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38회... 애국을 몸소 실천한 남궁억(南宮檍) 선생.

기사입력 2023.08.2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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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38회... 애국을 몸소 실천한 남궁억(南宮檍) 선생.

 

[한국풍수신문] 한서 남궁억(南宮檍) 선생 유언."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과목(果木)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1934년 1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진설하고.남궁억(南宮檍) 선생에 禮를 표했습니다 예를 표한 후 기념.


남궁억[南宮檍.1863.12.27.1939.4.5]. 본관 함열 남궁씨 字 치만(致萬)  호 한서(翰西) 아버지 남궁영(南宮泳), 어머니 덕수 이씨. 배우자 양혜덕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자녀: 딸 남궁숙경, 남궁자경. 아들 남궁염 아버지 남궁영(南宮泳)과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서 12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내부토목국장으로 파고다공원을 세웠다.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 유근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해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군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1906년 2월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해 침략 정책을 강화하자 사임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에 노력하여 1910년 10월 배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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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1월 개신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 결사인 '십자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홍천경찰서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1939년 4월 5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 풍수적 고찰.

나라를 사랑하고.국민개봉활동에 전념하고 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꽃을 누구보다 사랑한  한서 남궁억 선생 묘역은 장락산(629.5m)에서 북동으로 동진하여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취하였다. 우측에선 홍천강 모곡.수산 유원지 물이 주산을 감싸고 도는 형국이라 취기처가 분명하고 재혈이 합당하면 부귀가 기약되는 곳이다.


묘역은 3단으로 아름답게 조성되었지만 주산에서 낙맥하는 주(主) 기운은 청룡방으로 흐르고 묘소로 오는 기운은 작은 보백지지다. 주산은 암반으로 된 골산(骨山)의 문필봉인데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우측의 강물은 반배로 다가오니 비보(裨補)를 해야 한다. 조당과 안산은 유정하다. 좌향은 인좌신향(寅坐申向)과 곤신(坤申)사이의 공망이나 인좌신향(寅坐申向)에 경신(庚申) 분금으로 하면 좋다.


파구(破口)는 우수(右水)가 좌(左)로 흘러 정미(丁未)로 나가니 이는 양공(楊公. 834~900.唐나라 국사)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생향(借庫消水自생向)이다. 차고소수자생향은 부귀하고 장수하며 인정(人丁)이 대왕한다. 차남이 먼저 발복한다.




[윤명선 기자 ti2@rokf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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