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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7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7회 6) 금수상간(金水相間)이나 수(水)가 강하고 수토(水土)가 없어 이향(離鄕)후 귀(貴)가 나오는 터 【1】 조산의 금(金)이 낙(落)하고 변(變)하여 수(水)가 되어 생(生)이 된다. 【2】 그러나 강한 수(水)가 굴곡(屈曲)하여 넘쳐흘러 그치지 않는다. ☞ 이 터는 수(水)가 강하고 금(金)이 약하니 반드시 중간에 목(木)을 얻고 토(土)를 얻어야 바야흐로 조화(造化)가 된다. ☞ 순수(純水)는 뜨고 넘치니(泛濫) 역시 흉해(凶害)가 있다. ☞ 반드시 사는 사람이 고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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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7회 ... 금강산 건봉사(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7회 ... 금강산 건봉사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군 냉천리에 있다.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인 만큼 6.25 이전에는 거대 사찰이었다고 하는데,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적멸보궁에서 부처님께 복을 빌고 촛불을 밝히는 정성을 기울렸다. 대웅전과 적멸보궁이 이 사찰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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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6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6회 5) 출수금(出水金)으로 금수상간(金水相間)이나 수(水)가 강하여 귀(貴 )하고 수려(秀)하나 쉽게 기울어지는 터 【1】 조산의 금(金)이 수(水)로 빼어나니 역시 수(水)로 생(生)한다. 【2】 그러나 조산 아래로 5개의 수(水)가 성(盛)한 가운데 금(金)이 있어 쓸려 내려가고(蕩) 물에 가라앉아(汨沒) 나타나지 않는다. ☞ 금성의 터가 외롭게 있고 홍수(洪水)가 가득 넘친다. 귀(貴 )하고 수(秀)하나 쉽게 기울어진다. ☞ 금(金)은 수(水)로 수(秀)하고 수(水)로써 생(生)한다. 그러나 수(水)가 너무 성(盛)하여 즉 금(金)으로 하여 방탕하여 절제가 없이(蕩逸) 수(水)를 따라 물에 가라앉아(汨沒) 스스로 볼 수가 없다. ☞ 이는 고향을 떠나는(離鄕) 사람이 나오고 금(金)에서 수(水)가 나오는 수출금(水出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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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7회 ... 경복궁(景福宮)(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7회 ... 경복궁(景福宮) [한국풍수신문]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새로운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지어졌는데 동궐(창덕궁)이나 서궐(경희궁)에 비해 위치가 북쪽에 있어 '북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복궁(景福宮).이라는 단어는 태조실록에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경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라고 정도전이 아뢰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신진사대부가 계획한 궁궐이기 때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ㅡ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었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간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초기 5000칸이었던 것을 7225칸의 거대한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지.)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 갈며 소가 일을 못한다는 불평으로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리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경복궁은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火]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합방조약 이후 새로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 된 일본 식민체제는 직전의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식민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훼손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구석구석. 나무위키.) ● 풍수적 고찰 경복궁(景福宮)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산진처(山眞處)로 양택(陽宅)의 대국(大局)에 위치하고 있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맥(脈)으로 수우산(水于山)ㅡ대성산(大成山)ㅡ운악산(雲嶽山)ㅡ주엽산(注葉山)ㅡ불곡산(佛谷山)ㅡ홍복산(弘福山)ㅡ도봉산(道峰山)ㅡ삼각산(三角山)ㅡ노고산(老姑山)ㅡ현달산(見達山)ㅡ장명산(長命山)으로 행룡한다. 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면서 경복궁의 주산(主山)이다. 북악산의 정맥은 급한 기복굴곡(起伏屈曲)과 때로는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암석지대를 탈산(脫殺)을 하면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하나의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 취조(聚照)하는 정혈지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行龍)한다.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는 게 대원칙인데 경복궁이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중에서도 으뜸이다. 주산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문필봉(文筆峯)으로 무인(武人)보다는 문사(文士)의 기골이 득세하는 형상이다.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가 어우러진 곳에 주택의 좌향(坐向)이 제대로 된 곳이어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에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경복궁 근정전의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 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니 관대룡(冠帶龍). 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로 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 한다.고 한다. 대명당의 좌향은 좌와 향이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으로 구비된다. 경복궁의 지기(地氣)와 주산(主山)이 바라는 안산(案山)은 남산(南山, 262m),이다. 안산을 남산으로 하면 임좌(壬坐)로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人丁)이 대왕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경복궁은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뛰어난 곳으로 좌향만 자연대로 하면 나무랄데가 없는 대명당이다.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지세에 따른 집의 좌향.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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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6회 ... 해평윤씨 영의정 윤은보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6회 ... 해평윤씨 영의정 윤은보의 묘 윤은보의 묘는 의정부시 신곡동에 있다. 주변이 온통 개발되어 홀로 외롭게 도심지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물론 후손들은 조상이 물려준 땅으로 인해 흐뭇한 상황이겠지만 말이다. 풍수적인 특징은 별로 찾기 어려운 펑퍼짐한 언덕위에 여러기의 무덤이 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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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5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5회 4) 금토(金土)의 조화로 부귀쌍전(富貴雙全) 이나 수(水)가 없어 수(秀)가 없는 터 【1】 고산(高山)의 금(金)이 낙(落)하여 금(金)을 생(生)하고, 【2】 토(土)가 다시 잉육(孕育)하여 물러나(退出) 어린 금(嫩金)이 되었다. 【3 】금(金)이 아래로 두 개의 작은 금(金)을 만들고 다시, 큰 금(金)의 자취(躅)를 만들어 다시 두터운 토(土)를 만들었다. 【4】 그리고 터에 이르러 금성(金星)의 터를 만드니 무신(武臣)의 복(福)이 있다. ☞ 금(金)은 본래 무성(武星)인데 토(土)가 더하면 탁(濁)하다. 그러므로 토(土)는 오직 무신(武臣)의 복(福)이 된다. ☞ 그러나 그 조화(造化)를 논(論)하면 금토(金土)가 생왕(生旺)하면 금 (金)은 귀(貴)하고, 토(土)는 부(富)하니 역시 부귀쌍전(富貴雙全)의 땅이다.☞ 단 문(文)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조화(造化)의 정미(精微)함을 논(論)하면 오히려 수(水)가 없어 수기 (秀)를 발하지 못하는 것이 흠(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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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 연천군에 묻혔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復辟)운동이 일어나기 딱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 때도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서 각각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것. 사실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도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참고로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 때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휴전선 남쪽에 들어와 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경순왕릉 묘비가 있는데 내용은"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ㅇ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마지막에는 영조 23년(1747년)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한국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풍수적 고찰 권불십년(權不十年-높은 권세라도 10년못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권력 맛을 본 사람은 죽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코자 자신의 핏줄인 자식에게까지도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헌데 천 년(935년간) 가까이 이어온 종묘사직을 통째로 넘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통일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 도중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빈 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은 자결을 명해 죽자 왕의 먼 친척인 김부(金傅)를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56대 경순왕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핍박(逼迫)을 당하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에 평화적으로 종묘사직을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결혼해서 23년간 살다 76세에 생을 마쳤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료가 약하고 대신 장자인 마의태자는 울분을 삭이고자 산천을 헤매다 생을 마쳤고 나머지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럼 사후의 유택은 어떨까? 경순왕 묘가 맨 처음 있던 곳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1514.위쪽이었는데 1985년에 이장한 곳이 현재의 능이 있는 경가도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이다 좌향(坐向)은 계좌(癸坐)인 남향이다. 앞의 전순은 전부 쌓아 올린 것이고 좌우 용호사는 나(주인=혈)에게 다가온 듯하나 약하고 주산은 금성체로 가까이 있어 좋으나 너무나 내려오면서 퍼져 내려와 취기가 되질 않고 있다. 안산은 청룡작국이나 비주(飛走)하는 형태이다. 앞인 조당은 툭 터져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늑한 감을 주어 납기(納氣)명당은 괜찮아 보이나 자세히 보면 지기(地氣)는 약하고 용호(龍虎)의 호위가 약해 명당이라 말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인생을 100으로 본다면 살았을 때가 50% 사후가 50%인데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후에는 명당혈에 들어가야 편안하고 안온한 후생이 되는데 경순왕릉은 망국의 한(恨)을 간직한 분이라 후생에는 좋은 곳에 계셔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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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4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4회 3) 순금(純金)으로 융회(融會)하여 무직(武職)으로 문(文)이 나타나지 않는 터 【1】 조산이 금(金祖)이고, 금성의 부(金父), 금성의 모(金母), 금성의 자(金子)로 모두가 금성으로 금(金)이 왕(旺)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화(火)가 아니면 아름답지 못하다. 【2】 4개의 강환 금(金)을 (火)로 녹이니 둥글고 순수한 아름다운 금(金)이 된다. 【3】 그러나 변화하지 않고 순금(純金)으로 융회(融會)하면 즉 무직(武職)이고 문(文)이 나타나지 않는다. ☞ 즉 완고하고 강한 금(金)이 되면 화토수(火土水) 세 개로 조화(造化)를 이루어야 녹여 이룰 수 있는 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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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5회 ...진위향교(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5회 ...진위향교 평택 진위면에 자리한 진위향교를 살펴본다. 영의정 심순택의 묘를 보러 가는 길에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둘러보게 되었다. 약간은 경사지고 언덕진 곳에 자리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입지선정에 있어 풍수를 중시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음택과 양택 입지선정의 기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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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3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3회 2) 금화(金火)와 금수(金水)의 조화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터 【1】 조산의 헌천금(獻天金)이 낙(落)하여 소금(小金)이 되었다. 그러므로 연하고 어리다. 【2】 다시 석산(石火)이 나온다. 그러므로 쇳돌 같은 금인 광금(礦金)이 되었다. 화(火)가 있으나 금(金)을 상(傷)하지 않는 화(火)이다. 【3】 완고하고 쇳돌 같은 광금(礦金)은 화(火)를 밑천(資)으로 쇠를 녹이 고 단련하여야 비로소 아름다운 물질을 만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한 자(資)는 화(火)로 데우는 것이고, 화성(火星) 아래 둥근 금(金)이 나오면 즉 쇠를 녹이어 만든 용금(鎔鑛) 이다. 그러므로 금(金)을 녹이면(鎔) 둥글게 된다. 【4】 금(金)에 이미 화(火)가 나오면 반드시 수(水)로 담금질 하여야 견고하고 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水)는 금(金)을 담금질 하여 견고하게 하고 금(金)을 담금질 하여 그릇을 만든다. (淬金水) ☞ 그러므로 금(金)은 무성(武星)이니 수(水)로써 담금질 하면 수려(秀)해지고, 화(火)로 이루어(成)지면 녹(祿)을 이루니, 반드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가 나온다. ☞ 장군이 되어 제상이 된다. 그러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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