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
[풍수]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9회...전주이씨 좌의정 이이명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9회...전주이씨 좌의정 이이명의 묘 이이명의 묘는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에 있다. 별 기대없이 갔다가 눈이 번쩍 띄는 명당이다. 이런 경우를 대박이라 한다던가...거대한 봉분과 와혈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진으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기회가 되면 방문해서 힘차게 기를 전달하는 입수룡과 와혈의 조화를 감상하기 바란다.
-
[풍수] 박정해교수 풍수이양기 68회 ... 경녕군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양기 68회 ... 경녕군 묘 경녕군의 묘는 충주시 안음골길에 있다. 태종의 서자로 태어나 경기도가 아닌 충주에 묻힌 이유는 정확히 알 수없지만 편안한 자리라 할 수있다. 혈의 형상을 와겸유돌로 구분하는데, 이곳은 겸혈의 형상을 하고 있다. 겸혈은 흔히 보기 어려운데 좋은 구경거리라 할 수있다.
-
[풍수] 주암선생 문화탐방 68회 ...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8회 ...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 묘 김주신[金柱臣.1661(현종 2)∼1721(경종 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다. 조부는 예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이고, 父는 생원 김일진(金一振)이며 숙종의 장인으로,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 임명되고 1699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이어 사헌부감찰·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서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720년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仁元王后)가 되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이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總府都總管)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당대의 문사 최석정(崔錫鼎)·김창협(金昌協)·서종태(徐宗泰)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거가기문(居家紀問)』·『수사차록(隨事箚錄)』·『산언(散言)』·『수곡집(壽谷集)』 등이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풍수적 고찰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을 하고 숙종의 장인으로 부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평생 생원에 불과한 부친을 위해 재사(齋舍)를 지어 자식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를 다한 경은 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유택(幽宅)은 어떤가? 심리산(143m)에서 출맥한 용은 간인(艮寅).계축(癸丑)의 동북방으로 기복굴곡(起伏屈谷)을 하여 손사룡(巽巳龍)으로 횡룡(橫龍)하여 입수하였다. 행룡(行龍)하다 횡룡결작(橫龍結作)이라 그 어디보다 생기가 충만한 곳이고 부모에 대한 효를 몸소 실천한 산 교육의 현장이니 자녀들의 참 교육장이고 또 근동에서 기원이 필요하신 분들은 이용하시면 좋은 곳입니다. 국세는 편안하기 이를 데 없다. 당판은 잘 익은 탐스러운 과일이 꼭지에 매달린 형국이다. 재혈(裁穴)에도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어긋남이 없다. 용호는 내외(內外)로 호위하고 조산.안산은 중첩으로 있어 안정감을 더해주며 손(孫)에 대한 부담이 없는 곳이다. 좌향(坐向)은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정사분금(丁巳分金)이다. 파구(破口)는 을진파(乙辰破)다. 우수(右水)가 좌(左)로 흘러 을진방(乙辰方)으로 나가니 수국(水局)으로 차고소수자생향 (借庫消水自生向)이다. 이는 양공(楊公.834~900.唐 國師) 구빈(求貧)의 진신수법.의 하나로 본국(本局)의 양위(養位)를 충파한다고 논하지 않으며 부귀(富貴)하고.장수하며 인정(人丁)이 대왕한다. 차남이 먼저 발복하지만 용(龍)과 사(沙)가 좋으면 장방(長房)이먼저 발달하기도 한다.
-
[풍수]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7회... 평해손씨 판중추부사 손순효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7회... 평해손씨 판중추부사 손순효의 묘 손순효의 묘는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 안내표지가 있어서 찾아 들었다. 앞쪽의 조산들은 아름다운데 정작 본인의 자리는 그다지 특이점을 찾을 수없다. 묘소의 앞쪽이 손순효의 묘고 뒷부분이 정경부인 평산신씨의 묘이다. 부인이 뒷쪽에 썼으니 일반적이지는 않다.
-
[풍수]주암선생 문화탐방 67회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7회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묘 김홍집(金弘集, 1842년(헌종 8)~ 1896년 2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정치인이다.자(字)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이다.이버지는 참판 김영작(金永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홍집의 어릴 때 이름은 굉집(宏集)이었다고 전한다. 김영작은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의 5대손으로,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한성부 좌윤과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어머니는 성혼(成渾)의 후손이다. 1867년(고종 4)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1868년승정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나갔다. 그가 처음 출사했을 때 부친인 김영작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항상 나랏일에 정성을 기울여 그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훈계하여 훗날 재상의 위치까지 여러 차례 올랐음에도 탐관오리의 오명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김홍집의 30대 시절은 외세의 문호개방 압력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1871년 미국과 충돌하는 신미양요를 겪었고, 급기야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 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고종 13)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강화도 조약의 속임수를 깨달은 조선 정부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새 인물로 김홍집을 발탁하였다. 1880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위정척사파 계열 인사들도 중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급진 개화파로 몰렸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진압 후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96년 관제 개정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측의 지원으로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총리대신 재직 중 신분제 폐지, 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한편,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 개방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파로 몰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들로부터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홍집의 사위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다. 이시영은 선조 때 영의정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참고문헌: 위키백과.) ● 풍수적 고찰 조선 말기 백척간두의 난세에서 피아를 넘나들며 구국을 의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라는 욕은 다 먹고 주군의 외면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이면서 최고의 정치외교가 김홍집(金弘集)의 유택(幽宅)은 어떤가? 심리산(143m)에서 출맥한 용은 간인(艮寅).계축(癸丑)의 동북방으로 기복굴곡(起伏屈谷)을 하여 손사룡(巽巳龍)으로 횡룡(橫龍)하여 입수하였다.입수맥(入首脈)이 양룡(陽龍)으로 오니 취기가 분명치 않는 곳인데 사성을 이중으로 하다보니 깊은 와혈형(窩穴形)이다. 지기(地氣)가 크지 않는 곳인데 봉분에 비해 상석과 신도비가 비대해 안정감이 떨어져 아쉬움이 있다. 주위에 윗대 조상님들이 많이 계시는 곳이라서 망자는 물론 후손들과 학인들이 보는 입장에서 모양새는 좋지만 전체적인 구도와 취기가 미약해 아쉬움이 있는 곳이다. 묘의 좌향(坐向)은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을진파(乙辰破)다. 우수(右水)가 좌(左)로 흘러 을진방(乙辰方)으로 나가니 수국(水局)으로 차고소수자생향(借庫消水自生向)이다. 이는 양공(楊公.834~900.唐 國師) 구빈(求貧)의 진신수법.의 하나로 본국(本局)의 양위(養位)를 충파한다고 논하지 않으며 부귀(富貴)하고.장수하며 인정(人丁)이 대왕한다. 차남이 먼저 발복하지만 용(龍)과 사(沙)가 좋으면 장방(長房)이 먼저 발달하기도 한다.
-
[풍수]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6회 ... 단양우씨 고려문하시중 우천석 우팽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6회 ... 단양우씨 고려문하시중 우천석 우팽의 묘 묘소는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산에 있다. 우연히 길을 가다 발견한 묘인데 기대보다 좋다. 특히 우천석의 묘가 정혈에 자리하고 있다. 풍수 연구는 묘지 풍수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묘지풍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공부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발달한 풍수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풍수]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02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02회 10) 토금(土金)의 조화에 수각(手脚)과 요도(橈棹)가 없어 부(富)가 성(盛)하여 돈이 많고 자식이 나아가 관직이 있으나 권세가 없는 터 【1】 조산의 토성(土星)에서 터에 이르러 변환(變)이 없고 각(脚)이 없이 단독(單獨)이다. 【2】 종고(鐘鼓)의 향화(香火)로 부(富)가 성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 토(土)는 본래 탁(濁)하다. ☞ 또 변(變)이 없고 단독(單獨)으로 행(行)하고 수각(手脚)과 요도(橈棹)가 없으면 비록 천지자연의 수(數)에 합해도 오직 사찰의 터로 가능하다. ☞ 자연 도당(徒黨)이 모이고 향화(香火)가 서로 왕(旺)하니 그 복(福)을 같이 받는다. ☞ 만약 사람이 그 사이에 천장하면 태어난 사람이 속세를 떠나 출가함을 주관한다.
-
[풍수] 주암선생 문화탐방 65회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5회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 성승[成勝,?~ 세조 2년(1456)], 호는 적곡(赤谷),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창녕(昌寧), 조부는 개성유후 성석용(成 石瑢),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成達生),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세종 22년(1440)에 경상도병마절제사, 1446 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고, 문종 즉위년(1450)에 정조사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 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같은 해 의주목사에 제수되 었다. 세조 1년(1455)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세조가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즉위하자 아들인 성삼문을 비롯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류성원(柳誠源) ·김질(金礦) 등 집현전학사들과 유응부(兪應孚) ·박쟁(朴崝) 등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 치를 벌일 때 거사하기로 하였다. 동지중지추원사 유응부와 당상 무신인 박쟁과 함께,왕 뒤에 별운검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이에 뒷날 관가(觀 稼)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사실을 상의하자 정창손이 곧바로 세조에게 고발하였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와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되었다. 이 때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 聘)·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숙종18년(1692년) 3월 25일 고 부총관 성승의 관작을 복구.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두산 백과.)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병자 9월 7일자 내용이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ㆍ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ㆍ딸 내은금(內隱今)ㆍ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ㆍ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ㆍ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ㆍ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ㆍ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ㆍ딸 가구지(加仇之)ㆍ말비(末非)ㆍ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ㆍ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ㆍ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ㆍ딸 불덕(佛德)ㆍ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ㆍ딸 요문(要文)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ㆍ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남(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ㆍ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ㆍ딸 산비(山非)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ㆍ딸 금정(金正)ㆍ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ㆍ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이렇게 그녀들은 공신이나 대신들에게 노리개나 종으로 내려주어 그 치욕을 감당하게 한다 그렇게 세상 못볼꼴, 못할꼴 다보고 몇 십년만에 겨우 풀려난 성삼문 아내 차옥과 딸 효옥은 그래도 끝까지 지아비이자 아버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렸다 한다 그 후 순조 때 정식 제사를 국가에서 관여했다 고(故) 문충공(文忠公) 성삼문(成三問)에 대해 그 방손(傍孫)으로 하여금 따로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를 대신 지내는 의리에다 부조(不祧)의 예(禮)를 적용시키라 명하였으니,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 인한 것이었다. 옛날 현묘조(顯廟朝) 때 성삼문의 신주(神主)가 백악산(白嶽山)의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나왔었는데, 아직까지 사손(祀孫)을 정하지 못하였기에 방손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택정(擇定)할 것을 청하자,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고 묘당(廟堂)에서 0품처(稟處)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삼문은 조선의 가장 절의있는 인물이 되기까지 4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극한의 고통을 겪다 살아난 인물이 된다 ● 풍수적 고찰 주군이었던 세조의 하명(嘏命)을 지키고자 거사를 계획했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돼 멸문지화를 당한 성삼문 부친 성승장군의 유택(幽宅)은 어떤가? 주산은 닭제산으로 닭제산(165.7m)에서 경유룡(庚酉龍)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서진하다 병오룡(丙午龍)으로 횡룡(橫龍)하여 기복굴곡(起伏屈曲)을 거쳐 곤신(坤申)으로 변신하여 다시 병오(丙午).미곤(未곤).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경유룡(庚酉龍) 횡룡(橫龍)입수하였다. 성승장군 묘는 횡룡결작(橫龍結作)으로 보아 용사한 묘다. 횡룡(橫龍)의 필수는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이 있어야 한다.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은 혈(穴) 뒤쪽에서 불어오는 곡풍(谷風)을 막아주고 주룡의 생기의 설기를 막아주기에 귀성은 짧고 단단한 것이 좋은데 이곳은 귀성이 강하게 밀어 주지 않고 계축룡(癸丑龍)으로 산진처를 향해 내려가는 형국이라 당판(當坂) 형성이 풍만하지 못하기에 계절(階節)이 협소하다. 당판은 좌우 균형을 이룬듯하나 취기가 미약하다. 안산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 화목과 안온함을 주고. 용호는 미약하여 주인을 잘 보호하지를 못하고 있다. 만약 절손이 되지 않고 후손이 이어졌드라면 귀(貴)보다는 화목이 우선시되는 곳이다.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파구는 경파(庚破)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88향법에서 수(水)가 경유(庚酉)로 나가니 향상(向上)의 녹위[祿位(辛祿)은 酉]를 충파하는 소황천(小黃泉)이 된다. 이는 궁핍하고 요수하며 과부가 난다. 이 황천묘는 무수히 구묘를 경험해 보아도 혹간 수(壽)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지만 여러 형제가 많아도 결국은 핍사하고 곤궁하여 부자는 없다. 만약 술자상(戌字上)을 침범하고 창도(鎗刀)와 악석(惡石)이 있으면 횡폭하여 투쟁을 좋아하 는 자손이 나리라.
-
[풍수]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01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01회 9) 토생금(土生金)에 금(金)아 많아 무직(武職)을 구하나 치부(致富)가 영원하지 못한터(土金駁雜) 【1】 조산의 토(土)에서 금(金)을 생(生)하여 3금(金)을 전(傳)한다. 【2】 다시 토(土)가 락(落)하여 2개의 금성을 생(生)하고,【3】 터에 이르러 토(土)로 전(傳)하여 입혈(入穴)하였다. ☞ 토생금(土生金)은 이치는 자세히 살펴야 한다. ☞ 토(土)가 주(主)가 되고 금(金)이 객(客)이 되는데 객이 많고 주(主)가 작으면 불리하다. ☞ 또한 토(土)가 주(主)가 되고 토(土)가 힘이 없으면 치부(致富)가 영원 하지 못한다. 객(客)이 주(主)보다 왕(旺)하면 그 전(傳)하는 것이 하나같지 않다. 다시 토혈(土穴)이 나오면 그 선후(先後)을 잃는다. 나아가 무직을 거두나 관(官)을 구하기 위하여 돈(錢)을 잃는다. 그리고 반드시 부(富)로 인하여 힘을 다 써 관(官)을 구하니 겨우 무직(武職)이며 관(官이 작다. 이로 인하여 가난하고 부진(不振)하다. 이것은 토금(土金)으로 기운이 박잡(駁雜)하고 터의 토성이 강한 금에 상한 것이 불길 한 것이다. (土金駁雜)
-
[풍수]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5회 ...광주이씨 형조판서 이극감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5회 ...광주이씨 형조판서 이극감의 묘 이극감의 묘는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 있다. 멀리서 보아도 좋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더 좋았다. 음택풍수에서 명당에 무덤을 쓰고 태어난 후손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바로 이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극감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이극감의 부친은 이인손이다. 이극감은 두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세좌와 이세우이다. 이세좌는 4명의 아들을 두는데 이세원과 이수형, 이수의, 이수정이다. 막내 이수정은 두명의 아들을 두는데 이윤경과 이준경이다. 이극감의 증손자가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이다. 이극감은 1465년 죽었는데, 이준경은 1499년에 태어난다. 약 34년의 시차가 있다.
-
[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00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00회 8) 토목금(土木金)의 조화에토(土)가 변목(變木)후 토(土)가 없어 문(文)으로 귀(貴)가 가능하나 불현(不顯)하고 불수(不壽)한 터 【1】 토(土)가 낙(落)하여 소개(小蓋)가 되니 치부(致富)가 가능하나 목(木)이 소비하니 토(土)가 후부 할 수 없게 된다. 【2】 목(木)은 매마른 땅에서는 왕(旺)하지 못하고 혈(穴)이 편(偏)하여 치우쳐 추(醜)하면 문(文)으로 귀(貴)는 가능하나 드러나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한다. ☞ 이처럼 토(土)가 주(主)가 되고 목(木)이 객(客)이 되면 목(木)이 주(主) 인 토(土)를 이기니 조화가 이미 역(逆)으로 토(土)가 소모한다. 토(土)가 극(剋)을 받으니 기(氣)가 없다 ☞ 그러므로 목(木)이 전(傳)하면 더욱 약(弱)하여 부족(不足)한 기(氣)가 되니 단정한 혈(穴)이 되지 못한다. ☞ 그러므로 나오는 사람이 비록 문(文)이라도 대귀(大貴)가 되지 못하니 마침내 청귀함이 빈(貧)하고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 대개 조화(造化)가 넘어지면 극해(剋害)하니 기(氣)가 없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목(木)이 주(主)가 되고 중간에 토(土)를 얻어서 목(木)을 기르면 즉 목(木)은 왕(旺)하여 전(傳)하여 터에 이르러 반드시 아름답고 나오는 사람이 반드시 귀(貴)하다. 토(土)에서 목혈(木穴)이 나오면 진실로 조화(造化)에 무해(無害)하다. 단 변(變)한 후에 다시 토(土)있어 목(木)을 기르면 토(土)가 줄어들지 않아 목(木)이 성(盛)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목(木)으로 변(變)한 후에 토(土)가 없으니 무리의 목(木)을 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조화가 무너졌기 때문에 토기(土氣)가 부족한 것이다.
-
[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4회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4회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 도응(都膺)[?~?]은 고려 말의 충신으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죽마고우였다고 한다. 도응의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도유(都兪),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예산 지역 성주도씨(星州都氏) 입향조로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에 찬성사를 지내다가,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은거하였다. 이후 친구와의 옛 정을 생각한 태조 이성계가 상장군에 임명하고 다섯 번이나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도응은 문장에 능하였다고 전하며, 「어사시(御賜詩)」 1수, 「두문동비표(杜門洞碑表)」 14자, 「사제문(賜祭文)」과 「부조현연구(不朝峴聯句)」가 각 1편씩 남아 있다. 도응의 묘소는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지석리 산141-16]에 있다. ‘도응선생묘 일원(都膺先生墓一圓)’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으며, 후손들이 사당인 경충제(敬忠齊)를 지어 도응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도응은 1808년(순조 8) 성주 운천서원(雲川書院)과 장성 경현사(景賢詞), 개성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가 1393년(태조 2)부터 1397년까지 도응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의 고문서가 일괄 보물 제724호[성주도씨 종중 문서 일괄 ]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서들을 통해 조선 개국 초 도응과 태조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조선 전기 관제의 변천 과정, 새보[국왕의 도장]의 사용 경위, 그리고 서체나 고문서의 양식 등을 연구하는 데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향토문화전자대전.) ● 풍수적 고찰 태조 이성계는 죽마고우이면서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길을 걸은 친구를 위해 당대 최고의 지사(地師)이자 국사(國師)인 무학대사에게 의뢰해 유택(幽宅)까지 신경을 써 우정을 나눈 청송당 도응(都膺) 선생이 안거(安居)하고 있는 유택(幽宅)은 어떤 곳인가? 도응 선생의 유택은 매봉산(173.2m)의 정기가 응축된 곳으로 배가 허기진 매가 먹이를 호시탐탐 노리는지라 잠시의 방심도 허용치 않아 잔뜩 긴장감이 감돌아 생기가 넘쳐오르는 곳이다. 매봉산에 출맥한 용은 을진(乙辰)의 동남(東南)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하다 간인(艮寅)의 동북으로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갑묘룡(甲卯龍)으로 입수(入首)하여 좌정(坐定)하였다. 국세(局勢)는 편안한 곳이다. 조.안산은 아미(蛾眉)와 토체(土體)로 부귀(富貴)를 기약한다. 청룡은 면전에까지 환포로 다가오는 청룡작국(靑龍作局)으로 이상적인데 근대에 도로개설로 인해서 중간이 잘려나간 것이 흠이다. 백호(白虎)는 양(陽)인 청룡에 비해 다소곳하고 온순하게 다가와 읍하니 화목한 집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곳인데 이 역시 도로가 중간을 싹둑 잘라 남녀 중말자에게 해가 갈까 두렵다. 혈형(穴形)은 첨하(籤下)에서 보면 돌혈(突穴)이요. 도두(到頭)에서 입수룡을 보면 평지룡에서 위이(逶迤)로 오다 서서히 비룡상천(飛龍上天) 우돌혈(柔突穴)에 가깝다. 당판은 기(氣)가 꽉 차 손만 대면 금방 터질 듯이 풍만하다. 좌향(坐向)은 유좌묘향(酉坐卯向).진파(辰破)다. 이는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국사)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이다. 차고소수자왕향은 임관룡(臨官龍).우선룡(右旋龍)에 좌수도우(左水到右). 갑묘향(甲卯向)에 을진파(乙辰破)는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쇠방으로 물이 나가도 되고 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고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오래살고 인정(人丁)이 왕한다. 간방수(艮方水)가 들어오면 삼길육수(三吉六秀)의 수(水)가 되어 비상한 인재(人才)와 문장(文章)이 나고 급제한다. 처음에는 아무리 좋은 길지(吉地)라도 후대에 와 환경변화로 인해 길지가 흉지(凶地)로 변할 수 있으니 후손들은 방심보다는 지속적인 묘역관리와 주변의 환경변화와 지형도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
[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9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9회 7) 토화(土火)의 조화에 화(火)가 강하여 귀(貴)하나 흉화(凶禍)가 있는 터 【1】 조산의 토(土)에서 강한 화를 생(生)하였다. 화(火)가 토(土)를 생(生)하는 것은 불변의 이치이다. ☞ 그러나 토(土)가 작고 화(火)가 성(盛)하면 매마른 땅이 되어 토(土) 좋지 않게 된다. ☞ 온화(瘟火)가 집에 들어오고 속귀(速貴)하나 일찍 망한다. ☞ 화(火)는 녹성(祿星)이 된다. 그러나 화(火)가 왕(旺)하면 토(土)를 이기지만 응당 화(禍)를 불러온다. ☞ 그러나 녹(祿)의 기(氣)가 되니 마침내 가릴 수 없고, 역시 귀(貴)가 드러나는 사람이 나온다. ☞ 그러나 온화(瘟火)와 흉화(凶禍)로 자연히 괴롭다.
-
[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4회 ... 은진송씨 좌의정 송시열의 집터(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4회 ... 은진송씨 좌의정 송시열의 집터 송시열이 살던 집터는 서울 종로구 명륭동 1가에 있다. 현재는 개발되어 원형을 알 수 없는데 마침 바위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 새겨져 있어 송시열의 집터임을 짐작케 한다. 풍수를 사랑했던 송시열의 집터는 역시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
[카드뉴스]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8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8회 6) 토수(土水)의 조화에 수(水)가 강하여토(土)가 약(弱)하여 수(水)에 의해 이향(離鄕)을 주관하는 터 【1】 조산의 토(土)에서 수성이 층층이 내려와 범람하여 혼탁하다. 【2】 터에 이르러 토(土)는 수(水)를 막을 수 있지만 토(土)가 약하여 떠내려가 버린다. 【3】 수(水)가 강하고 토(土)가 약(弱)하면 수(水)는 탁(濁)하고 멈추지 않는다. 추졸(醜拙)하여 취할 수 없으니 마침내 무너져 근심이 있다. ☞ 그러므로 토성(土星)이 기조(起祖)하여 즉 수(水)가 흘러 나와, 수기(水氣)가 성(盛)하고 강한데 토혈(土穴)이 나오면 이것이 추졸(醜拙)한 까닭이다. ☞ 비유하면 토(土)가 홍수(洪水)에 씻기는 것과 같이 수(水)로 인하여 토(土)가 무너지니 혼탁(混濁)하다. ☞ 재산이 파산하고 사람이 이향(離鄕)한다. 혹 수려한 사람이 나오지만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머무를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