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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3회...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

기사입력 2023.01.1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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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3회

     

    [한국풍수신문]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

     

    1. 관광지 형황분석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가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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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장소 정체성 분석

     

    1) 물리적 자연환경(풍수지리)

    (1) 해인사의 용세

    해인사는 북쪽에 조산(祖山)인 가야산, 남쪽의 남산제일봉, 서쪽의 남산, 동쪽의 사자바위가 모두 1000m 넘는 바위로 거대한 화성체(산의 모양이 불처럼 뾰족한 산을 말함)이고, 해인사가 바라보는 남서쪽의 단지봉과 북쪽의 두리봉도 모두 1000m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용세가 강한 화성(火星:뾰복한 산)의 기운을 가지고 일반인이 사는 터 보다 사찰이나 수도의 터가 되기에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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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해인사 터의 기운

    해인사의 혈(穴)은 가야산의 화성 기운이 내려와 장경각 뒤 수미정상탑이 있는 돛대바위에 뭉쳐 그 기운이 대적광전에 뭉쳐 있다. 그리고 해인사를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터 안에 그 기운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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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인사의 사신사

    해인사의 사신사를 혈처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보면 뒤의 장경판전이 현무,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祖山)은 가야산, 좌측의 외청룡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신부락 뒷산, 외백호는 두리봉, 안산은 비봉산, 그리고 조산(朝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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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해인사의 수세

    해인사의 수세는 해인사 경내에 모인 기운을 터에 멈추게 하는 외기의 역할을 한다.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해인사 우측 물과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 역시 해인사의 외청룡과, 비봉산에서 내려오는 보현암의 우백호가 서로 막고 있어 해인사의 물길이 곧바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5) 해인사의 방향

    해인사의 방향은 대적광전의 향이 제일 중요하다. 특히 창건시 남향으로 하여 남산제이봉의 화성체의 화기에 의한 화재와, 이후 중건시 향을 남서향으로 단지봉을 향하여 조성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예방한 것이 향을 보는데 제일 중요하다.

     

    해인사의 대적광전 앞에서 휴대폰의 나침반을 활용하여 남산제일봉과 단지봉을 살펴보게 하고, 향을 왜 단지봉이 있는 남서향으로 정했는지 직접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주위의 가야산과 두리봉, 남산도 확인 할 수 있도록 한다.

     

    (6) 해인사의 형국

    해인사는 앞에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가야산은 선체가 되고, 해인사는 배의 선실이 되며,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이 되며, 장경판 뒤쪽의 돛대바위는 돛대역할을 하여 배가 출항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인사 경내의 배치도 행주형국의 모양을 띠고 있다.

     

    해인사의 형국을 활용하여 행주 형이 되는 선미, 선실, 무게중심, 돛대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이러한 형국이 되는 조건들을 조감도를 설치하고, 전시실에 홀로그램이나 디오라마, 동영상 등을 만들어 설치한다면 해설에 도움이 된다.

     

    (7) 해인사의 비보

    해인사의 비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행주형국에 따른 비보 과정과, 둘째는 남산제일봉의 화기에 의한 화재에 대한 비보로 나눌 수 있다. 경내에는 행주형국에 따른, 배가 머물고 출항하기 위하여 돛대를 만들었다. 돛대바위의 수미정상 탑이나, 석당간, 그리고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설치한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 배가 순항하기 위해 일주문부터 봉황문까지의 일직선 배치 등은 행주형국을 보충하기 위한 비보이다. 두 가지 관점인 해인사의 행주형국과,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높은 화성체의 산들을 활용한 비보방법에 대한 조감도와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설치한다.

     

     

    3. 스토리텔링 구성

     

    해인사의 자소정체성은 가야산의 자연적 환경 하에서 팔만대장경의 법보 사찰인 해인사를 지어 100년 동안 이어온 사찰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의 사상과 행공 양식은 관광객들에게 템플스테이, 힐링, 명상, 자아실현 등 다양한 형태로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법보 사찰로 가야산아래에 건립 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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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이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기에는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고 기술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살펴보면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또한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 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 황실에서 일행선사(一行先師(688-727))에 의해 풍수가 한창 번성할 시기이며 외국의 유학승들이 풍수를 접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풍수 지리적으로 입지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1) 해인사의 내기와 외기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1430m)은 해인사의 터를 이루는 조산(祖山)으로 강한 화성체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가야산은 남쪽으로 내려와 사자바위에서 서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해인사 백련암 뒤에서 가지를 나눠 하나의 맥은 지족암을 거쳐 성철 대종사사리탑에 멈추어 해인사의 청룡을 이루고, 마지막 하나의 맥은 해인사 뒤 수미정상 탑에서 기운이 뭉쳐 해인사의 경내로 들어간다.

     

    옛 기록들은 이런 가야산세를 일러 "산형(山形)은 천하 으뜸이고 지덕(地德)은 해동(海東)의 제일”이라 적고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경상도는 돌로 된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은 듯하고 대단히 높고 또한 수려하다.”고 하였다. 석화성이란 돌 꽃 산을 말하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불꽃 모양처럼 타오르는 듯 한 첨예한 산세를 화형(火形)의 산으로 분류한다.

     

    가야산은 풍수의 오성론(五星論)으로 볼 때 화(火)의 기운을 닮은 산이다. 화의 기운을 담은 산 형세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산봉우리가 불타오르듯이 뾰족하여 첨예(尖銳)한 모양을 띠고 있다. 화의 기운은 밝고 명랑하여 수도나 학문을 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본다. 물론 정통의 풍수에서는 양택(陽宅)이건 음택(陰宅)이건 화성(火星)의 산을 주산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인사는 화형의 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화의 기운을 탈바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해인사의 내기인 혈이 최종 뭉친 곳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백련암 뒤를 지나 장경각 뒤쪽에 있는 수미정상 탑이 된다. 이 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돛대바위의 거대한 바위에 기운이 응축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그러므로 가야산에서 내려온 내기의 기운이 수미정상 탑이 있는 거대한 바위에 뭉쳐 해인사 경내로 그 기운이 나누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터의 기운은 가야산 정상에서 내려온 홍류동천의 물줄기가 해인사를 감싸 터의 기운을 경내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해인사의 경내에 명당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사찰의 터는 사람이 사는 터로 궁궐이나 마을처럼 주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경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을 말하지 않고 해인사의 모든 건물이 있는 곳이 혈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택의 혈은 왕릉처럼 음택의 혈보다 크고 그 기운 역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해인사의 수세는 해인사 경내에 모인 기운을 터에 멈추게 하는 외기의 역할을 한다. 풍수에서는 터로 들어오는 기운을 음(陰)의 기운이라 하고, 터 앞의 흐르는 물을 양(陽)이라 한다. 이처럼 음양이 만나면 기운이 생기는 것이다.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해인사 우측 극락교와 홍제교를 지나서, 두리봉 방향의 홍제암과 원당암에서 흘러온 물과 서로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이처럼 해인사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이 외당수가 되어 터의 기운을 머무르게 한다. 터의 기운을 더하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처라 한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 역시 해인사의 외청룡과, 비봉산에서 내려오는 보현암의 우백호가 서로 막고 있어 해인사의 물길이 곧바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풍수에서는 터 안의 물이 산과 함께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산과 물이 함께 빠져나간다고 하여 제일 꺼린다. 이는 터의 기운을 머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현암 앞을 빠져나간 물은 다시 한 번 해인사 박물과 앞에서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가니 매우 이상적인 수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나가기 때문에 해인사의 향을 남향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나 이는 수세보다도 남산제일봉의 화산(火山)의 화기(火氣) 때문이다.

     

    터의 기운이 뭉치게 하는 수세와 함께 해인사 주위의 사신사 역시 기운을 더하고 있다. 해인사의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법당이 된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해인사는 가야산이 기운이 수미정상 탑에 응축하여 그 기운이 장경판전을 지나 대적광전이 있는 법당에 모인다. 그리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뒤의 장경판전이 현무,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양택에서는 산이 멀리 있기 때문에 건물의 좌측을 청룡, 우측을 백호, 명당 앞 건물을 안산, 건물의 뒤를 현무로 여긴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의 가야산이 왕성한 화성체로 해인사의 주된 기운이 되고, 좌측의 남쪽 남산제일봉이 화성체로 청룡방위에서 조응하고, 북쪽 백호 방위에는 두리봉이 조응하며, 해인사 앞에는 비봉산이 봉황의 모양을 하고 날개를 살짝 비켜줘, 멀리 비교적 강하지 않은 조산(朝山인 단지봉을 보고 터를 정하였으니 매우 강한 화(火)의 기운이 주위에서 조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향의 남산제일봉의 화성을 피하여 비교적 순한 금체체의 단지봉을 향하여 향을 잡았다.

     

    해인사의 형국은 보는 각도에서 다양하게 보인다. 먼저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1000m이상의 가야산, 두리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일봉, 사자바위 등의 산이 해인사를 감싼 꽃잎이 되고, 해인사가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여 화심혈(花心穴)의 형국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인사와 해인사 앞에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가야산은 선체가 되고, 해인사는 배의 선실이 되며,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이 되며, 장경판 뒤쪽의 돛대바위는 돛대로 하여 배가 출항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해인사 경내의 배치를 가지고 행주형국이라고도 한다. 해인사는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배가 출항하려는 형국과 같다. 일주문에서 봉황문 그리고 해탈 문까지는 뱃머리가 되고, 장경판전이 있는 곳이 선미(船尾)가 되며, 배의 무게 중심에 대적광전 앞마당의 삼층 석탑이 있고, 산 등허리에 배를 붙잡아 놓기 위해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가 있고,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 큰 느티나무를 심어 땅에 뿌리를 박아 놓았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미정상 사리탑이 있는 곳의 돛대 바위가 돛대가 되니 완벽한 행주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행주형이라한 것은 석존이 큰 교회의 그물을 펴서 인천(人天)의 고기를 건진다는 의미로 하고, 산중의 모양새는 마치 거대한 방주(方舟)와 같다는 불교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해인사의 배치와 비보

     

    해인사의 좌향은 전체적으로 북동쪽에서 남서향을 하고 배치되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남향으로 남산제일봉의 강한 화성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좌향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틀은 남서향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좌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주위 산의 배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해인사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두리봉(1130m)이 있고, 남쪽에는 남산제일봉(1050m)이 강한 화성체(火星體)로 있고, 동쪽에는 사자바위(1064m)가 강한 화성체(火星體)를 가지고 있고, 서쪽은 남산(1113.5m)의 강한 화성체(火星體)가 있어 사방에 모두 1000m가 넘는 화성체의 산이 해인사를 두르고 있다. 그리고 해인사로 들어오는 맥은 북동쪽의 가야산(1434m)이 강한 화성체(火星體)에서 들어오고, 남서쪽은 금성체(金星體)의 단지봉(1030m)이 있다. 따라서 해인사를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남쪽의 남산 제일봉의 화기(火氣)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동안 해인사는 7차례의 큰불이 일어났다. 그래서 1817년 여섯 번째 화재 이후 재건할 때 대적광전의 좌향을 남쪽에서 남서쪽으로 만들었다고 해인사 사적기에 나온다. 따라서 남향을 하면 화기가 충천하여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오나 화재가 일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남쪽의 화기를 막기 위해 남산제일봉에 불을 막는 소금단지를 묻었고 지금도 단오날에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풍수에서 비보란 허결한 부분을 보태어 기운을 보충하거나, 흉한 것을 막기 위해 행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비보 형태는 해인사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허한 부분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일주문 바로 밑에 영지를 만들어 터의 기운을 보완하였다.

     

    둘째, 형국에 의한 비보이다. 해인사는 행주형국이다. 배가 머물고 출항하기 위하여 돛대를 만들었다. 돛대바위의 수미정상 탑이나, 석당간, 그리고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설치한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 배가 순항하기 위해 일주문부터 봉황문까지의 일직선 배치 등은 행주형국에 따른 비보이다.

     

    셋째, 흉한 것을 막기 위한 비보로는 먼저 남산제일봉의 화기에 의한 해인사의 화재를 대비한 남산제일봉에 소금단지 묻는 행사이다. 화기를 억제하기 위해 바닷물의 염도가 가장 강한 단오날을 택하여 남산 제일봉에 소금단지를 묻는 행사는 지금도 100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또한 화재시 방어를 위하여 대적광전과 장경판전 사이에 성토를 하여 급경사 계단을 조성하였다. 또한 우두산의 화성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우두산의 연화반개형을 향하여 수도산에 수도암 3층 석탑을 세워 보완하였다.

     

    3) 해인사의 조성과 600년의 번영

    해인사의 창건신화는「가야산 해인사고적」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그리고 1817년 여섯 차례의 화재를 겪고 대적광전의 자리를 현재의 남서향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남향으로 하여 훌륭한 도승(道僧)은 많이 나왔지만 화재로 이한 고심 끝에 향을 지금의 남서향으로 한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모바일 앱을 개발하여 제 1 주제는 창건신화를 주제로하여 만들고, 제 2 주제는 해인사의 중창기를 이용하여 만들고, 제 3주제는 빈번한 화재 이후 대적광전의 향을 남서향으로 한 내용과 해인사의 전체적인 형국을 가지고 만들어 전시실에 배치할 수 있다.

     

    4) 해인사의 내러티브요소

     

    1. 해인사는 조산(祖山)인 가야산, 남쪽의 남산제일봉, 서쪽의 남산, 동쪽의 사자바위가 모두 1000m 넘는 거대한 화성체이고, 해인사가 바라보는 남서쪽의 단지봉과 북쪽의 두리봉도 모두 1000m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용세가 강한 화성(火星)의 기운을 가지고 일반인이 사는 터 보다 사찰이나 수도의 터가 되기에 적당하다.

     

    2. 해인사의 혈(穴)은 가야산의 화성 기운이 내려와 장경각 뒤 수미정상탑이 있는 돛대바위에 뭉쳐 그 기운이 대적광전에 뭉쳐 있다.

     

    3.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祖山)은 가야산, 좌측의 외청룡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신부락 뒷산, 외백호는 두리봉, 안산은 비봉산, 그리고 조산(朝山)이 된다.

     

    4.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해인사 우측 물과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5. 해인사는 창건시 남향으로 하여 남산제이봉의 화성체의 화기에 의한 화재와, 이후 중건시 향을 남서향으로 단지봉을 향하여 조성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예방한 것이 해인사의 향을 보는 데 제일 중요하다.

     

    6. 해인사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인사 경내의 배치를 가지고 행주형국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경내 배치를 기준으로도 행주형국이라 부른다.

     

    7. 해인사의 비보는 화재를 대비한 비보와, 행주형국에 대한 비보의 요소들이 많이 있다.

     

    8. 해인사의 창건신화와 중건신화를 바탕으로 한 해인사의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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