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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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4회... 의순공주의 부친 금림군의 묘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4회... 의순공주의 부친 금림군의 묘 [한국풍수신문] 효종의 고민을 덜어준 금림군..그는 왕으로 부터 엄청난 포상을 받았다. 왕의 고민을 덜어준 대가겠지만 아버지의 선택에 희생된 의순공주의 불행은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불가할 것이다. 금림군의 묘는 바로 의순공주 묘 옆에 자리하고 있다. 묘소만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묘를 조성해서는 안되는 골짜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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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3회...영천 황보씨 영의정 황보인 묘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3회...영천 황보씨 영의정 황보 인 묘 [한국풍수신문] 계유정난에 희생되었던 황보인의 묘는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부족한 면이 보인다. 현장에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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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2회...전주이씨 좌의정 이관명의 묘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2회...전주이씨 좌의정 이관명의 묘 [한국풍수신문] 이관명의 묘는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산133에 위치한다. 이관명의 아버지는 대제학 이민서이고 아들은 우의정 이휘지이다. 본인은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모두 대제학을 지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집안으로 유명하다. 아들 이휘지의 묘와 달리 이관명의 묘는 관리는 되고 있었으나, 기대한 만큼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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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1회...세종왕자 한남군 묘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1회...세종왕자 한남군 묘 [한국풍수신문] 한남군의 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755-11에 있다. 경기도가 아닌 이곳에 묻히게 된 이유는 유배를 왔다가 영원한 안식처로 삼은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남군은 혜빈양씨의 장자이다.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희생된것이다. 정치가 비정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게임이다 보니 그럴것이라 생각되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풍수를 그 자체로 해석하기 보다는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시키는 모습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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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0회...소나무가 아름다운 학림사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20회...소나무가 아름다운 학림사 [한국풍수신문] 학림사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고려말의 나옹화상이 이절에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혈처에는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곳의 소나무는 압권이었다.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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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9회...예안이씨 좌의정 이명의 묘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9회...예안이씨 좌의정 이명의 묘 [한국풍수신문] 이명의 묘는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있다. 묘소아래에는 재실인 각심재가 있다. 아파트가 꽉 들어찬 이곳에 조상의 묘소와 재실이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잘 안가는 곳이다. 물론 예안이씨 문중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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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8회...남평문씨 고려 문신 문극겸의 묘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8회...남평문씨 고려 문신 문극겸의 묘 [한국풍수신문] 문극겸의 묘를 살펴본다. 주산과 안산이 아름답다. 아쉬움이 있다면 입수룡이 약한게 흠이라면 흠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를 선인단좌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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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7회... 풍양조씨 시조와 공빈김씨 묘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7회... 풍양조씨 시조와 공빈김씨 묘 [한국풍수신문] 풍양조씨 시조묘와 공빈김씨의 묘는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산 56번지 한 보국 같은 능선상에 자리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풍양조씨 시조의 묘는 용진처에 자리한다면, 공빈김씨의 묘는 과룡처에 자리한다.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풍양조씨 시조의 묘가 정혈처에 자리한다. 그렇다고 광해군의 불행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에서 찾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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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6회 ... 철종의 예릉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6회 ... 철종의 예릉 [한국풍수신문] 서삼릉의 중심을 차지한 예릉...철종과 철인왕후 김씨가 뭍혀있다. 편안한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느끼기 어려운 곳이다. 그의 삶도 뚜렷함이란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의 묘소에서도 역시나 그런 느낌이니 살았던 모습을 그의 묘소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전제는 성립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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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5회... 선조의 목릉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15회... 선조의 목릉 [한국풍수신문]선조 33년(1600)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인조 8년(1630)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인조 10년(1632)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하여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ah이라 했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이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1743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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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한국풍수신문, 박저해교수 풍수이야기14회...효심 간직한 유화당한국풍수신문, 박저해교수 풍수이야기14회...효심 간직한 유화당 [한국풍수신문] 유회당(有懷堂)은 (權以鎭:1668∼1734)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로 보문산 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입니다. 실제로 유회당 뒤편에 권이진의 부모 산소가 있다. 권이진은 본인의 묘소와 유회당 그리고 종택에서 모두 무곡금성체의 주산을 선택하고 있다. 어차피 선택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그 사람의 취향이 반영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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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3회... 세종대왕의 영릉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한국풍수신문,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3회... 세종대왕의 영릉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 [한국풍수신문] 여주에 자리한 세종대왕의 영릉은 조선왕조의 왕릉중에서 가장 명당이라고 인정받고 있는데, 원래는 헌·인릉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세조실록』등에 따르면 길지가 아니라는 여러 논란이 있었고, 세조 13년 세조는 신숙주와 구치관으로 하여금 영릉의 개장을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안효례와 최호원으로 하여금 영릉의 길흉을 살피고 보고할 것을 지시하지만, 이들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자 파직하고 의금부에 하옥하는 일이 생긴다. 예종 때에 이르러 세종의 영릉은 여주로 천장하게 되는데, 여느 명당과 마찬가지로 세종대왕의 능도 여러 의견들이 회자되고 있다. 가장 쟁점이 되는 내용이 천장하기 위해 팠을 때 시신이 썩지 않고 있었다는 것과,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 여러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근거는 미약하고 흥미위주의 설화들이 떠돌고 있는 정도이다. 따라서 조선을 대표하는 정사기록인『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살펴본다. 영릉과 관련하여『조선왕조실록』에는 아주 명확하지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어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간략하게 기록한 배경에는 당시 왕의 시신과 관련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은 불경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쁜 모습이었다면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의 영릉을 팠을 때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예종실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릉(英陵)을 파서 여니, 현궁(玄宮)은 물기가 없고, 재궁(梓宮)과 복어(服御)가 새 것과 같았다. 『예종실록』에는 현궁에 물기가 없었다는 점은 분명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어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재궁과 복어가 새것과 같았다’는 부분이다. 복어란 입고 있던 수의를 말하는 것인데, 전혀 썩지 않고 새것처럼 있었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옷만 새것처럼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면, 시신도 전혀 부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시신의 부패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의의 오염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450년에 승하한 세종은 1469년 천장할 때까지 만19년 동안 전혀 부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은『예종실록』을 통해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반면에 다른 의견도 제시될 수 있는데, 복어가 새것 같았다는 것은 물의 침투가 없었고, 시신이 생각보다 훨씬 깨끗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으로 영릉이 있던 곳에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다는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을 갖고 있을까? 이 부분도 천장할 당시의 기록인『예종실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이인손의 묘는 이계전의 무덤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영릉의 터로 이계전의 묘 자리를 선택하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 그 외에도『예종실록』에는 영릉을 천장하면서 이계전의 묘를 미리 파서 물이 나오는지 여부를 살폈다는 기록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으로 혈처를 미리 살펴보고 혈토의 출토여부와 길흉여부를 살펴보는 의미있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영릉이 있던 자리에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는 말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릉을 천장한 곳에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고, 이곳에서 나온 秘記에 따라 연을 날려 새로운 묘 터를 잡았다는 설화는 어디에 등장한 것일까?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내용은 지창룡 선생이 쓴『한국지리총람』에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정리한 것이『조선왕조실록』과는 다른 내용이 회자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정리하면서 다른 재밌는 설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설화는 풍수의 스토리텔링을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면서, 설화가 갖는 장점도 적극 활용할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지나친 왜곡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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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12회 ... 해남 도솔암을 다녀와서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12회 ... 해남 도솔암을 다녀와서 [한국풍수신문] 풍수를 하다보면 많은 곳을 답사하기 마련인데, 이번에 찾은 곳은 해남 달마산 도솔암이다. 파고드는 차가움을 이기고자 옷깃을 여미며 찾아든 도솔암은 달마산의 기암괴석을 뒤로 하고 험한 산길을 걸어 도착할 수 있었다. 도솔암에 가는 길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으나 관광객의 발길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도솔암은 의상대사가 선정하고 의조대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 하는데, 명랑대첩이후 왜구에 의해 불타고 방치되던 곳을 2002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에 자리한 달마산 도솔암은 그 동안의 답사를 통해 느꼈던 많은 감동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였다. 절묘함과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곳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고, 크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조화로움이 한껏 빛나고 있었다. 높은 절벽위에 자리하고 있으나 바위가 빙 둘러싸 바람 한 점 들어오기 어려운 조건은 자연만이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우리 선배 풍수가들의 눈높이는 현대 풍수가들이 감히 넘보기 어려운 경지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삼 깨닫게 된다. 수많은 답사와 노력을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는 깊은 산속의 암자와 사찰의 입지는 과연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답사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현대의 풍수가 중 일부는 현장을 찾지 않고 구글지도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는 한심한 사고에 머물러 있다. 발품을 팔지 않고 강의실에서 공부를 다하고 길지조차도 강의실에서 간단하게 찾을 수 있다는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필자는 나름 답사를 많이 하려고 하지만, 선배 풍수가들이 노력을 통해 얻어 놓은 곳을 다시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지를 찾기 위해 추운겨울에 산을 헤매지 않고 쉽게 찾아가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혹자들은 선배 풍수가들이 찾아 놓은 결록서를 바탕으로 생지를 찾고자 하였고, 자신만이 결록서에서 제시한 곳을 찾았다는 아집만으로 풍수의 전부인양 오도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본다. 인간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자신만의 뛰어남을 자랑하고 있으나, 자연의 힘 앞에는 한낱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만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무한대의 혜택을 사람이 극복하기 어려운 것처럼 자연이 이룬 다양한 현상들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감히 넘보기도 하고 도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순간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연현상이 만든 절묘함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과 논리를 만들어 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풍수가 아닌가 한다. 풍수는 길흉화복론만으로 만들어진 허접한 학문이 아니다. 자연을 인간의 생활속에 끌어들여 합리적인 활용성을 담보하고자 한 형이상학의 학문영역인 것이다. 풍수연구를 나름 했다고 하는 필자도 아직 부족함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풍수를 실전적인 면과 이론적 배경 그리고 역사를 논하고자 논문을 쓰고 있으나, 풍수의 영역은 넓고도 깊다는 생각이다. 그 깊이와 뜻을 다 알기 어려우며 현명한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 부족한 필자는 어느 것 하나 완성된 논리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학문적 영역 속에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풍수의 현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건축을 통한 현대화 작업은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풍수이론은 제시되어야 하며 연구되어야 한다. 필자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으나 현대화된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차츰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현장을 찾아 선배 풍수가들의 발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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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1회... 고대 하늘(天) 인식과 風水(SK사옥의 하늘천자-거북이 머리를 상장한다.)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1회... 고대 하늘(天) 인식과 風水 [한국풍수신문] 상고시대 사람들에게 ‘하늘’은 해와 달, 별들이 떠있는 곳으로, 비를 내리고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자연물로 인식하였다. 요순(堯舜)시대에는 농경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홍수(洪水)와 같은 재난(災難)에 봉착하게 되었고 자연현상에 대하여 예민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 명산과 대천, 풍우, 뇌전 등 자연현상과 자연물 등을 神으로 보고 수호신(守護神)으로써 ‘하늘’을 믿게 되었다. 그 실증으로써 요(堯)가 帝位에 있을 때에 중여의 후손인 희씨와 화씨에게 천지사시(天地四時)를 관장하는 세습관직을 제수하고, 하늘을 경외(敬畏)하고 하늘의 움직임을 잘 조사하여, 역상(曆象)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파종과 제초, 추수 등의 시기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요(堯)의 후계자인 순(舜) 역시 자연현상의 관찰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공경의 대상으로 하늘을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자연숭배사상은 더 나아가 천지자연과 사물에 어떤 정령이나 영력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를 경배하던 소박한 사고방식은 인지의 발달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낱낱의 자연현상을 통합하였다. 이를 체계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우주 전체를 통할하는 절대최고의 영적 존재자가 있음을 상정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자연계의 제신(諸神) 내지 우주 전체 섭리를 지배하는 신비스런 영적 존재자가 상제 또는 ‘하늘’이고, 그것을 숭배하는 신앙이 곧 경천사상이다. 천명사상은 바로 경천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은 초월적 존재를 의미하는 관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SK사옥의 하늘천자-거북이 머리를 상장한다. 하늘을 의미하는 ‘天’이라는 글자는 원래 인간의 머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갑골문에는 ‘天’이라는 글자가 아래 그림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갑골문에서의 천자(天字) 그림에서 보듯이 ‘天’이라는 글자는 본래 사람의 머리 부분을 상형한 것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天은 이마이고, 위가 없는 높음에 이름이고, 하나의 큼을 따름” 이라고 하였다. 안병주는 "天字의 원뜻은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마 내지 두부(頭部)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오(武內義雄)는, "天字는 大字 위에 선을 그은 문자로서, 大는 사람이 두 손을 벌리고 두 다리로 이 세계를 덮는 천공(天空)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天’은 우리들 위에 있는 상공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은대(殷代)에는 자연신으로 ‘하늘’ 못지않게 조상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미래의 일을 묻는 점복(占卜)을 통해서 구체화되었고, 각종 제례(祭禮)에 신명(神命)과 더불어 조상을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조상의 산소를 잘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의식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같은 기를 가진 후손의 발복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동기감응론은 기본논리를 형성하게 된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하늘’의 종교적 관념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왕에 이르러 종묘제도가 성립되고 통치 질서가 확립됨으로서 천명을 계승한 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하늘과 조상을 제사하는 관습은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 의미에서의 ‘하늘’의 관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음양의 학설로써 우주간의 현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즉 양으로서의 하늘이 존재한다면, 음으로서 땅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하늘’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연현상으로 존재하던 ‘하늘’은 점차 신격화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은대(殷代)에는 종교적 색채까지 띠기 시작한다. 주대(周代)에는 점차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 사고가 발달하게 되면서, 자연현상으로서의 ‘하늘’의 관념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경(敬)과 덕(德)이 있어 德의 실천성이 강조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면서 공자(孔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우주만물의 운행원리로서 道의 관념을 강조하면서 ‘하늘’을 자연물로 인식하는 노자(老子)의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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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 10회... 연소혈의 영월암 풍수(혈처에 자리한 마애불)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 10회... 연소혈의 영월암 풍수 [한국풍수신문] 불교는 그 어떤 사상과 문화도 수용하려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다양한 장점을 수용하며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가에서 사찰의 입지선정은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이는 불교가 융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고 중국의 경우에도 같은 모습인데, 길지의 중요성과 활용성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불교와 함께 풍수가 인도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다. 당에 유학한 스님들이 주로 간 곳은 형세풍수가 발달한 곳으로 알려진 강서성이었다. 그곳에서 양균송의 형세풍수를 접하고 돌아온 스님들에 의해 기발한 지역에 입지를 선정하였다. 특히 암자의 입지는 현대의 풍수가로 하여금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곳을 선정하고 있다.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월암도 여기에 해당한다. 영월암을 우리는 연소혈이라 하는데, 제비집처럼 높고 오목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어 아늑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영월암은 제비집의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바위를 그대로 둔 채로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풍수의 핵심인 혈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바위 자체를 활용하는 절묘함까지 보여주고 있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선배 풍수가들의 뛰어남과 동시에 순발력을 칭찬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실력을 배양하는데 옛 선배들의 결과물은 언제나 중요한 배움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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