텔링 개최장수문화원-동현풍수학회 장원기 교수 관광 마을 스토리텔링 개최 [한국풍수신문] 장수문화원은 장원기 교수와 관광 마을 스토리텔링을 장수군 계남면 일원에서 1일 개최했다. 본 행사는 장수문화원이 후원하고 대한민국 풍수연합회 회장, 학회 회원들이 함께하고 계남면 이장, 장수문화원장,등 관계자들이 참석해 계남면 8대 명당마을 답사와 현안 등을 토의 했다. 장원기 교수는 옥수진경을 원광디지털대학교에서 풍수지리로 '관광풍수지리학' 을 강의하고, 풍수지리학은 관광, 도시개발 등 융,복합 학문으로 스토리텔링과 축제개발 등 활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마을 스토리텔링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어하는 마을, 변화 하고있는 내고향, 찾아가면 편히 쉬고 힘을 얻을수있는 나만의 힐링 공간을 만들기 위해 숨어있는 문화유산을개발하고 지역 주민과의 화합 지역 경재 활성화을 위해 진행한다. 장수문화원장은 "장원기 교수가 숨어있는 지역의 문화유산 발굴과 계승 발전하는데 힘을 모으고 지역 주민과 소통으로 발전하는 장수군을 만들겠다고" 전했다. 한편, 장원기 교수는 그동안 번역한 옥수진경 4권 '옥수비전' 출간도 함께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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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3회...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3회 [한국풍수신문]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 1. 관광지 형황분석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가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2. 장소 정체성 분석 1) 물리적 자연환경(풍수지리) (1) 해인사의 용세 해인사는 북쪽에 조산(祖山)인 가야산, 남쪽의 남산제일봉, 서쪽의 남산, 동쪽의 사자바위가 모두 1000m 넘는 바위로 거대한 화성체(산의 모양이 불처럼 뾰족한 산을 말함)이고, 해인사가 바라보는 남서쪽의 단지봉과 북쪽의 두리봉도 모두 1000m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용세가 강한 화성(火星:뾰복한 산)의 기운을 가지고 일반인이 사는 터 보다 사찰이나 수도의 터가 되기에 적당하다. (2) 해인사 터의 기운 해인사의 혈(穴)은 가야산의 화성 기운이 내려와 장경각 뒤 수미정상탑이 있는 돛대바위에 뭉쳐 그 기운이 대적광전에 뭉쳐 있다. 그리고 해인사를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터 안에 그 기운을 더하고 있다. (3) 해인사의 사신사 해인사의 사신사를 혈처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보면 뒤의 장경판전이 현무,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祖山)은 가야산, 좌측의 외청룡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신부락 뒷산, 외백호는 두리봉, 안산은 비봉산, 그리고 조산(朝山)이다. (4) 해인사의 수세 해인사의 수세는 해인사 경내에 모인 기운을 터에 멈추게 하는 외기의 역할을 한다.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해인사 우측 물과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 역시 해인사의 외청룡과, 비봉산에서 내려오는 보현암의 우백호가 서로 막고 있어 해인사의 물길이 곧바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5) 해인사의 방향 해인사의 방향은 대적광전의 향이 제일 중요하다. 특히 창건시 남향으로 하여 남산제이봉의 화성체의 화기에 의한 화재와, 이후 중건시 향을 남서향으로 단지봉을 향하여 조성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예방한 것이 향을 보는데 제일 중요하다. 해인사의 대적광전 앞에서 휴대폰의 나침반을 활용하여 남산제일봉과 단지봉을 살펴보게 하고, 향을 왜 단지봉이 있는 남서향으로 정했는지 직접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주위의 가야산과 두리봉, 남산도 확인 할 수 있도록 한다. (6) 해인사의 형국 해인사는 앞에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가야산은 선체가 되고, 해인사는 배의 선실이 되며,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이 되며, 장경판 뒤쪽의 돛대바위는 돛대역할을 하여 배가 출항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인사 경내의 배치도 행주형국의 모양을 띠고 있다. 해인사의 형국을 활용하여 행주 형이 되는 선미, 선실, 무게중심, 돛대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이러한 형국이 되는 조건들을 조감도를 설치하고, 전시실에 홀로그램이나 디오라마, 동영상 등을 만들어 설치한다면 해설에 도움이 된다. (7) 해인사의 비보 해인사의 비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행주형국에 따른 비보 과정과, 둘째는 남산제일봉의 화기에 의한 화재에 대한 비보로 나눌 수 있다. 경내에는 행주형국에 따른, 배가 머물고 출항하기 위하여 돛대를 만들었다. 돛대바위의 수미정상 탑이나, 석당간, 그리고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설치한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 배가 순항하기 위해 일주문부터 봉황문까지의 일직선 배치 등은 행주형국을 보충하기 위한 비보이다. 두 가지 관점인 해인사의 행주형국과,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높은 화성체의 산들을 활용한 비보방법에 대한 조감도와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설치한다. 3. 스토리텔링 구성 해인사의 자소정체성은 가야산의 자연적 환경 하에서 팔만대장경의 법보 사찰인 해인사를 지어 100년 동안 이어온 사찰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의 사상과 행공 양식은 관광객들에게 템플스테이, 힐링, 명상, 자아실현 등 다양한 형태로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법보 사찰로 가야산아래에 건립 된 사찰이다.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이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기에는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고 기술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살펴보면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또한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 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 황실에서 일행선사(一行先師(688-727))에 의해 풍수가 한창 번성할 시기이며 외국의 유학승들이 풍수를 접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풍수 지리적으로 입지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1) 해인사의 내기와 외기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1430m)은 해인사의 터를 이루는 조산(祖山)으로 강한 화성체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가야산은 남쪽으로 내려와 사자바위에서 서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해인사 백련암 뒤에서 가지를 나눠 하나의 맥은 지족암을 거쳐 성철 대종사사리탑에 멈추어 해인사의 청룡을 이루고, 마지막 하나의 맥은 해인사 뒤 수미정상 탑에서 기운이 뭉쳐 해인사의 경내로 들어간다. 옛 기록들은 이런 가야산세를 일러 "산형(山形)은 천하 으뜸이고 지덕(地德)은 해동(海東)의 제일”이라 적고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경상도는 돌로 된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은 듯하고 대단히 높고 또한 수려하다.”고 하였다. 석화성이란 돌 꽃 산을 말하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불꽃 모양처럼 타오르는 듯 한 첨예한 산세를 화형(火形)의 산으로 분류한다. 가야산은 풍수의 오성론(五星論)으로 볼 때 화(火)의 기운을 닮은 산이다. 화의 기운을 담은 산 형세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산봉우리가 불타오르듯이 뾰족하여 첨예(尖銳)한 모양을 띠고 있다. 화의 기운은 밝고 명랑하여 수도나 학문을 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본다. 물론 정통의 풍수에서는 양택(陽宅)이건 음택(陰宅)이건 화성(火星)의 산을 주산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인사는 화형의 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화의 기운을 탈바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해인사의 내기인 혈이 최종 뭉친 곳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백련암 뒤를 지나 장경각 뒤쪽에 있는 수미정상 탑이 된다. 이 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돛대바위의 거대한 바위에 기운이 응축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그러므로 가야산에서 내려온 내기의 기운이 수미정상 탑이 있는 거대한 바위에 뭉쳐 해인사 경내로 그 기운이 나누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터의 기운은 가야산 정상에서 내려온 홍류동천의 물줄기가 해인사를 감싸 터의 기운을 경내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해인사의 경내에 명당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사찰의 터는 사람이 사는 터로 궁궐이나 마을처럼 주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경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을 말하지 않고 해인사의 모든 건물이 있는 곳이 혈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택의 혈은 왕릉처럼 음택의 혈보다 크고 그 기운 역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해인사의 수세는 해인사 경내에 모인 기운을 터에 멈추게 하는 외기의 역할을 한다. 풍수에서는 터로 들어오는 기운을 음(陰)의 기운이라 하고, 터 앞의 흐르는 물을 양(陽)이라 한다. 이처럼 음양이 만나면 기운이 생기는 것이다.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해인사 우측 극락교와 홍제교를 지나서, 두리봉 방향의 홍제암과 원당암에서 흘러온 물과 서로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이처럼 해인사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이 외당수가 되어 터의 기운을 머무르게 한다. 터의 기운을 더하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처라 한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 역시 해인사의 외청룡과, 비봉산에서 내려오는 보현암의 우백호가 서로 막고 있어 해인사의 물길이 곧바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풍수에서는 터 안의 물이 산과 함께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산과 물이 함께 빠져나간다고 하여 제일 꺼린다. 이는 터의 기운을 머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현암 앞을 빠져나간 물은 다시 한 번 해인사 박물과 앞에서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가니 매우 이상적인 수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나가기 때문에 해인사의 향을 남향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나 이는 수세보다도 남산제일봉의 화산(火山)의 화기(火氣) 때문이다. 터의 기운이 뭉치게 하는 수세와 함께 해인사 주위의 사신사 역시 기운을 더하고 있다. 해인사의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법당이 된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해인사는 가야산이 기운이 수미정상 탑에 응축하여 그 기운이 장경판전을 지나 대적광전이 있는 법당에 모인다. 그리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뒤의 장경판전이 현무,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양택에서는 산이 멀리 있기 때문에 건물의 좌측을 청룡, 우측을 백호, 명당 앞 건물을 안산, 건물의 뒤를 현무로 여긴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의 가야산이 왕성한 화성체로 해인사의 주된 기운이 되고, 좌측의 남쪽 남산제일봉이 화성체로 청룡방위에서 조응하고, 북쪽 백호 방위에는 두리봉이 조응하며, 해인사 앞에는 비봉산이 봉황의 모양을 하고 날개를 살짝 비켜줘, 멀리 비교적 강하지 않은 조산(朝山인 단지봉을 보고 터를 정하였으니 매우 강한 화(火)의 기운이 주위에서 조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향의 남산제일봉의 화성을 피하여 비교적 순한 금체체의 단지봉을 향하여 향을 잡았다. 해인사의 형국은 보는 각도에서 다양하게 보인다. 먼저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1000m이상의 가야산, 두리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일봉, 사자바위 등의 산이 해인사를 감싼 꽃잎이 되고, 해인사가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여 화심혈(花心穴)의 형국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인사와 해인사 앞에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가야산은 선체가 되고, 해인사는 배의 선실이 되며,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이 되며, 장경판 뒤쪽의 돛대바위는 돛대로 하여 배가 출항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해인사 경내의 배치를 가지고 행주형국이라고도 한다. 해인사는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배가 출항하려는 형국과 같다. 일주문에서 봉황문 그리고 해탈 문까지는 뱃머리가 되고, 장경판전이 있는 곳이 선미(船尾)가 되며, 배의 무게 중심에 대적광전 앞마당의 삼층 석탑이 있고, 산 등허리에 배를 붙잡아 놓기 위해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가 있고,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 큰 느티나무를 심어 땅에 뿌리를 박아 놓았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미정상 사리탑이 있는 곳의 돛대 바위가 돛대가 되니 완벽한 행주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행주형이라한 것은 석존이 큰 교회의 그물을 펴서 인천(人天)의 고기를 건진다는 의미로 하고, 산중의 모양새는 마치 거대한 방주(方舟)와 같다는 불교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해인사의 배치와 비보 해인사의 좌향은 전체적으로 북동쪽에서 남서향을 하고 배치되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남향으로 남산제일봉의 강한 화성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좌향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틀은 남서향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좌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주위 산의 배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해인사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두리봉(1130m)이 있고, 남쪽에는 남산제일봉(1050m)이 강한 화성체(火星體)로 있고, 동쪽에는 사자바위(1064m)가 강한 화성체(火星體)를 가지고 있고, 서쪽은 남산(1113.5m)의 강한 화성체(火星體)가 있어 사방에 모두 1000m가 넘는 화성체의 산이 해인사를 두르고 있다. 그리고 해인사로 들어오는 맥은 북동쪽의 가야산(1434m)이 강한 화성체(火星體)에서 들어오고, 남서쪽은 금성체(金星體)의 단지봉(1030m)이 있다. 따라서 해인사를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남쪽의 남산 제일봉의 화기(火氣)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동안 해인사는 7차례의 큰불이 일어났다. 그래서 1817년 여섯 번째 화재 이후 재건할 때 대적광전의 좌향을 남쪽에서 남서쪽으로 만들었다고 해인사 사적기에 나온다. 따라서 남향을 하면 화기가 충천하여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오나 화재가 일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남쪽의 화기를 막기 위해 남산제일봉에 불을 막는 소금단지를 묻었고 지금도 단오날에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풍수에서 비보란 허결한 부분을 보태어 기운을 보충하거나, 흉한 것을 막기 위해 행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비보 형태는 해인사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허한 부분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일주문 바로 밑에 영지를 만들어 터의 기운을 보완하였다. 둘째, 형국에 의한 비보이다. 해인사는 행주형국이다. 배가 머물고 출항하기 위하여 돛대를 만들었다. 돛대바위의 수미정상 탑이나, 석당간, 그리고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설치한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 배가 순항하기 위해 일주문부터 봉황문까지의 일직선 배치 등은 행주형국에 따른 비보이다. 셋째, 흉한 것을 막기 위한 비보로는 먼저 남산제일봉의 화기에 의한 해인사의 화재를 대비한 남산제일봉에 소금단지 묻는 행사이다. 화기를 억제하기 위해 바닷물의 염도가 가장 강한 단오날을 택하여 남산 제일봉에 소금단지를 묻는 행사는 지금도 100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또한 화재시 방어를 위하여 대적광전과 장경판전 사이에 성토를 하여 급경사 계단을 조성하였다. 또한 우두산의 화성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우두산의 연화반개형을 향하여 수도산에 수도암 3층 석탑을 세워 보완하였다. 3) 해인사의 조성과 600년의 번영 해인사의 창건신화는「가야산 해인사고적」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그리고 1817년 여섯 차례의 화재를 겪고 대적광전의 자리를 현재의 남서향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남향으로 하여 훌륭한 도승(道僧)은 많이 나왔지만 화재로 이한 고심 끝에 향을 지금의 남서향으로 한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모바일 앱을 개발하여 제 1 주제는 창건신화를 주제로하여 만들고, 제 2 주제는 해인사의 중창기를 이용하여 만들고, 제 3주제는 빈번한 화재 이후 대적광전의 향을 남서향으로 한 내용과 해인사의 전체적인 형국을 가지고 만들어 전시실에 배치할 수 있다. 4) 해인사의 내러티브요소 1. 해인사는 조산(祖山)인 가야산, 남쪽의 남산제일봉, 서쪽의 남산, 동쪽의 사자바위가 모두 1000m 넘는 거대한 화성체이고, 해인사가 바라보는 남서쪽의 단지봉과 북쪽의 두리봉도 모두 1000m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용세가 강한 화성(火星)의 기운을 가지고 일반인이 사는 터 보다 사찰이나 수도의 터가 되기에 적당하다. 2. 해인사의 혈(穴)은 가야산의 화성 기운이 내려와 장경각 뒤 수미정상탑이 있는 돛대바위에 뭉쳐 그 기운이 대적광전에 뭉쳐 있다. 3.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祖山)은 가야산, 좌측의 외청룡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신부락 뒷산, 외백호는 두리봉, 안산은 비봉산, 그리고 조산(朝山)이 된다. 4.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해인사 우측 물과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5. 해인사는 창건시 남향으로 하여 남산제이봉의 화성체의 화기에 의한 화재와, 이후 중건시 향을 남서향으로 단지봉을 향하여 조성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예방한 것이 해인사의 향을 보는 데 제일 중요하다. 6. 해인사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인사 경내의 배치를 가지고 행주형국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경내 배치를 기준으로도 행주형국이라 부른다. 7. 해인사의 비보는 화재를 대비한 비보와, 행주형국에 대한 비보의 요소들이 많이 있다. 8. 해인사의 창건신화와 중건신화를 바탕으로 한 해인사의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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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2회... "국사등재형의 명당 능길마을"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2회 [한국풍수신문] 국사를 배출시킨 국사등재형의 명당 능길마을 스토리텔링 1. 마을 현황 능길(能吉)마을은 동향면의 북쪽 국사봉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위쪽에 위치한 웃담을 상능(上能), 아래쪽에 위치한 아래담을 하능(下能)이라 부르고 이 두 마을을 합쳐서 능길(能吉)마을이라 부른다. 마을 앞에는 무주군 안면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흐르고 하천을 중심으로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하천을 따라 능길마을 아래를 추동(楸洞)마을이라 부른다. 능길마을은 지금으로 부터 약500여 년 전 양씨(梁氏), 정씨(程氏), 백씨(白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진안군지(鎭安郡誌)에 나와 있다. 문헌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공조참판을 지낸 정재영(丁載榮)[1798~1876])의 기록과 지선당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500년 전 부터 정씨(丁氏)도 함께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박씨, 홍씨, 백씨, 이씨, 유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2.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 1) 터를 만드는 출신 능길마을은 백두대간의 덕유산이 서쪽으로 구량천을 따라 50여 리를 내려와 마을 뒤에 국사등재형(國師登帝形)의 명당을 만드는 국사봉을 만들고, 그 아래 능금리의 상능길, 하능길, 추동마을, 외금마을의 4개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능길마을을 이루는 지세의 출신은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시작한다. 덕유산 정상에서 아래로 설천봉을 지나 무주리조트를 이루는 주산인 웅장한 두문산을 만들고, 서쪽으로 내려와 노전봉 아래서 안성재의 과협을 건넌다. 그 형상이 마치 거대한 용이 하늘에서 달려 내려오듯 기세가 웅장하다. 안성재의 과협을 건넌 지세는 대전통영 고속도로 위의 어둔산을 건너 마치 용이 승천하는 기세로 높이 올라 안성의 진산인 뾰족한 봉화대가 있는 봉화산을 만든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와 다시 서쪽으로 달려 마을 어귀에 있는 노루재의 과협에 다다르니 여기까지가 안성면을 만드는 지세가 된다. 안성면을 만들고 남은 지세는 노루재를 건너 힘차게 올라가 등근 귀인봉을 만들고 나서 마을의 진산인 국사봉을 만들어 거대한 귀인이 팔을 벌리고 승천하듯 웅장하게 마을의 뒤에서 호위하고 있다. 그 형상이 마치 국사가 하늘로 올라 등제하는 형상인 국사등재형이 된다. 그리고 그 지세는 마을에 이르러 상능길과 하능길, 추동마을을 품고 그 남은 기운은 국사봉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 목성체(木星體)의 성주봉을 일구고 그 아래 용담향교가 있는 외금마을의 연화부수형 명당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보면 덕유산이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안성의 봉화산이 중조산(中祖山)이 되며, 마을 뒤의 국사봉이 주산이 된다. 그리고 마을 앞을 구량천이 감싸고 흐르며, 백두대간의 삿갓봉에서 내려와 마을 앞 구량천을 감싸고 있는 산이 마을 앞 안산(案山)이 된다. 그 형상이 마치 신령스런 선학이 봉림산에서 내려오는 뱀을 잡는 선학포사형(仙鶴捕蛇形)이다. 그리고 마을의 좌측인 청룡은 덕유산에서 내려와 안성을 만드는 지세가 되며, 우측 백호는 국사봉 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보면 백두대간의 덕유산이 마치 거대한 용처럼 꿈틀대며 마을을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마을의 기운은 온화하며 마을 앞 구량천을 따라 넓은 구량들은 마을사람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이 된다. 2) 터의 내기와 외기 한(漢, 기원전 202년 ~ 220년)나라 때 만들어진 풍수경전(風水經典)인 청오경(靑烏經)에서는 터의 기운을 내기(內氣)와 외기(外氣)로 설명하고 있다. "터의 내기는 생명을 싹 티우고(內氣萌生), 터를 감싸는 외기는 성품을 만든다(外氣成形)”고 하였다. 이것이 풍수(風水)이며 이러한 내기와 외기가 서로 기운을 타면 풍수(風水)는 스스로 이루어진다(風水自成)이라 하였다. 즉 마을을 만드는 터의 기운은 내기가 되어 장차 태어날 인물이 되는 씨앗이 되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물, 바람, 햇볕, 공기가 그 씨앗을 길러 훌륭한 인물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나라 때 복응천(卜應天)은 설심부(雪心賦)에서 땅의 기운이 사람을 만든다는 "지령(地靈)은 인걸(人傑)”이라 하였다. 따라서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을 논하기 위해서는 마을을 만드는 지세인 출신(出身)의 내기(內氣)를 살피고, 그 다음에 마을의 형세인 외기(外氣)를 살펴 마을의 정체성을 파악 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신경준이 만든 산경표(山經表)에는 능길마을을 이루는 내기(內氣)인 출신(出身)의 기운이 백두대간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부터 시작한다. 덕유산은 그 정상이 평평한 토성체(土星體)와 둥근 금성체(金星體)로 후덕한 산이 된다. 그래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태조산인 덕유산은 후덕한 기운을 가지고 출발한다. 덕유산에서 설천봉의 지나 무주리조트를 만드는 웅장한 두문산은 그 형상이 둥근 금성체(金星體)이다. 오행으로 토(土)는 금(金)을 생(生)하니 토생금(土生金)으로 두문산이 금성체가 된 것이다. 두문산에서 안성제 과협을 지나면서 지세의 기운은 다시 충전하여 대전통영 고속도로위 어둔산을 지나 마치 용이 승천하는 기세로 높이 올라 뾰족한 봉화산을 만들어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형상이 뾰족한 화성체(火星體)가 된다. 화성은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둥근 금(金)을 만나면 달구어서 도검(刀劍)을 만들 수 있으니 그 기질이 무관(武官)이 된다. 따라서 봉화산을 진산으로 하는 안성은 무관의 기운이 매우 강한 터가 된다. 그리고 덕유산 자락의 삿갓봉에서 안성의 평장마을로 내려오는 지세 역시 뾰족한 화성체로 장차 무관의 기운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안성은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토생금(土生金)의 기운과 봉화산의 화성체(火星體)의 기운으로 무관의 기운이 강하게 나타난다. 안성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는 고려 때의 원(元)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일본 토벌에도 참여한 명신(武臣) 충간공 참정 김신(金侁)을 주향으로 하고,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인 삼부자 충신 장필무(張弼武)와 아들 장의현·장지현과 김희옹(金希雍)을 배향하고 있는 죽계서원(竹溪書院)이 있다. 이처럼 무관이 나온걸 보면 터의 기운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안성의 봉화산에서 서쪽으로 장안리 노루재를 건너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지세는 매우 힘이 있다. 안성에서 강한 화(火)의 기운으로 무관의 기운을 일으킨 덕유산의 후부한 토(土)의 기운은 마을에 이르러 노루재를 건너 둥근 금성체(金星體)와 물결처럼 수려한 수성체(水星體)를 만들고 다시 후덕한 귀인봉을 만든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지나 마을의 주산인 둥근 금성체의 국사봉을 만든다. 국사봉은 마을의 주산이 된다. 마치 국사가 팔을 벌리고 하늘로 오르듯 웅장한 자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노루재에서 국사봉까지 이르는 지세의 기운은 금수상간(金水相間)으로 부귀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금은 물을 생하며(金生水), 물은 금을 깨끗이 씻으니(水生金) 금(金)과 수(水)는 서로 제일 잘 어울리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당대(唐代) 명당경(明堂經)에서 일행(一行)은 이를 하늘에 비유하여 태양 다음에 수성이 나오니 물은 만물의 기본이 되고, 태양의 비(妃)가 되며, 수성은 금성과 처음으로 만나니 만물의 시작이 됨을 알린다 하였다. 그래서 금과 수의 만남을 금수상간(金水相間)이라 하여 부귀를 나타낸다. 헌출하게 둥근 국사봉의 금성체는 다시 하나의 지맥을 남서쪽으로 내려 높은 목성체(木星體)를 만들고 산의 임도를 지나 평평한 토성체를 만들어 그 아래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 기운은 국사봉 아래 나무를 쇠로 다듬어 기물을 만들어 쓸 수 있으니 문장가와 문관(文官)의 기운을 만든다. 그러므로 마을은 국사봉은 문관의 기운이 강한 터를 만들어 장차 문관으로 나라의 일을 논하는 국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국사봉은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의 주산이 되며, 국사봉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온 마지막 자락을 구량천이 감고 도는 마을이 외금마을이 된다. 그러므로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은 나라의 일을 논하는 국사의 탄생을 예고하고, 국사봉에서 문필봉을 지나 마지막 자락에 있는 외금 마을은 문장가로 학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능길마을 터의 기운이 되는 내기(內氣) 이다. 능길마을과 추동마을 터의 기운을 만드는 외기(外氣)는 능길마을을 감싸고 있는 좌측의 청룡과 우측의 백호, 마을 앞의 안산과 멀리 있는 조안산,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과 바람이 된다. 마을의 좌측을 감싸고 있는 청룡자락은 덕유산에서 안성을 거쳐 노루재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 되며, 우측은 국사봉의 우측자락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덕유산 삿갓봉에서 내려와 안성 IC를 거쳐 매방재산에서 구량천을 따라 마을 앞을 감싸고 있는 후부한 토성체(土星體)의 산이 마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마을의 안산은 산 정상이 평하고 양끝이 약간 둥글어 마치 영개굴들의 학이 봉림산에서 내려오는 뱀을 잡으려 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을의 안산 역시 후부한 부위 기운을 가지고 있다. 능길마을의 터의 기운을 만드는 외기(外氣)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좌측의 청룡과 우측의 백호, 마을 앞의 안산과 멀리 있는 조안산,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과 바람이 된다. 마을의 좌측을 감싸고 있는 청룡자락은 덕유산에서 안성을 거쳐 노루재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 되며, 우측 백호는 국사봉의 우측자락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덕유산 삿갓봉에서 내려와 안성 IC를 거쳐 매방재산에서 구량천을 따라 마을 앞을 감싸고 있는 후부한 토성체(土星體)의 산이 마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마을의 안산은 산 정상이 평하고 양끝이 약간 둥글어 마치 영개굴들의 학이 봉림산에서 내려오는 뱀을 잡으려 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을의 안산 역시 후부한 부위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재물이 되는 수세(水勢)는 덕유산 아래 안성에서 발원하는 구량천의 물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 추동마을을 거쳐 내금마을 에서 흘러나오는 양악천과 만나 외금마을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의 외기는 완벽하게 마을의 기운을 더하니 내기(內氣)인 터의 기운은 매우 좋은 기운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마을의 안산 뒤 내금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양악천은 마을의 기운을 안산 너머에서 더하는 암공수(暗拱水)가 되고, 국사봉 뒤의 거대한 용담(龍潭)은 마을 뒤에서 기운을 밀어주는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마을의 기운을 한층 더 배가(倍加) 시킨다. 특히 마을의 뒤에서 밀어주는 기운인 공배수는 2001년도에 착공하여 그 기운으로 이 마을에서 나라의 국사를 논하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김선수 대법관 그리고 2명의 사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3. 국시를 탄생시킨 용의 기운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의 기운은 함께 국사등재형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마을 터의 내기는 문관의 기운을 가지고 있고, 터의 사람을 만드는 외기를 만드는 조안산(朝案山)은 후부하고 용담댐의 공배수(拱背水)와 양악천의 암공수(暗拱水)가 더하여 마을 터의 기운을 완성한 것이다. 정세균 국무총리의 부모역으로 들어오는 용의 출신은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시작된다. 덕유산은 덕이있어 여류로운 산으로 토성채(土星體)이다. 토성은 모든 것을 진압하고 다스리는 기운으로 재물과 제왕의 터를 만든다. 덕유산에서 두문산의 금성체를 지나니 토생금(土生金)으로 금의 기운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안성재 휴게소에 이르러 후부한 노전봉을 일구고 대전통영 고속도로의 오두재 터널의 어둔산을 지나 안성의 진산인 봉화산을 일군다. 안성의 봉화산은 880m의 아름다운 염정(廉貞) 화성체(火星體)로 녹(祿)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녹의 기운은 금을 녹이면 칼을 만드니 무관이 되고, 나무를 태우면 빛이나니 문관의 기운을 만든다. 봉화산에서 남서쪽으로 머리를 돌려 안성을 지나 부남면 장안리 노루재를 지나 능길 마을 뒤에 웅장한 금성체의 국사봉(國師峰) 만든다. 그리고 국사봉에서 아래로 내려와 목성체(木星體)의 문필봉을 만들고 임도(林道)를 지나 평평한 토성체(土星體)를 만들고 산 정산에서 지맥을 내려 터를 만든다. 따라서 터에 이르는 용의 출신은 덕유산이 태조산이 되고, 봉황산이 조종산이 되며, 국사봉이 할아버지 산인 조산(祖山)이 된다. 그리고 출신의 기운은 국사봉의 둥근 금(金)기운이 아래에 있는 목성체(木星體)인 나무를 만드니 문관의 기운이 강하다. 그리고 목성체는 그 아래 현무봉의 토성체(土星體)의 흙에 뿌리내리니 무척 강한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조산인 국사봉에서 현무봉까지 이어지는 터의 내기(內氣)는 장차 문관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조산에서 부모산을 거쳐 터로 내려오는 기운은 현무봉에서 개장 천심하여 좌측으로 청룡을 만들고 우측으로 입수룡과 백호를 만들어 혈장을 만들고 터의 내기를 완성한다. 청룡을 완연하고 백호는 반거(盤居)하니 터의 기운이 장경에서 이르는 대로 완벽하다. 특히 청룡자락 위에 서 있는 두 봉우리는 석모룡(席帽龍)으로 조정에 드는 기운을 가지도 있다. 또한 청룡자락 밖 불당골에 있는 저수지는 기운을 밀어주는 암공수가 되어 기운을 더하고 있다. 안산은 본신(本身)에서 나온 백호가 되며 매우 가깝다. 그리고 청룡이 3~4겹 감싸고 백호 역시 3~4 겹으로 매우 강하게 감싸고 있어 터의 기운은 무척 강하다. 태조산에서 부터 터에 이르는 기운이 내기(內氣)로 품성을 만든다면 청룡과 백호 물과 안산 그리고 조안산은 터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완성한다. 만약 터의 내기가 제왕의 기운이라면 밖을 감싸는 기운이 도와주어야 제왕이 된다. 터의 씨앗이 되는 내기는 문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의 외기 역시 안산과 조안산이 매우 특이하다. 안산은 가까워 빠른 발복을 나타낸다. 그리고 조안산(朝案山)에 있는 세 개의 금성체는 풍수에서 품자삼태를 나타낸다. 품자 삼태는 삼공성(三公星)으로 삼공인 재상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개의 귀인봉은 마치 연달이 있는 창고 모양으로 연오창(連敖倉)이 된다. 연오창은 대부귀( 大富貴)을 주관하여 재상의 응함이 있다. 따라서 내기의 기운을 완성시키는 외기는 재상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장차 재상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조산을 뒤로 감싸고 금강물이 되는 거대한 용담땜이 흐르니 터에 기은을 더해주는 공배수가 된다. 따라서 터의 기운은 내기와 외기 그리고 터의 뒤에서 밀어주는 기운으로 매우 강한 가운을 가지고 있다. 풍수의 고전에서는 터의 발복 년도를 1기(紀)인 12년으로 하고 있다. 보통은 조(祖)와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참고하여 그 응험을 예측하나 이 이 터는 발복이 빠르니 부모의 묘에서도 그 응함을 볼 수 있다. 전채적의로 발응은 다음과 같이 논할 수 있다. 첫째; 터에서 태어나는 내기의 기운은 조산에서 현무봉까지 금, 목, 토의 변화로 문(文)의 기운이 나온다. 둘째; 터의 기를 완성하는 외기는 삼공(三公)의 기운으로 재상(宰相)인 장관, 국회의장, 국무총리가 나올 수 있다. 셋째; 발복 시기는 안산이 가까워 2~30년 안에 가능하다. 넷째; 발복 공위(公位)는 우선룡 으로 입수하여 차남이 가능하다. 다섯째; 선대에 조성한 천반산 터의 천교혈(天巧穴)의 옥루보전(玉樓寶殿) 조안산은 제왕의 기운이 있다. 4. 능길마을 사람들이 만든 문화 1) 깃고사 진안군 지역에서는 기를 세우면서 제의를 행하는 것을 깃고사라 한다. 진안 지역 깃고사는 기세배와 다르게 기를 세우고 제의를 행하는 것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진안군 지역에서는 현재 동향면 능금리 능길 마을과 백운면 백암리 상백 마을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능길 마을 깃고사는 상능 마을과 하능 마을이 함께 지낸다. 역사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을 형성 연대와 관련하여 1800년대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에는 ‘능사사명(能社司命)’이라 새겨져 있는데 그 의미는 능길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능길 마을에서는 깃고사를 지내면서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 때문에 일종의 당산제 성격을 띠고 있다. 현재 깃고사 때 사용하는 기는 1999년에 제작한 것으로 그 이전인 1982년에 제작해 사용했던 기는 보관 중이다. 능길 마을 깃고사 기의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는 큰 기와 작은 기가 있다. 큰 기는 1999년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기의 훼손 정도가 심하면 다시 제작하여 사용한다. 기는 흰 천으로 직사각형 3×5m 정도의 크기이며 검은 천으로 테두리를 쳐 놓고 있다. 가운데에 ‘능사사명(能社司命)’이라 새겨져 있고 한쪽에 서기 199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새겨져 있다. 2개를 세우는 작은 기는 영기(令旗)라 부른다. 검은 천에 영(令)자가 새겨져 있다. 깃대는 대나무에 새끼줄을 감아 놓은 형태이며 크기는 7m 정도 된다. 깃대는 마을에 2개가 있으며 마을 창고 처마에 보관하고 기는 마을 회관에 보관하고 있다. 깃대 맨 위에 장식하는 것을 ‘꿩장목’이라고 하는데 흔히 꿩 깃털로 장식한다. 능길 마을에서는 꿩 깃털이 없어 깃고사를 지낼 때마다 짚으로 꿩장목을 장식한다. 꿩장목 바로 아래에 흰 천으로 감아 놓는 것을 ‘머리태’라고 한다. 흔히 영기에서는 꿩장목 아래에 수염을 다는데 능길 마을에서는 흰 천을 달아맨다. 기를 세워 묶을 수 있는 3개의 긴 끈이 필요하며 3~4개의 버팀 쇠가 필요하다. 기는 예전에는 논에 세웠으나 지금은 능길 회관 앞에 세운다. 능길 마을 깃고사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오전 10시 경에 지낸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기를 달아매어 놓은 후 2월 초사흗날에 뗀다. 제주는 섣달에 대동회에서 결정하며 동네에서 궂은 일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정하며 상능과 하능 교대로 정한다. 비용은 논 10마지기, 밭 400평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백설기, 삼색실과, 탕, 전 등을 준비하며 축문은 박찬언이 매년 시정하여 준비한다. 기 세우는 절차는 회관 앞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진행한다. 먼저 창고 처마에 보관 중인 깃대를 내려놓은 후에 깃대 끝 부분에서 2m 정도 아랫부분에 기를 묶는다. 이어 짚으로 만든 ‘꿩장목’을 깃대 끝 부분에 묶는다. 그리고 ‘꿩장목’ 바로 아래에 ‘머리태’라 하여 흰 천을 묶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를 세운다. 이와 함께 작은 기 2개도 함께 묶는다. 기를 세울 때에는 미리 세 곳에 버팀 쇠를 박고 세 줄의 끈으로 균형을 이루게 하여 팽팽하게 묶는다. 기를 세울 때 풍물을 울린다. 기를 세운 후 기 바로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풍물을 치면서 시작된다. 제의는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선정해 전통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제물장만은 상능마을 이장 집에서 준비하였다. 제물 역시 일반 제사 때 준비하는 음식과 같다. 제를 마친 후 소지를 올리는데 초헌관, 중헌관, 종헌관이 소지 하면서 제를 마친다. 한 달 후에 기를 내려놓는데 이때 특별한 제의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능금리 능길 깃고사 [能金里能吉-告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5. 멀티유즈 콘텐츠 개발과 마을의 희망 능길마을은 국사봉의 자연환경과 마을의 깃고사 문화를 원천소스로 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할 수 있다. 막연히 몇 명의 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적인 측면에서 현재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스토리로 차별화를 구성해야 한다. 국사봉의 이미지를 국사와 연계한 국사등재형 명당을 이용한 마을 정체성 확립과, 마을 홍보 안내판 제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국사등재형의 지세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을탐방로 설치와 해설은 마을의 진정성을 증가시킨다. 특히 지선당의 대학 이념과 효경의 이념을 부각시킨 "수신제가 입신양명”은 연계프로그램으로 체류형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을의 문화인 깃고사를 활용한 놀이문화와 농업의 중요성, 농자천하지대본의 의의를 체험 할 수 있는 깃고사 놀이를 개발하여 체험객에게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 할 수 있다. 이것이 마을의 차별화이며 콘텐츠개발 전략이 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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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1회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의 명당 내금마을 스토리텔링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1회 1.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의 명당 내금마을 스토리텔링 1. 마을 현황 내금(內金)마을은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 있다. 옛날에 마을 오른쪽에 금구사(金龜寺)가 있어 금구사라 불리다가 내금마을이라 불렀다. 마을의 뒤에 있는 주산인 명덕봉(明德峰)이 둥근 금성체(金星體)의 형상으로 김씨가 들어오면 잘 산다는 속신(俗信)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반남인(潘南人) 박지영(朴之英)이 성종 11년(1480년) 금산으로부터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고, 광산인(光山人) 김광후(金光厚)가 담양으로부터, 인천인(仁川人) 이승길(李升吉)이 영동으로부터, 여양인 진석원(陳錫元)과 달성인 서정주(徐景柱)가 합천으로부터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현재 마을에는 33세대 7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2.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 1) 진안의 지세 진안군의 기운을 만드는 지세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려와 제일로 덕이 있어 여유로운 덕유산을 만들고, 아래로 남덕유산을 지나 장수군의 장안산을 돌아 전주와 대전을 만드는 호남금남정맥을 만든다. 장수의 팔공산에서 다시 북으로 진안의 성수산과 진안의 마이산, 부귀산을 만들고 주화산에 이르러 하나의 맥은 전주로 들어가니 이것이 호남을 만드는 호남정맥이 된다. 그리고 하나의 지맥은 다시 북으로 운장산을 거쳐 금산을 지나 계룡산에서 대전을 만드니 이것이 금남정맥이 된다. 그리고 수세는 장수 뜸봉샘에서 산맥을 따라 북으로 진안의 용담댐을 거쳐 금산을 지나 대전을 돌아 서해로 들어가니 이것이 금강물이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물이 모여 용담을 이룬 곳에 진안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진안을 만드는 지세는 금강물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기운이 내려오고, 서쪽에서는 마이산과 부귀산, 운장산의 호남금남정맥에서 기운이 내려온다. 그러므로 진안의 동쪽지역인 동향면과 안천면은 후부한 덕유산의 토성체 기운으로 진안의 중심 기운이 되고, 서쪽지역인 백운면에서 부귀면과 주천면에 이르는 지역은 마이산과 부귀산, 운장산의 구봉산 기운으로 문무의 기운과 많은 인재가 태어난다. 그리고 1,000년 전 이름 붙인 조그만 용담천이 지금은 거대한 수룡(水龍)이 사는 용담(龍潭)을 이루니 새로운 남한의 중심 기운을 태동하고 있다. 2) 내금마을의 출신 용담에 물이차면 영귀산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내금(內金)마을을 만드는 지세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시작된다. 남덕유산을 대동여지도에는 봉황봉(鳳凰峰)으로 표기하고 조선 시대에는 봉황산(鳳凰山) 또는 황봉(黃峯)이라고 하여 산중에서도 제일 신령스러운 황제(皇帝)의 봉우리로 여겼다. 또한,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이라고 하고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덕유산이라고 한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남덕유산은 아래로 서봉을 지나 문필봉 모양의 삿갓봉을 만든다. 삿갓봉은 『한국지명요람』에 산의 모양이 삿갓 또는 붓처럼 생겼다고 하여 삿갓봉 또는 문필봉이라고 전해온다. 남덕유산에서 서봉과 삿갓봉을 지나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건너 계북면 솔재의 과협처로 내려오는 용맥의 기세와 모양이 하늘의 말(天馬)이 산비탈의 위에서 아래로 달려 내려오는(馳坂) 것으로 송대 주자의 친구 채원정이 발휘(發揮)한 옥수진경(玉髓眞經)에서는 천마치판(天馬馳坂)이라 부르며 이러한 형세는 터에 이르러 대귀(大貴)하고 발달이 빠르다. 그러므로 황봉의 기운이 천마치판(天馬馳坂)의 기세로 장차 마을에 이르러 대귀(大貴)한 기운이 나오는 것이다. 남덕유산에서 영귀산으로 힘차게 내려온 용맥은 왼쪽으로 천반산에 이르러 죽도를 머금고 있는 천반함주(天盤含珠)의 명당인 정재영의 묘역을 만들고, 오른쪽으로 마을로 내려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내려오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의 명당에 지선당을 만들어 5명의 과거급제를 이룬다. 남덕유산에서 계북면으로 내려온 용맥은 임평 삼거리에 있는 솔재의 과협처를 지나서 문필봉 모양의 우뚝 솟은 목성체(木星體)와 둥금 금성체(金星體)를 만들고 힘차게 마을이 있는 동향면 영귀산(靈龜山)으로 달려간다. 영귀산(靈龜山)은 영구산이라고도 부르며 그 모양이 둥근 금성체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귀산이라 부른 것이다. 영귀산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품은 산은 두 개의 지맥을 나눠 하나의 지맥은 왼쪽으로 달려가 장수 뜸봉샘에서 발원한 금강물과 구량천이 만나는 합수처 이르러 하늘의 소반처럼 웅장한 천반산(天盤山)을 만들어 죽도(竹島)를 머금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는 마치 천반산의 용이 죽도를 머금고 있는 형상의 천반함주(天盤含珠) 형상으로 산 정상에는 능길마을에서 태어나 내금마을 지선당에서 공부하여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전 국무총리 정세균의 5대조인 정재영(丁載榮)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하나의 맥은 마을로 내려가 명덕봉(明德峰)을 만드니 이는 내금마을의 주산이 된다. 명덕봉 역시 영귀산처럼 등근 금성체(金星體)로 마을로 내려오는 그 형상이 마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이 된다. 전체적으로 내금마을 터를 이루는 지세는 남덕유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하고, 영귀산(靈龜山)을 할아버지 산인 조산(祖山)으로 하고, 명덕봉(明德峰)이 마을의 부모산이 되어 현무봉이 된다. 그러므로 마을의 내기(內氣)는 남덕유산의 황봉(黃峰)의 기운이 내려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되는 대귀(大貴)한 기운이 되므로 장차 내금마을의 기운은 예측할 수 있다. 또한, 향후 조산(祖山)인 영귀산 아래 수침(水砧)마을의 물(水)을 다듬잇돌(砧)로 댐을 완성하면 이는 내금마을에 강한 기운을 밀어주는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마을의 기운은 한층 더 배가(倍加)될 것이다. 3. 내금마을 사람들이 만든 문화 1) 지선당 능금(能金)마을은 능길(能吉)마을과 금곡(金谷)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능금마을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지영(朴之英)에서 부터 시작한다. 내금마을 지선당에 있는 반남박씨 유허비문(潘南朴氏遺墟碑文)에 의하면 "공의 휘는 지영(之英)이고 본관은 나주의 반남현이다. 단종조의 충신(忠臣)인 박희권(朴希權)은 그의 6대조가 되며, 부친은 경복(景福)으로 세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공은 대대로 금산(錦山)에서 살았는데 임진(壬辰) 병란을 당하여 두 아우를 이끌고 이곳 금곡리(金谷里)로 피난하여 8년의 병화(兵火)를 무사히 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4명의 아들을 충효로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이러한 뜻을 받들어 5대손(1772년)에 이르러 명덕봉 아래에 지선당(止善堂)을 만들어 후학에 힘쓰고 가문의 기틀과 마을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공의 6대손에 이르러서는 박제대(朴齊大)가 49세 때인 1840년(헌종 6)에 식년시에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지사를 지냈으며, 그 후 낙향하여 용담 향교에 사마재를 건립하는 등 그 당시 유림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지니고 향리 발전과 후학 교육에 힘썼다. 그 후 공의 후손은 번창하여 각 마을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 1백여 호에 이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1825년 박제대 선생보다 3살 아래이며 이곳 지선당에서 공부하여 18세에 급제하여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의 증손(曾孫) 정임상(丁任相)이 쓴 글이다. 정재영은 이곳 반남박씨 외손(外孫)이 된다. 그리고 정재영 선생의 5대손이 전 국무총리 정세균이다. 따라서 능금마을의 시작은 금곡리 내금마을의 박지영(朴之英)에서부터 번창하여, 현재 용담향교가 있는 외금마을과 능길마을 그리고 추동마을로 이어지는 그것으로 보인다. 지선당에 걸려있는 지선당기(止善堂記)는 1772년(영조 48년) 박지영의 5대손 박상정(朴相禎)이 기문을 지었다. 지선당(止善堂)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박지영(朴之英)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이 지방 후학들의 교육을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세운 사당이다. 건립 연대는 1772년(영조 48)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을 비롯하여 1840년(헌종 6) 진사시에 합격한 박제대(朴齊大) 등 4명의 진사를 배출하여 모두 5명의 과거 급제를 시켰다. 1772년(영조 48년) 박지영의 5대손 박상정(朴相禎)이 쓴 지선당기(止善堂記)에 의하면 "당의 이름을 지선(止善)으로 한 것은 명덕봉(明德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명덕산의 봉우리가 덕유산(德裕山)으로부터 내려와 서쪽으로 돌아 내려와 마을 앞 두 시내의 합류지점에 우뚝 솟아있어 바라보면 높고 닦아 가면 엄숙하여 대인군자자 만인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나의 고조께서 금산으로부터 오셔서 남쪽 기슭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터를 잡아 덕행을 닦고 모자란 풍속을 교화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아 그 덕업을 기리고자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한 것은 첫째, 조상을 받들어 근본에 보답하니 이는 선에 그침(止善)이요. 둘째, 후손을 가르쳐 몽매함을 깨우치니 또한 선에 그침(止善) 이다. 대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이 명덕(明德), 신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인데, 능히 선(善)을 밝히고 본성을 회복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효공(孝恭) 하는 방법으로 종중안의 후진을 장려하니 이는 실로 명덕(明德), 신민(親民), 지선(至善)이 그침(止)이다. 하물며 이 집이 이미 명덕산(明德山) 아래 있으니 지선(止善)으로 이름한 것이 우연히 합하고 가까이에 다가선 것이다. 이에 똑똑히 깨달아 소리 내어 사례하고 곧 지선(止善) 두 글자를 당액에 건다. 무릇 지선당에 올라 책을 잡는 이는 고학(古學) 명선(明善)의 도(道)에 뜻을 두고 지선(止善)의 이름을 돌아보라. 스스로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하여 도학(道學)에 공(功)의 극치를 이룰 것이며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여 가문에 광채가 발동하고 또한 성(誠)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선당은 대학(大學)의 이념과 효경(孝經)의 이념을 가르치던 곳으로 박씨 가문과 능금마을의 정신적 기틀이 되는 중요한 곳이 된다. 2) 지선당 수학 인물 정재영(丁載榮) 정재영(丁載榮)은 조선 후기 진안 능길마을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근재(根齋), 자는 춘경(春卿). 할아버지는 정남추(丁南樞)이고 아버지는 정우언(丁宇彦), 외할아버지는 박경(朴烱)으로 반남박씨 외손이 된다. 정재영(丁載榮)[1798~1876] 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동네에 있던 외갓집 반남박씨의 서당인 지선당(至善堂)에서 공부하였는데, 글공부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년(철종 9)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년(고종 2)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정재영(丁載榮)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동네에 있던 외가 반남박씨의 서당인 지선당(至善堂)에서 공부하였는데 글공부를 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선당에 걸려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부친인 정병남(丁炳南) 씨가 쓴 현판에는 "나의 고조(高祖)는 어려서 고개를 넘고 내천을 건너 명덕봉 아래 반남박씨 외가댁의 지선당에서 공무를 하였다. 10여 년을 불철주야 근면하게 공부하였고, 밤에 고개를 넘고 냇가를 건널 때는 큰 호랑이가 앞에서 인도하여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또한, 비가 오는 어두운 밤에는 도깨비가 불을 도로 좌우에 비춰 편안하게 건너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공이 순조(純祖)때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괴나리봇짐을 지고 길을 떠났을 때 어느 주막에 들르게 되었다. 주막에는 한양으로 과거 보러 오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런데 전날 밤 이 주막의 주인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주막 담장 밑에는 매화가 만발하였는데 "곰배"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자색 연기가 자욱하고 큰 청룡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내려오더니 거침없이 "곰배"를 휘감아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주인은 꿈에서 깨어나 다음날 행여나 하고 담 밑을 보니 과연 "곰배"가 있어 그것을 치우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때 풍채가 의젓하고 기골이 장대한 선비 하나가 대문을 들어서더니 선배들이 모여 있는 대청으로 가지 않고 담장 밑으로 가서 "곰배"를 깔고 앉았다. 주인이 이상히 여겨 "아직도 자리가 넓으니 대청으로 올라오시죠?” "이곳도 좋소이다"주인은 지난밤 꿈이 생각나서 "성씨가 무엇입니까?” "곰배 정(丁)씨요" 하고 대답을 하는 재영을 보고 주인은 무릎을 '탁' 치며 좋은 방으로 들게 하여 "정 선비께서는 이번 과거에 꼭 급제하리다" 하며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 그 뒤 재영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은 1816년(순조 16)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년(철종 9)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년(고종 2)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공은 많은 벼슬을 하며 충신으로 효자로서 선정을 베풀다 일흔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소는 현재 천반산(647.3m) 정상에 천교혈(天巧穴)로 옥루보전(玉樓寶殿)을 조안산으로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있으며 이는 현재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5대조가 된다. 묘에 올라보면 조안산이 무척 멀리 보인다. 천반산 정상은 647m로 혈장 아래의 사격은 보이지 않고 멀리 진안의 부귀산(806m)만이 오로지 옥루보전(玉樓寶殿)의 형태로 조산(朝山)이 되어 좌측 청룡자락 너머로 혈을 조응하고 있다. 이곳의 발응은 천교혈로 제왕지지가 합당하며 또한 옥루보전의 응 또한 제왕지지가 된다. 단지 안산이 매우 멀리 있어 발응 역시 더디게 된다. 따라서 140년 후에 국무총리의 탄생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 혈은 천교혈로 일반인이 쉽게 쓸 수 없는 터가 되며, 지선당의 건립이념인 명명덕(明明德)과 지선(止善) 그리고 입신출세하여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 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현실로 드러난 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철종실록(11권, 철종 10년 3월 6일)은 "집의(執義) 정재영(丁載榮)의 상소에 따라 전 평안 감사 김기만 등에게 간삭(刊削)의 형을 내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3월 7일 "집의 정재영을 대사간에 제수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정재영은 집의(執義)로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 소속 종3품이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기만(金箕晩) 등 9명의 관리의 비리와 죄를 논하였다. 이에 왕이 "과연 이러하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으며, 선비가 어떻게 과거를 볼 수 있겠는가? 너무도 한심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가 않다. 진실로 청백(淸白)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 미더움을 받고 있었다면, 이런 말이 어찌하여 이르겠는가? 위에 논열(論列)한 사람들은 우선 간삭(刊削: 관직이나 공신의 지위를 빼앗음)시키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朝鮮王朝 철종실록 11권, 철종 10년 3월 7일) 왕은 "이렇게 적요한 때를 당하여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집의 정재영(丁載榮)을 대사간에 제수하라.” 명하였다. 이처럼 정재영은 청렴결백하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정의를 위하여 직언과 실천을 행하여 대사간에 제수된다. 정재영의 상소를 보면 그 당시에도 관리들의 과거시험 부조리와 부패한 관리들이 많았으며 정재영은 이를 규찰하고 왕에게 직언하여 죄인들을 다스리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이다. 4. 마을의 희망 내금마을은 영구산 아래 수침댐에 물이차면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영구하산형의 명당기운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현재도 탄생하고 있는 마을이다. 근래에 들어와서도 군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박관순 의원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그리고 향후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의 2개의 비보탑을 복원하고 수침댐이 완공되면 더욱 많은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마을이다. 특히 지선당의 교육이념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대학 이념에 효경의 입신양명을 더하여 "수신제가 입신양명”으로 치국평천하보다 효의 마지막인 입신양명을 더하여 만든 교육이념은 현대 청소년 및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체험하여야 하는 장소가 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면 향후 중요한 마을의 콘텐츠가 될 것이다. 내금마을은 명덕봉 아래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곳에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마을 입구 바위에는 반남박씨세거(潘南朴氏世居)가 새겨져 있고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마을 입구 바위 아래 도로와 맞은편 개울 건너에는 2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이는 마을의 물길이 아래로 곧바로 빠져나가 마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하여 2개의 돌탑을 만들어 비보한 것이다. 그러나 도로 옆 돌탑은 작은 흔적만 있고 없어져 버려 아쉬움이 있다. 마을의 돌탑은 마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한 풍수적인 비보 방법으로 마을에서 만들어온 중요한 마을의 문화이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탑을 복원하고 탑제를 지낸다면 단합하는 중요한 이를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예부터 내려오던 금구사(金龜寺)터를 재조명하여야 한다. 금구사란 이름은 영귀산과 명덕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영귀산은 신령스러운 거북으로 마을의 할아버지산이 되며, 명덕봉은 마을의 주산으로 둥근 금성체의 거북 모양이다. 그리고 마을의 형세 역시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으로 보이므로 사찰의 유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향후 영귀산 아래 수침댐에 물이 차면 용담댐의 기운과 더불어 내금마을은 다시 영귀산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기운을 가질 수 있으니 마을은 다시 중흥하게 된다. 그리고 멀티유즈 콘텐츠개발을 통한 프로그램개발로 마을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을의 희망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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