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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21회... 와혈(窩穴)의 눈물 김제남묘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21회... 와혈(窩穴)의 눈물 김제남묘 ■ 와혈(窩穴)의 눈물.ㅡ김제남묘 김제남(金悌男.1562~1613.본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시호는 의민(懿愍)으로 둘째 딸이 선조의 인목왕후가 돼 연흥부원군에 봉했졌다. 영창대군(1606~1614)은 선조의 14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선조의 아들중 유일하게 정비 소생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었죠. 선조는 임진왜란시 권정례(權停例-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후에 정비 소생인 영창 대군이 태어나자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죠. 그러던 중 선조가 갑자기 죽자 소양강에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등 7인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자는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를 들어 그 중심에 영창대군 외조부인 김제남이라 우겨 결국 1613년 그와 아들들을 사사(賜死) 시키고 다시 1616년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영창대군은 8살 나이에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위리안치된 후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 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억울하게 자식까지 함께 사사되어 묻혔는데 다시 페모론에 휘말려 3년후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는데 묻힌 자리는 어떤가? 너무 억울함이 앞서서였을까? 지관이 그랬을까? 아님 혼령이 유도해서였을까? 와혈에서 제일 꺼리면서 위험하다는 물구덩이와 같이 있어 밥상에 해당하는 상석이 새까맣게 된 것 만 봐도 능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간현봉(387m)에서 지현굴곡으로 내려온 용맥은 아들인 김래(1576~1613)묘 뒤에서 크게 과협을 이룬 후 김래묘역에 이르러 아주 안정적인 와혈을 결작하였는데 그만 점혈이 잘못돼 한을 달래지 못하고 있어 간단히 제수를 놓고 예를 갖추었는데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와혈은 기본적인게 우각(牛角)이 필히 있어야 하고 물구덩이에 들지 않으려면 기운이 밀고 들어오는 맥인 와중미돌(窩中微突)이 있어야 하며.순전에 계단식의 암반이나 둔덕이 받쳐줘야만 한다. 그런데 김제남 묘는 그러한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백호맥은 비주(飛走)까지 하고 있으니 기운이 취기 될리가 없다.이와는 달리 아들 김래묘는 완벽한 와혈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점혈에 있어 너무 아래에 내려 써 안타까워 정혈처에 옹기종기 모여 우리들 세상은 자연과 풍수의 테두리 안에서 못 벗어 난다는 인식을 하였죠. 안산은 문막 시내의 주산인 건등산(250m)으로 아주 유정한 목성체와 금성체의 중간이라 문무가 겸비하여 정혈자리에 제대로 찾아 갔다면 다시 한 번 번창한 가문이 되었을텐데 아쉽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와혈에 용사시는 필히 와중미돌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그걸 모르고 삼태기 혈이라 해서 선호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물구덩이 아니면 수맥지이니 삼가 조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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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선생의 문화탐방20회...설악산 기도터 오세암(五歲庵)주암선생의 문화탐방20회...설악산 기도터 오세암(五歲庵) [한국풍수신문] 산세의 아름다움과 기운 왕성한 곳을 찾아 기원하고 기도코자 간산 및 답산을 위해 영시암(永矢庵)을 거쳐 봉정암을 들른 후 고개를 넘고 넘어 또 넘에 당도한 곳은 "5세 된 신동이 성불(成佛)"했다.해서명명된 오세암. 또한 조선 신동이라는 김시습이 머물렀다는 오세암(五歲庵) 사방이 고봉과 괴암괴석으로 이루어졌지만 내사는 소이수예(小而首銳)로 백호는 나라 살림을 책임져 야기에 청룡에서 오는 금성수를 감싸고 내청룡은 살짝 주인에게 읍하고 안산도 얌전하다. 주산 또한 암산(巖山)이라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한데 짧은 거리인데도 거듭 박환을 하여 맥우수지(脈遇水止)하기에 앞서 순전에 큰 암반이 받치니 기운은 더 이상 못 나가 대웅전 내의 다섯 분 중에서 오른쪽 두 번째에 있으니 기도나 기원을 원할 시는 법당(부처님 기준)내 좌측에서 하면 성불하리라.. 좌향은 계좌 정향(癸坐丁向)에 정파(丁破)라 묘향묘파이다 묘향묘파(墓向墓破)는 용진혈적에 천간자 파구.100보전란을 해야만 조건이 충족되는데 우측으로 조금 치우쳐 있어 좌측으로 15도 틀어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면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으로 발부발귀하고 수고(壽高)하며 인정대왕(人丁大旺)하는데 조금 아쉽다. ● 오세암의 전설 오세암.은 5살 된 어린아이가 득도한 사찰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사찰인데 이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설정 주지스님은 산속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암자에데리고 와 보살폈다. 겨울이 되어 식량이 떨어지자 설정 스님은 탁발(托鉢)을 위해 잠시 산을 내려와야 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섯 살 된 아이를 위해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날마다 법당에 있는 관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읊조리면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잘 돌봐줄 거라고 이르고 암자를 떠났다. 설정스님이 마을에 내려와 탁발하는 동안 폭설이 내려 암자로 가는 길이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눈이 녹았을 때 암자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아이가 굶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달려간 스님은 법당에서 목탁 치며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읊조리고 있는 조카를 보았다 까닭을 물으니 그동안 관세음보살이 찾아와 밥을 주며 같이 지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에 감동한 설정스님은 다섯 살짜리 동자승이 득도했다고 해서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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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9회...음양교구(陰陽交媾)안한 실직왕비릉(悉直王妃陵)주암선생의 문화탐방19회...음양교구(陰陽交媾)안한 실직왕비릉(悉直王妃陵) [한국풍수신문] 자연은 태초(太초) 무극(無極)에서 시작해 태극(太極)이 되고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태생하여 자연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죠. 자연의 질서는 천명(天命)에 의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시(四時) 흐름과 음양(陰陽)의 교구(交媾)로 종족 번식을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살아서는 종족 유지를 위한 종족 번식을 해야 하고 죽어서는 종족 유지를 위해 후손들에게 좋은 감정을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헌데 좋은 감정을 전달하려고는 하지만 힘이 부칠 때는 좋은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고 외려 후손에게 의탁하는 꼴이 되고 마는데... 그것은 유택(幽宅)이 편안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달리 조상의 좋은 감정을 많이 받으려고 노력한 집안을 들라면 인촌 김성수 집안을 손꼽을 수 있다.이는 먼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이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생전에 금슬(琴瑟)이 아무리 좋아하여도 후손들이 명당에 모시고자 떼어 놓기가 일수다. 여기 실직왕비릉도 그 중의 하나인데 실직왕비는 실직군왕인 삼척김씨의 시조로 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손자인 김위옹의 부인 밀양박씨다. 실직군왕인 김위옹은 삼척 성북동 갈야산 사면에 있고 그의 부인 밀양박씨는 동남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오십천 끝자락인 남쪽 구릉에 있다. 실직군왕(悉直君王)이란 명칭은 고려태조 왕건이 신라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이고 실직군왕으로 책봉하여 대우하면서 유래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기운이 좋아 묘 부근에 다른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면 샘물이 쏟아져 나오고 백호(白虎)가 나타나 묘를 쓸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실지로 실직군왕릉묘는 오십천이 감싸고 돌고 래룡 또한 지현굴곡으로 내려 와 취기를 하였고 좌우용호사는 주인을 향해 읍하고 있어 군왕지로 손색이 없는 곳인데도 굳이 부인을 같이 모시지 않고 기운이 취기가 안된 곳인데다가 2km나 떨어진 곳에 모셨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묘 앞에 오십천이 감싸고 돌아 갈룡음수형으로 보이고 도로가 환포하면서 나가 취기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맥이 퍼져서 내려와 취기가 안된 보백지지에 불과하다. 또한 안산이 압살하고 있어 체백이 편안히 있을 자리라고는 볼 수가 없다. 나라를 잃고 종묘사직을 유지 못 해 한이 맺혀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좀 더 많은 힘이 필요해서 두 곳 다 명당이라 자신하고 썼으리라 이해는 가지마는 부부이니 기운 좋고 취기가 멋들어지게 잘된 부군 옆에 묻혔더 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삼척김씨는 시조인 실직군왕릉의 묘가 대명당이기에 지금까지도 후손이 도처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자손만대(子孫萬代) 향화(香花)가 이어지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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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지철 인터뷰,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파주 문화원 주암선생) 지철 인터뷰,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안녕하십나까? 한국풍수신문의 지철 윤명선 입니다. 주암 선생님,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의 시작은 어린시절 시골에서는 농사철이 끝나면 조상님들께 시향(時享)을 모시는데 조상님들을 길지(吉地)에 모시고자 묘지는 각지역에 흩어져 있어 어른들께 명당 혈 그집안 자손들 출세와 성공하는 이야기를 듣고 길지(吉地)가 중요함을 알고 풍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주암 선생과의 일문일답... ◎ 주암 선생님 파주 문화원 풍수 강의는 언제 시작하셨나요? 파주 문화원은 2013년 처음 시작 해서 11년째 강의 하고 있습니다. ◎ 파주 문화원 소개 해주시죠? 파주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하여 서해로 흐르고 자유로.통일로,.등 통일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 선생과 명장인 윤관장군. 율곡 이이.우계 성혼.구봉 송익필.의 삼현(三賢).명의 허준 삼릉.정릉.소령원.수길원.자운서원.용주서원.ᆢ등 유서 깊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장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파주 문화원에서는 계승 발전시키고자 43개 학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픙수반은 남녀노소 다 같이 선현들의 생가.묘소.업적 등의 발자취를 밟아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 풍수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 시골에서는 농사철이 끝나면 조상님들에게 시향(時享)을 모시는데 조상님들을 길지에 모시고자 묘소가 각지에 흩어져 있죠. 산골이라 도보로 가는데 그때마다 집안 어른들은 가면서 오면서 여기는 무슨 명당.저기는 무슨 혈이라 그 할아버지 자손들은 유달리 출세하고 성공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조상님을 좋은 길지(吉地)에 모시면 집안이 화목하고 흥한다는 걸 알았기에 풍수인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좌측, 한국풍수신문 대표 지철 윤명선 우측, 주암선생) ◎ 간산 다니시며 마음에 드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한국은 삼천리 금수강산 이라 곳곳이 다 좋은 명당이지만 그래도 몇개만 꼽으라면 음택으로는 청주한씨 한란 묘. 청풍김씨 김대유 묘.여흥민씨 묘.덕수이씨 이양 묘. 양택으로는 안동 하회마을. 강릉 선교장.을 들 수 있습니다. ◎ 후학도들에게 한 말씀 주신다면? 자연지리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오감(五感)으로 느끼려 할 때 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답은 자연에 있으니 산자산(山自山) 서자서(書自書)가 아닌 자연지리를 보다 많이 접하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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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8회...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8회...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 ■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 삼척김씨 시조 묘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손자이며 삼척김씨 시조인 김위옹의 능이다. 실직군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제 八子인 일선군(一善君)의 아들 김위옹(金渭翁)으로서 고려 왕건이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이자 인정을 베푸는 정책적 차원에서 실직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삼척시 당저동에 재사왕묘(齋舍王廟)가 있어 매년 음력 3월 15일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 무덤의 유래에 대해서는 『삼척군지』에 의하면, 조선 헌종 4년(1838) 가을에 김학조(金學祚), 김흥일(金興一) 등이 당시 삼척부사 이규헌(李圭憲)에게 시조의 유적과 지석(誌石)을 찾아보겠다고 간청하여 발굴하였더니 출토품으로 토기 여러 점이 나왔다고 한다. 얼마 뒤 이를 개축하여 봉하였으며, 수찬 박주운(朴周雲)이 비문을 써서 실었다고 한다. 그 뒤 100년만인 1937년에 김원갑(金源甲), 김형익(金炯益) 등이 종중(宗中)에 수축할 것을 건의하여 석의(石儀)를 갖추어 능으로 봉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마을의 어떤 사람이 그 능 옆에 암장하려고 몰래 구덩이를 파던 날 밤에 구덩이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고 백호(白虎)가 와서 걸터앉아 은은한 바람을 일으키고 뇌성벽력이 진동하자 두려워 도망쳤다고 한다.(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PS 주산인 갈야산(178.4m)에서 지현굴곡을 하고 다시 남향으로 동진하여 남향 행도하여 건해(乾亥)로 입수하였다. 좌향(坐向)은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남향이고. 파구는 진파(辰破)다 이는 당(唐)의 국사인 양균송((楊筠松.-834~900)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생향(借庫消水自生向).으로 우수(右水)가 左로 흘러 을진방(乙辰方)으로 나간다. 이는 부귀.장수하며 人丁이 대왕한다. 차남이 먼저 발복하지만 용(龍)과 사(沙.)가 좋으면 장방(長方ㅡ장남)이 먼저 발달하기도 한다. 국세는 출중하면서도 안정적인 大局.이다. 삼척시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북동 갈야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좌우 용호사는 주인을 향해 납작 엎드리면서 2중 3중으로 호종하고 기운이 설기를 못하게 교쇄하면서도 조당안에 재물도 새나가지 못하게 긴밀하게 교쇄하고있다. 또한 대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오십 천의 물이 크게 주인을 향해 환포하고서 나가는 모양새가 천하일품이다. 당판 튼실하고 혈장은 크며 지기(地氣)도 좋은데 재혈은 화룡점정(畫龍點睛)이다. 시조 묘로 손색이 없을뿐더러 8대 명당에 넣어도 좋은 곳이다. 대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오십 천의 물이 크게 주인을 향해 환포하고서 나가는 모양새가 천하일품인데 옥에 티라고 할까? 아님 누구의 눈 밖에 났을까? 설에 의하면 너무 큰 자리라 모대통령이 신변의 위협을 받을까 봐 대강물의 물길을 바꾸기 위해 안산을 짤라버리고 환포하던 물길을 돌려버렸으니 이를 어이 할까? 또 안산의 좌향을 자좌오향(子坐午向)에서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바꾸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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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종로구, “근현대사 족적 남긴 여성 조명”… 여행(女行)길 발굴 탐방단 모집(종로구 = 제공) 종로구, "근현대사 족적 남긴 여성 조명”… 여행(女行)길 발굴 탐방단 모집 [한국풍수신문] 종로구가 오는 31일까지 근현대사 중심지 종로에서 활약한 역사적 여성 인물을 기리고 그 흔적을 따라가는 "종로 여행(女行)길 발굴 탐방단"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탐방단은 한국 여성사를 주제로 한 특강, 전문가 워크숍 등에서 역량을 키우고 종로와 연관된 여성 인물·장소에 대해 조사하며 추후 이를 활용한 탐방코스 개발과 리플릿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활동기간은 올해 12월까지고 소정의 실비를 받는다. 모집 대상은 구민 또는 직장, 학교 등 주 생활권이 종로구인 자다. 종로에 주민등록상 주소를 두고 있거나 관내 소재 직장에 재직자나 대학교 학생, 단체 소속 등을 포함한다. 신청은 오는 31일까지 구청 누리집에서 서류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한 뒤 기타 증빙서류 등과 함께 담당자 전자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금번 모집 인원은 총 20명이다. 결과는 자격요건 확인 등을 거쳐 개별 통보해주며, 관련 문의는 어르신여성과 여성복지팀으로 하면 된다. 구는 내달 발대식을 개최하고 탐방단 역할과 목표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아울러 종로의 역사적 여성 인물과 장소를 조사한 개인별 자료를, 소감을 나누는 자리도 마련하고자 한다. 정문헌 구청장은 "근현대사 중심지 종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 인물과 그들이 활동한 장소 등을 알아보고 향후 탐방 코스 개발에도 함께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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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7회... 메밀꽃 필 무렵.ㅡ이효석(李孝石) 생가.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7회... 메밀꽃 필 무렵.ㅡ이효석(李孝石) 생가. 이효석[李孝石:1907~1942.본관 전주(全州).호 가산(可山).강원도 평창 출생]은 경성 제1 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졸업.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어려서부터 문학에 천재성을 띠어 짧고 젊은 나이에 메필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내었는데 그만 37세에 뇌수막염으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데...? 생가 뒷산이 문필봉.안산.주위산도 문필봉이다. 높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지만 집에서 볼 때 안산이 좀 높은 편이면서 준수하게 쭉 용립(聳笠)을 못하고 5부 능선이 푹 꺼져 있어 잘 나가더라도 중간에서 부침을 겪을 상이다. 생가지는 산진처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취기처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제대로 하려면 현재보다 입구 쪽으로 옮기고 좌향은 양택 최고 좌향인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한다면 흠이 있는 안산 문필봉의 영향을 덜 받아 중도에 그치지 않고 쭈욱 나갔으리라 문필은 붓끝처럼 끝이 뾰족하면서 수려한 봉우리로 사(沙)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귀인봉이다. 귀인봉은 귀(貴)를 대표하기에 사세가 갖춰지고 취기된 곳의 음.양택에서 문필봉과 조응하는 음.양택은 후손이나 거주자에게 발음(發蔭)이 오는데... 1.충효 현량한 자손. 2.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손 3.과갑(科甲) 4.뛰어난 학문.문장으로 존귀 5.문.무.재(文武財)에서 승승장구. 6.무병장수 7.오복...등을 누림. 8.대 문장가 9.대 행정가 10.대 언론인.11.정당인 12.달변가 13.학자및 연구원 14.화가 및 예술인...등을 배출하죠. 즉 자손들이 총명하고.뛰어난 학문.문장으로 극귀하다. 귀인봉으로 인한 발음을 볼 때 주산.안산.임관방(臨官方).삼길육수방.역마방.용호.손(巽)방에 봉우리를 으뜸으로 치고.조당.파구...등을 보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주산(主山)이 문필봉.또는 안산(案山)이 문필봉은 문(文)의 대명사격으로 귀(貴)를 관장한다. 문필봉이 고축(誥軸)과 같이 있으면 과갑(科甲)한다. 문필봉이 석모(席帽)와 어병(御屛)이 가까이 있으면 동궁(東宮)의 시독(侍讀) 벼슬에 나가 태자.세자 보필한다. 문필봉이 적당한 높이이고 준수하면 선비형이요. 문필봉이 용립(聳笠)하면 대학자.대문호.대 언론인.대행정가 낮으면서 흠집이 있으면 초기엔 문사로 특출나지만 말기엔 유명무실하거나 요절한다. ●귀인(貴人) 1.임관귀인(眞貴人)ㅡ臨官方에 수려한 봉우리. 2.역마방.삼길육수(震庚亥.艮丙.巽辛.兌丁)방에 봉우리가 솟아도 귀인봉이다. 3.三吉.ㅡ좌향에 관계없이 震庚亥방위에 풍만 수려한 봉우리면 자손이 부귀복록을 누리고 장수한다 4.六秀.ㅡ좌향에 관계없이 艮丙.巽辛.兌丁)방에 淸高 수려한 봉우리가 있거나 마주(巽과 辛...)보면 귀인. 빼어나면 拱福貴人으로 官人은 六判書에 오르고. 私人은 得財壽福한다. 辛丙丁庚이 수려하면 陽催官귀인 巽兌艮震이 수려하면 陰催官귀인. • 祿과 귀인 역마를 겸하면 더욱 귀하고 속발하다. 驛馬方ㅡ亥卯未坐-巳方.인오술坐-申方. 사유축坐-亥方. 신자진坐-寅方 .•六秀 귀인중 으뜸 순위는... ㄱ.巽方峰-천자의 권위(상징.생사.전쟁.재앙관장)太乙屋 ㄴ.辛峰과 巽峰이 相照ㅡ官位가 諫臺로 上貴다. ㄷ.辛峰ㅡ天乙屋.인간 세상의 吉凶 관장 ㄹ.艮峰.ㅡ天市垣으로 福祿의 재물관장. ㅁ.丙峰과 艮峰이 相照ㅡ發鼎元. ㅂ.丙峰ㅡ天貴星.貴관장. ㅅ.兌方峰.ㅡ小彌垣으로 인간의 기쁨을 관장. ㅇ.丁峰ㅡ南極星.壽福 관장 ※삼길육수나 기타 귀사라도 험하고 함몰되고.깨지고 날카로우면 어느 방위를 막론하고 흉하다. ※문필은 火星體에 가깝고 巽方은 木星이니 木生火다 壬坐丙向.丁破口시 巽方은 向上의 임관方으로 極貴 ●집안은 부유하였고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면장을 하였으며 후손으로는 1남 1녀가 있는데 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선생 유택은 초장지는 25년간 기념관이 있는 봉평면 창동리에 있었는데 1998년 경기도 파주시 동화 경모 공원 묘지로 한밤중에 이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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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한국풍수신문,주암선생의 문화탐방16회 ...무학대사와 운곡 원천석한국풍수신문,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5회 ...무학대사와 운곡 원천석 [한국풍수신문] 한국 풍수의 계보는 통일 신라말의 도선국사에서 무학대사로 이어지는데 비보 풍수를 중시한 도선 국사는 주로 음택보다는 양택 위주여서 음택으로 소점한 자리는 전남 영암의 거창 신씨외 극소수에 불과하고 주로 사찰ᆢ등이 대부분이었죠. 반면 무학대사는 자신과 인연이 닿는 사람에겐 보시를 위한 일환으로 음택.양택구분 않고 소점을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신과 친구이고 태종의 소시적 스승인 운곡 원천석신후지지를 잡아 주었 다고 전해 내려 온 곳이 현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 37(일반번지.행구동343)다. 신안이라 칭해오던 무학대사가 소점했으니 모두들 대명당이라고 칭찬 일색이지만 묘가 안정을 못 찾고 허물어지거나 후손이 발복을 못했다면 분명 뭔가 잘못된 거라고 봐야 한다. 기운이 취기되지 않고 흘러가 버렸거나 아님 취기된 곳이 다른 곳이거나 재혈에서 빗나갔거나...등 여러가지 일 텐데 실지로 후손중에 5대손에서 혁연(赫然.동추.종2품).인후(仁厚.대제학정2품)가 전부였다고한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목은 이색등과 성리학 보급에 힘쓰다가 고려말 정치가 혼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숨어 버렸고.조선 개국 후에 여러 차례 벼슬을 하사 하였지만 끝내 고사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걸로 추앙을 받고 있죠. 충절을 지킨 선생의 유택자리는 어떤가?무학대사가 잡아줬으니 최소한 명불허전은 될까? 묘역은 좋은 명당터이자 취기된 정혈 자리는 있으나 선생의 계신 곳은 실혈된 곳으로 명성에 걸맞지 않음은 물론 자기 안을 삼는 기룡혈도 또한 아니다. 굳이 분류한다면 봉요혈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산중에서 급히 내려오다 살짝 내려 앉은 연소혈로도 볼수 있겠지만 물형론은 보는 이에 따라 각양각색이라 딱 이것이다.라고 정답 내리기엔 좀 그렇다. 혈장지는 음양이 교구되어 가장 편안한 자리이기에주변 사세(四勢)는 물론 천지 음양이 어우러진 중심지에 자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청룡 쪽 좌견에 해당하는 남서쪽이 낮아 허해 보이나 중중으로 돌고 청룡 작국으로 1차 안산이 될 정도로 유정하게 감싸 안았고 풍수에서 제일 꺼리는 간인방도 백호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주인을 호종하고 있어 전체적인 국세는 안온한 자리임이 분명하다 현재 좌향은 진좌 술향이나 정혈처의 좌향은 15도 이상 청룡 방으로 틀어야만 기운과 안산겸 조산(사진6)이 맞아 떨어지는데 아쉽다. 이기인 88향법으로 보면 을좌신향에 건해파로 정묘향 정음정양법은 정음으로 왔으니 정음향인 을좌신향으로 안산과 조산은 부귀를 겸전하는 금성체로 좌견이 약해 장방보다는 이방(二方)이하와 백호가 우람하니 딸과 외손이 많이 발복 받으리라. 회원들이 정성 들여 가져온 제수를 놓고 예를 갖춘 후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사랑하는 학구열을 본 받고자 묘소 앞에서 기념 촬영하고 안산을 보고자 했으나 미세먼지 관계로 소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보여서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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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5회...만고충신(萬古忠臣) 엄흥도(嚴興道)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5회...만고충신(萬古忠臣) 엄흥도(嚴興道) ■ 만고충신(萬古忠臣) 엄흥도(嚴興道) 만고충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로 오랜 세월 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신하를 말하는데 영월 엄 씨의 엄흥도 또한 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엄홍도는 본관이 영월(寧越).시호는 충의(忠毅).영월의 호장. 단종이 세조에 의해 청령 포에서 금부도사 왕방연등에게 시해되자 누구하나 후환이 두려워 방치한 시신을 수습 하고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절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영월을 떠나 숨어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후 현종(조선 제 18대) 때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주청으로 복위되었으며 1.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고 2.1726년(영조 19년)에 정문(旌門)과 공조판서에 증직되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됨. 3.1833년(순조 33년)에는 다시 증 공조판서에 추 4.1877년(고종 14년) 충의공(忠毅公)의 시호 받음. ★풍수적 고찰은 국지 산에서 힘차게 기동해 위이굴곡과 박환을 거듭하여 달려온 내룡이 목마름을 해소코자 남한강을 앞에두고 고삐를 잡아채 멈추니 유좌묘향(酉坐卯向)에 신묘분금(辛卯分金)이다. 기골이 장대한 용장(龍長)이 좀 더 편안히 쉬기 위해 좌측의 아담한 안산으로 자리 잡으면 경좌갑향(庚坐甲向)의 정묘분금(丁卯分金)에 묘파(卯破)지만 용진혈적(龍眞穴的).백보전란(百步轉欄).천간자(天干字) 파구가 안 돼 이기에도 미흡하다. 만고의 충신이 좌정(坐定)한 자리가 그 어느 자리보다 복후지지(福厚之地)하고 옹룡불박(雍容不薄)하여야 하는데 안 돼 아쉬움이 크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룡을 밟아보니 천장지비(天藏地秘)한 곳이 묘후(墓後)에 있어 다행이다. 이는 동량지재(東梁之材)로써 나라를 빛낼 위인이나 충신...등 진정한 주인을 기다리는 것일게다. 엄흥도를 모신 사당 문경 충절사 ★아래는 단종을 애달게 그리는 왕방연 시조 한 수 첨부합니다. 단장곡( 斷腸曲) 천만 리 머나만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녜놋다 이 시조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유배지 청령포를 굽어보는 강변 언덕에 앉아, 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연군(戀君)의 단장곡( 斷腸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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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4회 방랑시인 김삿갓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4회 방랑시인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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