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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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7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7회 5) 어병과 순토(純土)로 대부(大富)하고 귀(貴)가 드러나는 터 【1】 조산의 어병(御屛)이 지극히 귀(極貴)하고 낙(落)하여 소개(小蓋)가 되었다. 【2】 토맥(土脈)이 계속 전(傳)하여 복개(福蓋)를 두르고 있다. 【3】 터에 이르러 토성(土星)이 나오니 조정에 나아가(進納) 크게 드러 난다. ☞ 토(土)는 재성(財星)으로 탁부(濁富)를 주관하고 청귀(淸貴)를 주관하지 않는다. ☞ 그러나 어병(御屛)은 오히려 개성(蓋星)이니 대부(大富)를 주관한다. 이러한 어병성(御屛星)은 개(蓋)로 모두 귀기(貴氣)를 두르고 있다. ☞ 또한 토성(土星)의 터가 되니 재물이 들어오고 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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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3회 ...반남박씨 이조정랑 박조년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3회 ...반남박씨 이조정랑 박조년의 묘 박조년의 묘는 인천시 서구 대곡동에 있다. 반남박씨 종중산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데,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반남박씨가 명문거족으로 거듭나는데 있어 박조년과 박소로 이어진 후손들이 그야말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정승과 왕비등이 이들 후손에서 나왔는데, 풍수가들은 음택풍수의 영향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이 확인되기 때문에 박조년의 묘는 궁금증을 유발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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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6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6회 4) 토금(土金)의 조화로 목화(木火)가 없어 무직(武職)이 나오고 치부(致富)하는데 그치는 터 【1】 조산의 토성(土星)에서 금성(金星)이 나와 토생금(土生金)이 된다. 【2】 다시 후부한 2토(土)와 2금(金)으로 내려온다. 【3】 그리고 터에 이르러 호부한 토(土)를 만들고 금성(金)으로 전(傳)하여 터를 만들었다. ☞ 금토(金土)가 서로 도우니 무신(武臣)이 나타나고 집안이 거부(巨富)를 이룬다 ☞ 토(土)는 재성(財星)이고, 금(金)은 무성(武星)이다. 조화(造化)의 흠(欠)은 목(木)이 없고 화(火)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직(武職)이 나오고 치부(致富)하는데 그치고 집안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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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엄선생 문화탐방 62회 ... 최영(崔瑩) 장군 사당.(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엄선생 문화탐방 62회 ... 최영(崔瑩) 장군 사당.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출생지 철원. 본관 동주(東州)배우자 정실 류씨 부인 첩실 은씨 자녀 슬하 1남 2녀 (생질)맹사성(손녀사위)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 최원직(崔元直)과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최영은 이를 그대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고려의 명장이다.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해 그 공으로 우달치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반원개혁을 단행해 영토수복을 위하여 인당, 신순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략해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서경을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됐다. 이후 신돈이 집권해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도되면서 좌천됐으며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됐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했을 때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 체포돼 유배되고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돼 참형을 당했다. ● 풍수적 고찰 견금여석(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하라는 아버지 유언을 실행한 최영장군. 반역과 불의에 맞서 최후까지 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명장의 사당이라 그런지 암반들이 질풍노도와 같이 몰아쳐 내려오는 석맥의 낙하처 중심지에 우뚝 서서 수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형국이다.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중첩되어 수 많은 군사들이 배출되고. 곡곡(谷谷)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 있는 조당(朝堂)에는 대인리(大仁里).인산리(仁山里) 마을 등에서 어진 큰 인물이 나와 장군의 휘하로 몰려와 기개를 펼치는 형국이다. 좌향은 임좌병향이다. 1차 수구(水口)는 손사파(巽巳破)로 향상의 임관(臨官)을 충파하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이다 살인대황천은 다 큰 자식이 상(喪)을 당하고 패절하며 절름발이.피부병.혈압.노질.토혈 등의 증세가 있는데 먼저 둘째 집이 상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 그러나 2차 水口는 左水가 右로 흘러 丁未方으로 나간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인으로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ㅡ쇠방으로는 물이 나가도 되고.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고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人丁)이 대왕하니 초창기에는 여러 난관이 예상되지만 후세로 갈수록 더욱 빛나고 명예가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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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5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5회 3) 토(土)에 이목(二木)이 소통하여 문장(文章)의로 과거에 급제하고 부(富)가 성(盛)한 터 【1】 조산으로부터 4개의 토(土)내려오고, 【2】 다시 2개의 목(木)으로 변하여 터를 만들었다. ☞ 목(木)이 토(土)의 자질(資)로 성(盛)하고, 토(土) 역시 소통하니 마땅하다. ☞ 토(土)는 재성(財星)이 되고 목(木)은 문성(文星)이 된다.☞ 그러므로 나오는 사람이 과거가 드러나며 또 집에 재물과 부(富)가 후부 하다. ☞ 『경(經)에 이르길 만약 전신(全身)이 토(土)이고 일목(一木)이 소통疏通)하면 터는 자연 부(富)가 창고에 가득 쌓이고 돈이 가득하다. 단지 반드시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이 말은 많은 무리의 토(土)에 홀로 하나의 목성(木星)이 터가 되면 목(木)이 약하여 자손에 귀(貴)가 나오지만 단지 드러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터는 이목(二木)이 서로 전(傳)하여 터를 만드니 목의 기운이木氣)가 이미 왕(旺)하다. 그러므로 고과(高科)로 귀(貴)에 이르고 마땅히 조정에 오르는 것이다. 단지 두려운 것은 후세에 전(傳)하여 토성(土星)에 이르러 부(富)가 성(盛)하고 귀(貴) 없이 오래 지속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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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2회 ...고려 23대 왕인 고종의 홍릉(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2회 ...고려 23대 왕인 고종의 홍릉 홍릉은 강화군 간화읍 국화리에 있다. 워낙 경사가 심해 능에 오르는 길이 힘들었다. 아무리 실권이 없고 전쟁중이라지만 이런자리에 왕릉을 조성하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최충헌이 실권을 가지고 있으니 왕이야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종은 팔만대장경을 조성하여 적으로 부터 고려를 구하자고 하였다. 그런 노력이 있어서 현재까지 능이 보존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아뭏든 강화도에 조성된 왕릉은 하나같이 길지와는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풍수가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까운 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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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4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4회 2) 토화(土火), 토수(土水)의 조화로 수(水)로써 수려(秀)하고 화(火)로써 녹(祿)이 되어 자손이 부귀쌍전(富貴雙全)의 터 【1】 조산의 토(土)에서 작은 토(小土)가 낙(落)하여 화(火)로 변(變)하니 화생토 (火生土)가 된다. 【2】 그리고 화(火)에서 토(土)가 천(穿)하고 나와 앞에 후부한 토(土)를 전(傳)하니 토(土)가 누적하여 쌓여 이미 후부 하다. 【3】 또한 수(水)로서 토(土)를 윤택하게 하고 다시 토성(土星)이 일어나 전(傳)하여 터를 만들었다. ☞ 토(土)는 화(火)에서 생(生)하고, 능수(水)에서 윤택(潤)하고 능히 수(水)를 막는다. 화(火)가 있고 수(水)가 있으면 이는 마땅하니 수(秀)하면 복(福)을 얻고 자손이 부귀(富貴)하다. ☞ 자손에 부귀쌍전(富貴雙全)을 주관하니 화(火)로써 녹(祿)이 되고 수(水)로써 수려한(秀) 것이다. 경(經)에 "수(秀)로써 복(福)을 얻으려면 뒤로 용(龍)이 거슬러 올라가면서 먼저 수성(水星)을 만나면 청수(淸秀)한 사람이 나오고, 그 이후에 화성(火星)을 만나면 이는 식록(食祿)이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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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1회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류장(柳莊) 묘역(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1회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류장(柳莊) 묘역 류장(柳莊.고려말·삼사좌윤)은 외교의 명수로 첨의 정승에까지 오르고 고흥 부원군에 봉해져 고흥 류씨를 고환 명문의 위치로 울려놓은 중흥시조인 류청신(柳淸臣.?~1329)의 장손(長孫). 이며 예빈윤(禮賓尹:예빈시는 고려,조선시대에 빈객의 연향과 재신의 음식공궤를 관장한 관청)을 지낸 유천(柳洤)의 아들로 고려 때 중정대부(中正大夫)․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통례문사(通禮門事)를 지내다가 고려 말기(末期)에 정국(政局)이 험난(險難)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부모를 모시고 천안(天安)으로 낙향(落鄕)하였다. 낙향(落鄕) 후에는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쓰는 하편, 일찍이 조부(祖父) 청신(淸臣)이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선조(先祖)의 견지(遣志)를 완수(完遂)하였다.(참고문헌: 성씨 닷컴.) ● 풍수적 고찰 대한민국에 호도(胡桃)를 정착되게끔 한 장본인인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류장(柳壯)의 묘는 광덕산(699.3m)에서 출맥하여 손사룡(巽巳龍)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산진처(山盡處) 합수지점 위 우뚝 솟는 곳에 건해(乾亥)룡으로 입수(入首)하였다. 일명 장군대좌(將軍對座穴)로 통한다. 당판은 후(厚)한 듯 보이나 좌정하기에는 좀 경사도가 있다. 좌우(左右) 용호(龍虎)는 크고 높게 호위하고 백호작국(白虎作局)이나 안산이 읍하기보다는 힘차게 달리는 모양새다. 혈형(穴形)은 유혈(乳穴)이다. 묘의 좌향(坐向)은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을진파(乙辰破)다. 우수(右水)가 좌(左)로 흘러 을진방(乙辰方)으로 나가니 수국(水局)으로 차고소수자생향(借庫消水自生向)이다. 이는 양공(楊公.834~900.唐 國師) 구빈(求貧)의 진신수법.의 하나로 본국(本局)의 양위(養位)를 충파한다고 논하지 않으며 부귀(富貴)하고.장수하며 인정(人丁)이 대왕한다. 차남이 먼저 발복하지만 용(龍)과 사(沙)가 좋으면 장방(長房)이 먼저 발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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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3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3회 5. 토성(土星) 1) 수토(土水), 토목(土木)의 조화로 귀인(貴人)이 거듭 부자를 만드는 부귀쌍전(富貴雙全)의 터 【1】 조산의 주천토(奏天土)가 락(樂)하여 토성(土星)의 개(蓋)를 만드니 복(福)을 대(帶)한 개성(蓋星)이 되어 거부(巨富) 축적(蓄積)을 주관한다. 【2】 토(土)가 변(變)하여 수성(水星)으로 행(行)하여 다시 토(土)로 전한다.(水土會) 【3】 터에 이르러 토(土)가 수(水)의 윤택함을 얻고 다시 전(傳)한 후,또 다시 목(木)을 생(生)하여 터를 만드니 부귀(富貴)가 함께 한다. ☞ 전체적으로 보면 토(土)가 많아 용기(龍氣)가 탁(濁)하나 나아가 수성(水星)이 되어 그 수려함(秀)을 발(發)한다. ☞ 수(水)는 수려하고 목(木)은 문(文)이다. ☞ 그러므로 부귀쌍전(富貴雙全)을 주관한다.☞ 또한 귀인(貴人)이 거듭 부자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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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1회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석릉(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1회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석릉 희종은 무인정권 시절에 왕이 되었던 인물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의 실권자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다 발각되어 교동도로 유배를 가야했다. 이후 용유도에서 세상을 하직하게 되면서 이곳에 릉을 조성한 것이다. 흔히 왕릉하면 규모도 크고 명당에 자리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선입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깊은 산속으로 한참을 걸어들어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물론 길지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 왕릉을 왜 조성한 것일까? 당시 실권자인 최충헌의 입장에서는 죽은 왕을 추모하려 찾아오는 사람들을 원천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요인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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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2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2회 11) 금토(金土)의 조화로 부(富)는 스스로 쌓을 수 있으나 명예(名譽)가 없는 터 【1】 주산이 하늘에 드리운 금인 헌천금(獻天金)에서 금성(金星)이 내려 온다. 【2】아래의 토성이 후부하여 금토(金土)로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 그러나 금토(金土)로 중간에 변화가 없어 무겁고 탁하면(重濁) 좋지않다. ☞ 그러므로 부(富)는 스스로 쌓을 수 있으나 명예(名譽)는 떨치지 못한다. ☞ 이러한 터는 부(富)의 터가 될 뿐이나 또한 흉화(凶禍)가 없다. ☞ 뒤의 금성(金星)에 이르러 무직(武職)으로 나갈 수 있으니 허물이 없고 명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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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0회 ... 이시백(李時白)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0회 ... 이시백(李時白)묘. 이시백(李時白.1581~1660)는 자 돈시(敦詩).호 조암(釣巖)이다.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안군(과거 연백군)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와 장민의 딸 장씨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으며, 현명하고 겸손하며, 풍채가 당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의 연양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군사를 모집하여 정충신 등과 함께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퇴했다. 정묘호란 때는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동작나루로 가서 인조를 강화도로 피난시켰고, 병자호란 때는 수어사를 겸임해 남한산성의 관리를 전담했다. 성품이 올곧고 강직했으며, 7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만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8년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다.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지지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출처 : 다음백과 ○ 풍수적 고찰 연양 부원군 이시백 묘역은 태화산(460.5m)에서 출맥하여 손사(巽巳)ㅡ갑묘(甲卯)룡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건해룡(乾亥龍)으로 입수하여 좌정하였다. 당판은 튼실해 보이나 중심맥보다는 주인 자리를 보(補)하는 청룡맥으로 봐야... 좌향(坐向)은 해자사향(亥坐巳向)에 정사분금(丁巳分金) 파구(破口)는 손파(巽破)로 당문출이다. 우수(右水)가 장대하여 좌측의 손방(巽方)으로 나간다. 사자(巳字)를 침범하지 말고 백보전란(百步轉欄.약 130m 정도 내의 거리에서 굽어져 사라진다)하면 ㄱ.대부대귀(大富大貴) ㄴ.인정(人丁)이 흥왕한다. ㄷ.남녀 모두 장수한다. 단 龍穴이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다면 패절하게 되리니 가히 함부로 사용하지 못한다. 사용하려면 ㄱ.용진혈적(龍眞穴的) ㄴ.천간자 파구(天干字 破口). ㄷ.백보전란(百步轉欄).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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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0회 ...고려 왕비의 강화 가릉(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0회 ...고려 왕비의 강화 가릉 가릉은 인천시 강화군 영도면 능내리에 있다. 고려 원종의 왕비이자 충렬왕의 모친인 순경태후의 능이다. 내부가 석실로 구성되어 있으나 도굴되어 현재는 내부가 비어있고 관을 놓았던 자리만 볼 수 있다. 풍수적인 특징이 뚜렷하지 않고 길지라 하기도 어렵다. 다만 고려의 왕비능이라는 점에서 방문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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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1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1회 10) 순금(純金)으로 신묘(神廟)의 터 【1】 조산의 금성(金星)에서 금(金)을 낙(落)하고 이어져 전부가 금성으로 터를 만든다. 【2】 중간에 토(土)가 없이 순금(純金)의 터가 되어 신묘(神廟)에 향을 피우는 지리에 불과하다. ☞ 신묘(神廟)가 두텁다는 것은 신묘(神廟)의 힘이 두터워 신령(神靈)과 제사(香火)가 왕(旺)하다는 것이다. ☞ 이는 조화(造化)가 없어 일반인이 사용하는 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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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9회 ... 천안전씨 시조 단소 및 재실(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9회 ... 천안전씨 시조 단소 및 재실 천안 전씨(天安 全氏) 시조는 백제 개국공신인 전섭(全聶).이다歡城(환성)은 天安의 古號(고호 : 옛이름)로 全氏의 發祥地(발상지)이다. 그러므로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太學山(태산) 줄기인 鷹峰(응봉 =매봉) 동쪽 기슭에 시조의 墓壇(묘단)를 설치하고 매년 10월 3일에 歲一祀(세일사)를 지낸다. 단소는 1897년(고종34년 丁酉)에 처음 설치되었고, 현재의 단소 및 제실은 1973~1976년에 重建(중건)된 것이다. 전씨시조 단소 및 재실(4,152㎡)”은 1987.12.30.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환성군 전섭을 시조로 하는 단일 계통임을 자처하는 백제 토성 성씨이다. 그 근거로는 673년에 세워진 금석문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의 세겨진 명문 내용을 통해서 백제계 성씨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천안 전씨의 시조(始祖) 전섭(全聶)은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아홉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공을 세우고,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천안 전씨(天安全氏) 시조인 전섭(全聶)의 29세손인 전락(全樂)이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대구 공산전투에서 싸울 때 신숭겸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후 삼사(三司)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고,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천안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에 위치한 비암사(碑岩寺)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의 기록에 의하면 전씨가 백제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이 고증된다. 비암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신라말 도선(道詵)이 중창했다. 검계서원은 고려말 4대왕을 보필한 충신 문효공 전신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기위해 세운 서원이다. 천안지역에 유일한 서원이다. ● 주요 인물. 전봉준 (全琫準, 1855 ~ 1895)일명 '녹두장군'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이다. 최근에는 전무송 - 배우 전병관 - 역도 선수 전석홍 - 제22대 전라남도지사, 제12대 국가보훈처장 전유성 - 코미디언 전영록 - 가수, 배우 전현무 - 방송인 전소민ㅡ배우. 천안 전씨 인구수는176,239(2015년)명이다.(참고문헌: 나무 위키.) ● 풍수적 고찰 태화산(460.5m)에서 출맥한 용은 크게 계축(癸丑)-간인(艮寅)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 위이(逶委)로 행룡하다 아름다운 소원봉을 성봉하고 경유(庚酉)룡으로횡룡입수하한 곳에 천안 전씨(天安 全氏) 단소 및 재실.검계서원이 있다. 음택지(陰宅地)보다는 양택지(陽宅地)에 더 합당한 곳이다. 양명한 곳은 도두 위쪽이라 시조의 단소는 첨하(籤下)에 있는 형국이기에 양명한 지기(地氣)가 없어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납기(納氣)는 괜찮은 곳이다. 좌향(坐向)은 유좌 묘향(酉坐卯向)에 파구(破口)는 당문출에 해당하는 갑묘파구(甲卯破口)다. 분금(分金)은 신묘분금(辛卯分金)이다. 우수(右水)가 장대(長大)하여 좌측으로 흐른다. 향상(向上)의갑자(甲字)로 나가며 묘자(卯字)를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백보전란(百步轉欄)하여야 하며 금국(金局)의 태향태파(胎向胎破)에 합당하다. 이는 출살(出殺)한다고 할 수 있으며 태위(胎位)를 충파한다고 하지 않 는다. 대부대귀하며 인정(人丁)이 흥왕하나 중간에 혹 수명(壽命)를 다하지 못한 자가 생기므로 어린 과부가 가끔 난다. 만약 용진혈적(龍眞穴的)하지 못하다면 장후(葬後)에 패하지 아니하면 절사하리니 가벼이 사용하지 못한다. 만약 이것이 좌수(左水)가 우(右)로 흘러 갑자(甲字)나 혹은 당면(當面)으로 나가면 도리어 생래파왕(生來破旺)이 되어 견동토우(牽動土牛)이다. 태향태파(胎向胎破)라고 논할 수 없으며 인정(人丁)이 있으나 재물이 없어지고 가난하여진다. 태향태방출수(胎向胎方出水)라 고 자칫 그릇되기 쉬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