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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1회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의 명당 내금마을 스토리텔링

기사입력 2022.12.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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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1회

     

    1.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의 명당 내금마을 스토리텔링

     

    1. 마을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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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금(內金)마을은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 있다. 옛날에 마을 오른쪽에 금구사(金龜寺)가 있어 금구사라 불리다가 내금마을이라 불렀다. 마을의 뒤에 있는 주산인 명덕봉(明德峰)이 둥근 금성체(金星體)의 형상으로 김씨가 들어오면 잘 산다는 속신(俗信)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반남인(潘南人) 박지영(朴之英)이 성종 11(1480) 금산으로부터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고, 광산인(光山人) 김광후(金光厚)가 담양으로부터, 인천인(仁川人) 이승길(李升吉)이 영동으로부터, 여양인 진석원(陳錫元)과 달성인 서정주(徐景柱)가 합천으로부터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현재 마을에는 33세대 7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2.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

     

    1) 진안의 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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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군의 기운을 만드는 지세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려와 제일로 덕이 있어 여유로운 덕유산을 만들고, 아래로 남덕유산을 지나 장수군의 장안산을 돌아 전주와 대전을 만드는 호남금남정맥을 만든다.

    장수의 팔공산에서 다시 북으로 진안의 성수산과 진안의 마이산, 부귀산을 만들고 주화산에 이르러 하나의 맥은 전주로 들어가니 이것이 호남을 만드는 호남정맥이 된다. 그리고 하나의 지맥은 다시 북으로 운장산을 거쳐 금산을 지나 계룡산에서 대전을 만드니 이것이 금남정맥이 된다.

     

    그리고 수세는 장수 뜸봉샘에서 산맥을 따라 북으로 진안의 용담댐을 거쳐 금산을 지나 대전을 돌아 서해로 들어가니 이것이 금강물이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물이 모여 용담을 이룬 곳에 진안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진안을 만드는 지세는 금강물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기운이 내려오고, 서쪽에서는 마이산과 부귀산, 운장산의 호남금남정맥에서 기운이 내려온다. 그러므로 진안의 동쪽지역인 동향면과 안천면은 후부한 덕유산의 토성체 기운으로 진안의 중심 기운이 되고, 서쪽지역인 백운면에서 부귀면과 주천면에 이르는 지역은 마이산과 부귀산, 운장산의 구봉산 기운으로 문무의 기운과 많은 인재가 태어난다그리고 1,000년 전 이름 붙인 조그만 용담천이 지금은 거대한 수룡(水龍)이 사는 용담(龍潭)을 이루니 새로운 남한의 중심 기운을 태동하고 있다.

     

    2) 내금마을의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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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에 물이차면 영귀산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내금(內金)마을을 만드는 지세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시작된다. 남덕유산을 대동여지도에는 봉황봉(鳳凰峰)으로 표기하고 조선 시대에는 봉황산(鳳凰山) 또는 황봉(黃峯)이라고 하여 산중에서도 제일 신령스러운 황제(皇帝)의 봉우리로 여겼다.

     

    또한,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이라고 하고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덕유산이라고 한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남덕유산은 아래로 서봉을 지나 문필봉 모양의 삿갓봉을 만든다. 삿갓봉은 한국지명요람에 산의 모양이 삿갓 또는 붓처럼 생겼다고 하여 삿갓봉 또는 문필봉이라고 전해온다. 남덕유산에서 서봉과 삿갓봉을 지나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건너 계북면 솔재의 과협처로 내려오는 용맥의 기세와 모양이 하늘의 말(天馬)이 산비탈의 위에서 아래로 달려 내려오는(馳坂) 것으로 송대 주자의 친구 채원정이 발휘(發揮)한 옥수진경(玉髓眞經)에서는 천마치판(天馬馳坂)이라 부르며 이러한 형세는 터에 이르러 대귀(大貴)하고 발달이 빠르다. 그러므로 황봉의 기운이 천마치판(天馬馳坂)의 기세로 장차 마을에 이르러 대귀(大貴)한 기운이 나오는 것이다.

     

    남덕유산에서 영귀산으로 힘차게 내려온 용맥은 왼쪽으로 천반산에 이르러 죽도를 머금고 있는 천반함주(天盤含珠)의 명당인 정재영의 묘역을 만들고, 오른쪽으로 마을로 내려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내려오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의 명당에 지선당을 만들어 5명의 과거급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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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유산에서 계북면으로 내려온 용맥은 임평 삼거리에 있는 솔재의 과협처를 지나서 문필봉 모양의 우뚝 솟은 목성체(木星體)와 둥금 금성체(金星體)를 만들고 힘차게 마을이 있는 동향면 영귀산(靈龜山)으로 달려간다. 영귀산(靈龜山)은 영구산이라고도 부르며 그 모양이 둥근 금성체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귀산이라 부른 것이다.

     

    영귀산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품은 산은 두 개의 지맥을 나눠 하나의 지맥은 왼쪽으로 달려가 장수 뜸봉샘에서 발원한 금강물과 구량천이 만나는 합수처 이르러 하늘의 소반처럼 웅장한 천반산(天盤山)을 만들어 죽도(竹島)를 머금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이는 마치 천반산의 용이 죽도를 머금고 있는 형상의 천반함주(天盤含珠) 형상으로 산 정상에는 능길마을에서 태어나 내금마을 지선당에서 공부하여 순조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전 국무총리 정세균의 5대조인 정재영(丁載榮)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하나의 맥은 마을로 내려가 명덕봉(明德峰)을 만드니 이는 내금마을의 주산이 된다. 명덕봉 역시 영귀산처럼 등근 금성체(金星體)로 마을로 내려오는 그 형상이 마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이 된다전체적으로 내금마을 터를 이루는 지세는 남덕유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하고, 영귀산(靈龜山)을 할아버지 산인 조산(祖山)으로 하고, 명덕봉(明德峰)이 마을의 부모산이 되어 현무봉이 된다. 그러므로 마을의 내기(內氣)는 남덕유산의 황봉(黃峰)의 기운이 내려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되는 대귀(大貴)한 기운이 되므로 장차 내금마을의 기운은 예측할 수 있다. 또한, 향후 조산(祖山)인 영귀산 아래 수침(水砧)마을의 물()을 다듬잇돌()로 댐을 완성하면 이는 내금마을에 강한 기운을 밀어주는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마을의 기운은 한층 더 배가(倍加)될 것이다.

     

    3. 내금마을 사람들이 만든 문화

     

    1) 지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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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금(能金)마을은 능길(能吉)마을과 금곡(金谷)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능금마을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지영(朴之英)에서 부터 시작한다.

     

    내금마을 지선당에 있는 반남박씨 유허비문(潘南朴氏遺墟碑文)에 의하면 "공의 휘는 지영(之英)이고 본관은 나주의 반남현이다. 단종조의 충신(忠臣)인 박희권(朴希權)은 그의 6대조가 되며, 부친은 경복(景福)으로 세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공은 대대로 금산(錦山)에서 살았는데 임진(壬辰) 병란을 당하여 두 아우를 이끌고 이곳 금곡리(金谷里)로 피난하여 8년의 병화(兵火)를 무사히 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4명의 아들을 충효로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이러한 뜻을 받들어 5대손(1772)에 이르러 명덕봉 아래에 지선당(止善堂)을 만들어 후학에 힘쓰고 가문의 기틀과 마을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공의 6대손에 이르러서는 박제대(朴齊大)49세 때인 1840(헌종 6)에 식년시에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지사를 지냈으며, 그 후 낙향하여 용담 향교에 사마재를 건립하는 등 그 당시 유림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지니고 향리 발전과 후학 교육에 힘썼다. 그 후 공의 후손은 번창하여 각 마을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 1백여 호에 이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1825년 박제대 선생보다 3살 아래이며 이곳 지선당에서 공부하여 18세에 급제하여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의 증손(曾孫) 정임상(丁任相)이 쓴 글이다. 정재영은 이곳 반남박씨 외손(外孫)이 된다. 그리고 정재영 선생의 5대손이 전 국무총리 정세균이다따라서 능금마을의 시작은 금곡리 내금마을의 박지영(朴之英)에서부터 번창하여, 현재 용담향교가 있는 외금마을과 능길마을 그리고 추동마을로 이어지는 그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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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선당에 걸려있는 지선당기(止善堂記)1772(영조 48) 박지영의 5대손 박상정(朴相禎)이 기문을 지었다.

    지선당(止善堂)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박지영(朴之英)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이 지방 후학들의 교육을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세운 사당이다. 건립 연대는 1772(영조 48)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을 비롯하여 1840(헌종 6) 진사시에 합격한 박제대(朴齊大) 4명의 진사를 배출하여 모두 5명의 과거 급제를 시켰다.

     

    1772(영조 48) 박지영의 5대손 박상정(朴相禎)이 쓴 지선당기(止善堂記)에 의하면 "당의 이름을 지선(止善)으로 한 것은 명덕봉(明德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명덕산의 봉우리가 덕유산(德裕山)으로부터 내려와 서쪽으로 돌아 내려와 마을 앞 두 시내의 합류지점에 우뚝 솟아있어 바라보면 높고 닦아 가면 엄숙하여 대인군자자 만인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나의 고조께서 금산으로부터 오셔서 남쪽 기슭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터를 잡아 덕행을 닦고 모자란 풍속을 교화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아 그 덕업을 기리고자 설립하였다그리고 이렇게 이름한 것은 첫째, 조상을 받들어 근본에 보답하니 이는 선에 그침(止善)이요.

     

    둘째, 후손을 가르쳐 몽매함을 깨우치니 또한 선에 그침(止善) 이다. 대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이 명덕(明德), 신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인데, 능히 선()을 밝히고 본성을 회복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효공(孝恭) 하는 방법으로 종중안의 후진을 장려하니 이는 실로 명덕(明德), 신민(親民), 지선(至善)이 그침()이다. 하물며 이 집이 이미 명덕산(明德山) 아래 있으니 지선(止善)으로 이름한 것이 우연히 합하고 가까이에 다가선 것이다. 이에 똑똑히 깨달아 소리 내어 사례하고 곧 지선(止善) 두 글자를 당액에 건다.

     

    무릇 지선당에 올라 책을 잡는 이는 고학(古學) 명선(明善)의 도()에 뜻을 두고 지선(止善)의 이름을 돌아보라. 스스로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하여 도학(道學)에 공()의 극치를 이룰 것이며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여 가문에 광채가 발동하고 또한 성()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선당은 대학(大學)의 이념과 효경(孝經)의 이념을 가르치던 곳으로 박씨 가문과 능금마을의 정신적 기틀이 되는 중요한 곳이 된다.

     

    2) 지선당 수학 인물 정재영(丁載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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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영(丁載榮)은 조선 후기 진안 능길마을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근재(根齋), 자는 춘경(春卿). 할아버지는 정남추(丁南樞)이고 아버지는 정우언(丁宇彦), 외할아버지는 박경(朴烱)으로 반남박씨 외손이 된다.

     

    정재영(丁載榮)[1798~1876] 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동네에 있던 외갓집 반남박씨의 서당인 지선당(至善堂)에서 공부하였는데, 글공부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16(순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철종 9)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고종 2)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정재영(丁載榮)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동네에 있던 외가 반남박씨의 서당인 지선당(至善堂)에서 공부하였는데 글공부를 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선당에 걸려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부친인 정병남(丁炳南) 씨가 쓴 현판에는 나의 고조(高祖)는 어려서 고개를 넘고 내천을 건너 명덕봉 아래 반남박씨 외가댁의 지선당에서 공무를 하였다. 10여 년을 불철주야 근면하게 공부하였고, 밤에 고개를 넘고 냇가를 건널 때는 큰 호랑이가 앞에서 인도하여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또한, 비가 오는 어두운 밤에는 도깨비가 불을 도로 좌우에 비춰 편안하게 건너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공이 순조(純祖)때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괴나리봇짐을 지고 길을 떠났을 때 어느 주막에 들르게 되었다. 주막에는 한양으로 과거 보러 오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런데 전날 밤 이 주막의 주인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주막 담장 밑에는 매화가 만발하였는데 "곰배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자색 연기가 자욱하고 큰 청룡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내려오더니 거침없이 "곰배를 휘감아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주인은 꿈에서 깨어나 다음날 행여나 하고 담 밑을 보니 과연 "곰배가 있어 그것을 치우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때 풍채가 의젓하고 기골이 장대한 선비 하나가 대문을 들어서더니 선배들이 모여 있는 대청으로 가지 않고 담장 밑으로 가서 "곰배를 깔고 앉았다주인이 이상히 여겨 "아직도 자리가 넓으니 대청으로 올라오시죠?” "이곳도 좋소이다"주인은 지난밤 꿈이 생각나서 "성씨가 무엇입니까?” 곰배 정()씨요" 하고 대답을 하는 재영을 보고 주인은 무릎을 '' 치며 좋은 방으로 들게 하여 "정 선비께서는 이번 과거에 꼭 급제하리다하며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 그 뒤 재영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은 1816(순조 16)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철종 9)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고종 2)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공은 많은 벼슬을 하며 충신으로 효자로서 선정을 베풀다 일흔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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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 묘소는 현재 천반산(647.3m) 정상에 천교혈(天巧穴)로 옥루보전(玉樓寶殿)을 조안산으로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있으며 이는 현재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5대조가 된다. 묘에 올라보면 조안산이 무척 멀리 보인다. 천반산 정상은 647m로 혈장 아래의 사격은 보이지 않고 멀리 진안의 부귀산(806m)만이 오로지 옥루보전(玉樓寶殿)의 형태로 조산(朝山)이 되어 좌측 청룡자락 너머로 혈을 조응하고 있다.

     

    이곳의 발응은 천교혈로 제왕지지가 합당하며 또한 옥루보전의 응 또한 제왕지지가 된다. 단지 안산이 매우 멀리 있어 발응 역시 더디게 된다. 따라서 140년 후에 국무총리의 탄생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 혈은 천교혈로 일반인이 쉽게 쓸 수 없는 터가 되며, 지선당의 건립이념인 명명덕(明明德)과 지선(止善) 그리고 입신출세하여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 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현실로 드러난 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철종실록(11, 철종 1036)"집의(執義) 정재영(丁載榮)의 상소에 따라 전 평안 감사 김기만 등에게 간삭(刊削)의 형을 내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37"집의 정재영을 대사간에 제수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정재영은 집의(執義)로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 소속 종3품이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기만(金箕晩) 9명의 관리의 비리와 죄를 논하였다. 이에 왕이 "과연 이러하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으며, 선비가 어떻게 과거를 볼 수 있겠는가? 너무도 한심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가 않다. 진실로 청백(淸白)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 미더움을 받고 있었다면, 이런 말이 어찌하여 이르겠는가? 위에 논열(論列)한 사람들은 우선 간삭(刊削: 관직이나 공신의 지위를 빼앗음)시키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그리고 그다음 날(朝鮮王朝 철종실록 11, 철종 1037) 왕은 "이렇게 적요한 때를 당하여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집의 정재영(丁載榮)을 대사간에 제수하라.” 명하였다.

     

    이처럼 정재영은 청렴결백하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정의를 위하여 직언과 실천을 행하여 대사간에 제수된다. 정재영의 상소를 보면 그 당시에도 관리들의 과거시험 부조리와 부패한 관리들이 많았으며 정재영은 이를 규찰하고 왕에게 직언하여 죄인들을 다스리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이다.

     

    4. 마을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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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금마을은 영구산 아래 수침댐에 물이차면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영구하산형의 명당기운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현재도 탄생하고 있는 마을이다. 근래에 들어와서도 군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박관순 의원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그리고 향후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의 2개의 비보탑을 복원하고 수침댐이 완공되면 더욱 많은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마을이다.

     

    특히 지선당의 교육이념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대학 이념에 효경의 입신양명을 더하여 "수신제가 입신양명으로 치국평천하보다 효의 마지막인 입신양명을 더하여 만든 교육이념은 현대 청소년 및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체험하여야 하는 장소가 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면 향후 중요한 마을의 콘텐츠가 될 것이다.

     

    내금마을은 명덕봉 아래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곳에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마을 입구 바위에는 반남박씨세거(潘南朴氏世居)가 새겨져 있고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마을 입구 바위 아래 도로와 맞은편 개울 건너에는 2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이는 마을의 물길이 아래로 곧바로 빠져나가 마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하여 2개의 돌탑을 만들어 비보한 것이다. 그러나 도로 옆 돌탑은 작은 흔적만 있고 없어져 버려 아쉬움이 있다마을의 돌탑은 마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한 풍수적인 비보 방법으로 마을에서 만들어온 중요한 마을의 문화이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탑을 복원하고 탑제를 지낸다면 단합하는 중요한 이를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예부터 내려오던 금구사(金龜寺)터를 재조명하여야 한다. 금구사란 이름은 영귀산과 명덕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영귀산은 신령스러운 거북으로 마을의 할아버지산이 되며, 명덕봉은 마을의 주산으로 둥근 금성체의 거북 모양이다. 그리고 마을의 형세 역시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으로 보이므로 사찰의 유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향후 영귀산 아래 수침댐에 물이 차면 용담댐의 기운과 더불어 내금마을은 다시 영귀산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기운을 가질 수 있으니 마을은 다시 중흥하게 된다. 그리고 멀티유즈 콘텐츠개발을 통한 프로그램개발로 마을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을의 희망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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