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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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8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8회 6) 토수(土水)의 조화에 수(水)가 강하여토(土)가 약(弱)하여 수(水)에 의해 이향(離鄕)을 주관하는 터 【1】 조산의 토(土)에서 수성이 층층이 내려와 범람하여 혼탁하다. 【2】 터에 이르러 토(土)는 수(水)를 막을 수 있지만 토(土)가 약하여 떠내려가 버린다. 【3】 수(水)가 강하고 토(土)가 약(弱)하면 수(水)는 탁(濁)하고 멈추지 않는다. 추졸(醜拙)하여 취할 수 없으니 마침내 무너져 근심이 있다. ☞ 그러므로 토성(土星)이 기조(起祖)하여 즉 수(水)가 흘러 나와, 수기(水氣)가 성(盛)하고 강한데 토혈(土穴)이 나오면 이것이 추졸(醜拙)한 까닭이다. ☞ 비유하면 토(土)가 홍수(洪水)에 씻기는 것과 같이 수(水)로 인하여 토(土)가 무너지니 혼탁(混濁)하다. ☞ 재산이 파산하고 사람이 이향(離鄕)한다. 혹 수려한 사람이 나오지만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머무를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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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3회 ...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先生遺墟址)(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3회 ...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先生遺墟址) 성삼문 선생 유허는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이다, 그의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있고, 왼쪽 언덕에 노은단이 있다.1973년 12월 24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담(朴膽)의 고택이 있던 곳이며, 성삼문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76년(숙종 2) 사인(舍人) 이량(李湸)과 유생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삼문의 탄생지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1685년(숙종 11)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를 추가 배향하였다. 1692년(숙종 18) 조정에서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하였다가 1712년(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다. ‘노은’은 민진후(閔鎭厚, 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宋時烈)이 노산(魯山)의 ‘노’자와 은의(恩義)의 ‘은’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다. 1687년(숙종 13) 노은서원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성승(成勝, 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되어 신원된 후 제향되었다. 그러나 노은서원은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다. 당시 유생들은 사육신의 위패를 매안한 다음,그 위에 단을 쌓아 ‘노은단(魯恩檀)’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제향을 올렸다.1945년 광복이 되자 홍성고적현창회에서 삼문을 개축하고 정화하였다. ● 성삼문(成三問)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로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세조 부자를 죽이거나 거병을 하면 각지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김문기,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으로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바로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김문기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그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거사 당일 이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본 한명회와 신숙주의 권고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은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여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체포된 다음 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역자라며 꾸짖고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그는 성삼문 처형직전 마지막가는길에 술 한잔하고 그 뒤 성승, 이개, 하위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뒤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거열형에 처해진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조리돌림되었고, 그의 시신과 그의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김시습 등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 라 하였다. 한편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그 중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과 아들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만다.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 성종때의 학자 성담년 등은 그의 6촌 형제간이다. 아내 차산과 미혼의 장녀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석방 시점은 알 수 없으며[출처 필요] 차산(연안김씨)은 성삼문의 위패를 만들어서 제사지냈다 한다. 김씨부인이 죽은 후 성삼문의 제사는 차녀의 둘째 아들 박호가 승계했으나 후손이 없고, 임란에 인왕산에 성삼문과 그 외손 내외의 신주를 묻었는데 1672년 사태난 골짜기에서 신주 3위가 발견되어 송시열 등이 다시 묻지 않고 홍주로 이봉하였다. 성삼문 일가가 처형당할 무렵 박임경에게 시집간 그의 차녀와 엄정구에게 시집간 3녀는 연좌되지 않았다. 둘째아들 맹년의 딸은 유성원의 일족인 서산공 유자미가 비밀리에 피신시켜 길러서 자신의 일곱째 며느리(柳輯 부인)로 삼았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성삼문의 처로서 노비로 분배된 차산(김씨)은 1456년 9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의 노비로 끌려갔고, 뒤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성종 때인 1475년 5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다시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죽은 후 성삼문 신주는 외손 박호가로 갔으나 후손이 없어 인왕산에 묻혔다.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후손으로는 장녀 효옥, 박림경에게 시집간 차녀와 류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맏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둘째딸은 무안박씨 박림경에게 시집갔고 이후 성삼문의 제사는 둘째 외손자 박호에 의해 봉사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풍수적 고찰. 양택은 생자(生者)가 기거하는 곳을 말한다. 생자가 기거하는 곳으로 청나라 조정동은 1.배산임수(背山臨水-뒤는 산이요 앞은 물) 2.전저후고(前低候高-앞은 낮고 뒤는 높게) 3.전착후관(前窄後寬-입구는 좁고 안쪽은 넓게).해야 좋은 집터라고 했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는 터만 있고 집은 없어 전착후관(前窄後寬) 은 알 수 없지만 배산임수(背山臨水).전저후고(前低候高)은 완벽하게 갖춰진 곳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양택에서 큰 인물이 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기(地氣)인 생기(生氣)가 있어야 한다. 둘째 주산이 문필봉.귀인봉.노적봉..등이어야 한다. 셋째 안산이 주산과 궁합이 맞아야 하고 반듯해야 한다. 넷째 주변에 흉사(凶沙)가 없어야 한다. 다섯째 좌향과 맞는 궁합이어야 한다. 여섯째 사주팔자의 운을 잘 갖고 태어나야 한다. 일곱째 국세(局勢)가 언정정이어야 한다. 여덟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한다. 아홉째 인심이 좋아야 한다. 성삼문 선생 유허지는 주산.안산.주변사...등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에 대해 어긋나는 부분이 없고 부합돠는 곳이다. 유허지의 좌향(坐向)은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정향(丁向)은 인정(人丁)을 요하는 향법이다. 파구(破口)는 곤파(坤破)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면 서(書)에서 이르기를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이라고 한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으로 ㄱ.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ㄴ.인정(人丁)이 대왕하며ㄷ.복수쌍전(福壽雙全) 한다고 한다. PS.유허 (遺墟)란? 유지(遺址) · 유적(遺蹟) · 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 · '옛터'의 뜻으로,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 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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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7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7회 5) 어병과 순토(純土)로 대부(大富)하고 귀(貴)가 드러나는 터 【1】 조산의 어병(御屛)이 지극히 귀(極貴)하고 낙(落)하여 소개(小蓋)가 되었다. 【2】 토맥(土脈)이 계속 전(傳)하여 복개(福蓋)를 두르고 있다. 【3】 터에 이르러 토성(土星)이 나오니 조정에 나아가(進納) 크게 드러 난다. ☞ 토(土)는 재성(財星)으로 탁부(濁富)를 주관하고 청귀(淸貴)를 주관하지 않는다. ☞ 그러나 어병(御屛)은 오히려 개성(蓋星)이니 대부(大富)를 주관한다. 이러한 어병성(御屛星)은 개(蓋)로 모두 귀기(貴氣)를 두르고 있다. ☞ 또한 토성(土星)의 터가 되니 재물이 들어오고 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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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3회 ...반남박씨 이조정랑 박조년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3회 ...반남박씨 이조정랑 박조년의 묘 박조년의 묘는 인천시 서구 대곡동에 있다. 반남박씨 종중산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데,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반남박씨가 명문거족으로 거듭나는데 있어 박조년과 박소로 이어진 후손들이 그야말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정승과 왕비등이 이들 후손에서 나왔는데, 풍수가들은 음택풍수의 영향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이 확인되기 때문에 박조년의 묘는 궁금증을 유발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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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6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6회 4) 토금(土金)의 조화로 목화(木火)가 없어 무직(武職)이 나오고 치부(致富)하는데 그치는 터 【1】 조산의 토성(土星)에서 금성(金星)이 나와 토생금(土生金)이 된다. 【2】 다시 후부한 2토(土)와 2금(金)으로 내려온다. 【3】 그리고 터에 이르러 호부한 토(土)를 만들고 금성(金)으로 전(傳)하여 터를 만들었다. ☞ 금토(金土)가 서로 도우니 무신(武臣)이 나타나고 집안이 거부(巨富)를 이룬다 ☞ 토(土)는 재성(財星)이고, 금(金)은 무성(武星)이다. 조화(造化)의 흠(欠)은 목(木)이 없고 화(火)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직(武職)이 나오고 치부(致富)하는데 그치고 집안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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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엄선생 문화탐방 62회 ... 최영(崔瑩) 장군 사당.(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엄선생 문화탐방 62회 ... 최영(崔瑩) 장군 사당.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출생지 철원. 본관 동주(東州)배우자 정실 류씨 부인 첩실 은씨 자녀 슬하 1남 2녀 (생질)맹사성(손녀사위)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 최원직(崔元直)과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최영은 이를 그대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고려의 명장이다.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해 그 공으로 우달치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반원개혁을 단행해 영토수복을 위하여 인당, 신순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략해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서경을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됐다. 이후 신돈이 집권해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도되면서 좌천됐으며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됐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했을 때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 체포돼 유배되고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돼 참형을 당했다. ● 풍수적 고찰 견금여석(見金如石-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하라는 아버지 유언을 실행한 최영장군. 반역과 불의에 맞서 최후까지 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명장의 사당이라 그런지 암반들이 질풍노도와 같이 몰아쳐 내려오는 석맥의 낙하처 중심지에 우뚝 서서 수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형국이다.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중첩되어 수 많은 군사들이 배출되고. 곡곡(谷谷)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 있는 조당(朝堂)에는 대인리(大仁里).인산리(仁山里) 마을 등에서 어진 큰 인물이 나와 장군의 휘하로 몰려와 기개를 펼치는 형국이다. 좌향은 임좌병향이다. 1차 수구(水口)는 손사파(巽巳破)로 향상의 임관(臨官)을 충파하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이다 살인대황천은 다 큰 자식이 상(喪)을 당하고 패절하며 절름발이.피부병.혈압.노질.토혈 등의 증세가 있는데 먼저 둘째 집이 상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 그러나 2차 水口는 左水가 右로 흘러 丁未方으로 나간다. 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인으로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ㅡ쇠방으로는 물이 나가도 되고.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고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人丁)이 대왕하니 초창기에는 여러 난관이 예상되지만 후세로 갈수록 더욱 빛나고 명예가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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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5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5회 3) 토(土)에 이목(二木)이 소통하여 문장(文章)의로 과거에 급제하고 부(富)가 성(盛)한 터 【1】 조산으로부터 4개의 토(土)내려오고, 【2】 다시 2개의 목(木)으로 변하여 터를 만들었다. ☞ 목(木)이 토(土)의 자질(資)로 성(盛)하고, 토(土) 역시 소통하니 마땅하다. ☞ 토(土)는 재성(財星)이 되고 목(木)은 문성(文星)이 된다.☞ 그러므로 나오는 사람이 과거가 드러나며 또 집에 재물과 부(富)가 후부 하다. ☞ 『경(經)에 이르길 만약 전신(全身)이 토(土)이고 일목(一木)이 소통疏通)하면 터는 자연 부(富)가 창고에 가득 쌓이고 돈이 가득하다. 단지 반드시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이 말은 많은 무리의 토(土)에 홀로 하나의 목성(木星)이 터가 되면 목(木)이 약하여 자손에 귀(貴)가 나오지만 단지 드러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터는 이목(二木)이 서로 전(傳)하여 터를 만드니 목의 기운이木氣)가 이미 왕(旺)하다. 그러므로 고과(高科)로 귀(貴)에 이르고 마땅히 조정에 오르는 것이다. 단지 두려운 것은 후세에 전(傳)하여 토성(土星)에 이르러 부(富)가 성(盛)하고 귀(貴) 없이 오래 지속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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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2회 ...고려 23대 왕인 고종의 홍릉(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2회 ...고려 23대 왕인 고종의 홍릉 홍릉은 강화군 간화읍 국화리에 있다. 워낙 경사가 심해 능에 오르는 길이 힘들었다. 아무리 실권이 없고 전쟁중이라지만 이런자리에 왕릉을 조성하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최충헌이 실권을 가지고 있으니 왕이야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종은 팔만대장경을 조성하여 적으로 부터 고려를 구하자고 하였다. 그런 노력이 있어서 현재까지 능이 보존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아뭏든 강화도에 조성된 왕릉은 하나같이 길지와는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풍수가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까운 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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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4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4회 2) 토화(土火), 토수(土水)의 조화로 수(水)로써 수려(秀)하고 화(火)로써 녹(祿)이 되어 자손이 부귀쌍전(富貴雙全)의 터 【1】 조산의 토(土)에서 작은 토(小土)가 낙(落)하여 화(火)로 변(變)하니 화생토 (火生土)가 된다. 【2】 그리고 화(火)에서 토(土)가 천(穿)하고 나와 앞에 후부한 토(土)를 전(傳)하니 토(土)가 누적하여 쌓여 이미 후부 하다. 【3】 또한 수(水)로서 토(土)를 윤택하게 하고 다시 토성(土星)이 일어나 전(傳)하여 터를 만들었다. ☞ 토(土)는 화(火)에서 생(生)하고, 능수(水)에서 윤택(潤)하고 능히 수(水)를 막는다. 화(火)가 있고 수(水)가 있으면 이는 마땅하니 수(秀)하면 복(福)을 얻고 자손이 부귀(富貴)하다. ☞ 자손에 부귀쌍전(富貴雙全)을 주관하니 화(火)로써 녹(祿)이 되고 수(水)로써 수려한(秀) 것이다. 경(經)에 "수(秀)로써 복(福)을 얻으려면 뒤로 용(龍)이 거슬러 올라가면서 먼저 수성(水星)을 만나면 청수(淸秀)한 사람이 나오고, 그 이후에 화성(火星)을 만나면 이는 식록(食祿)이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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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1회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류장(柳莊) 묘역(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1회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류장(柳莊) 묘역 류장(柳莊.고려말·삼사좌윤)은 외교의 명수로 첨의 정승에까지 오르고 고흥 부원군에 봉해져 고흥 류씨를 고환 명문의 위치로 울려놓은 중흥시조인 류청신(柳淸臣.?~1329)의 장손(長孫). 이며 예빈윤(禮賓尹:예빈시는 고려,조선시대에 빈객의 연향과 재신의 음식공궤를 관장한 관청)을 지낸 유천(柳洤)의 아들로 고려 때 중정대부(中正大夫)․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통례문사(通禮門事)를 지내다가 고려 말기(末期)에 정국(政局)이 험난(險難)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부모를 모시고 천안(天安)으로 낙향(落鄕)하였다. 낙향(落鄕) 후에는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쓰는 하편, 일찍이 조부(祖父) 청신(淸臣)이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선조(先祖)의 견지(遣志)를 완수(完遂)하였다.(참고문헌: 성씨 닷컴.) ● 풍수적 고찰 대한민국에 호도(胡桃)를 정착되게끔 한 장본인인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 류장(柳壯)의 묘는 광덕산(699.3m)에서 출맥하여 손사룡(巽巳龍)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산진처(山盡處) 합수지점 위 우뚝 솟는 곳에 건해(乾亥)룡으로 입수(入首)하였다. 일명 장군대좌(將軍對座穴)로 통한다. 당판은 후(厚)한 듯 보이나 좌정하기에는 좀 경사도가 있다. 좌우(左右) 용호(龍虎)는 크고 높게 호위하고 백호작국(白虎作局)이나 안산이 읍하기보다는 힘차게 달리는 모양새다. 혈형(穴形)은 유혈(乳穴)이다. 묘의 좌향(坐向)은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을진파(乙辰破)다. 우수(右水)가 좌(左)로 흘러 을진방(乙辰方)으로 나가니 수국(水局)으로 차고소수자생향(借庫消水自生向)이다. 이는 양공(楊公.834~900.唐 國師) 구빈(求貧)의 진신수법.의 하나로 본국(本局)의 양위(養位)를 충파한다고 논하지 않으며 부귀(富貴)하고.장수하며 인정(人丁)이 대왕한다. 차남이 먼저 발복하지만 용(龍)과 사(沙)가 좋으면 장방(長房)이 먼저 발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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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3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3회 5. 토성(土星) 1) 수토(土水), 토목(土木)의 조화로 귀인(貴人)이 거듭 부자를 만드는 부귀쌍전(富貴雙全)의 터 【1】 조산의 주천토(奏天土)가 락(樂)하여 토성(土星)의 개(蓋)를 만드니 복(福)을 대(帶)한 개성(蓋星)이 되어 거부(巨富) 축적(蓄積)을 주관한다. 【2】 토(土)가 변(變)하여 수성(水星)으로 행(行)하여 다시 토(土)로 전한다.(水土會) 【3】 터에 이르러 토(土)가 수(水)의 윤택함을 얻고 다시 전(傳)한 후,또 다시 목(木)을 생(生)하여 터를 만드니 부귀(富貴)가 함께 한다. ☞ 전체적으로 보면 토(土)가 많아 용기(龍氣)가 탁(濁)하나 나아가 수성(水星)이 되어 그 수려함(秀)을 발(發)한다. ☞ 수(水)는 수려하고 목(木)은 문(文)이다. ☞ 그러므로 부귀쌍전(富貴雙全)을 주관한다.☞ 또한 귀인(貴人)이 거듭 부자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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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1회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석릉(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1회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석릉 희종은 무인정권 시절에 왕이 되었던 인물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의 실권자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다 발각되어 교동도로 유배를 가야했다. 이후 용유도에서 세상을 하직하게 되면서 이곳에 릉을 조성한 것이다. 흔히 왕릉하면 규모도 크고 명당에 자리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선입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깊은 산속으로 한참을 걸어들어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물론 길지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 왕릉을 왜 조성한 것일까? 당시 실권자인 최충헌의 입장에서는 죽은 왕을 추모하려 찾아오는 사람들을 원천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요인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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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2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2회 11) 금토(金土)의 조화로 부(富)는 스스로 쌓을 수 있으나 명예(名譽)가 없는 터 【1】 주산이 하늘에 드리운 금인 헌천금(獻天金)에서 금성(金星)이 내려 온다. 【2】아래의 토성이 후부하여 금토(金土)로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 그러나 금토(金土)로 중간에 변화가 없어 무겁고 탁하면(重濁) 좋지않다. ☞ 그러므로 부(富)는 스스로 쌓을 수 있으나 명예(名譽)는 떨치지 못한다. ☞ 이러한 터는 부(富)의 터가 될 뿐이나 또한 흉화(凶禍)가 없다. ☞ 뒤의 금성(金星)에 이르러 무직(武職)으로 나갈 수 있으니 허물이 없고 명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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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60회 ... 이시백(李時白)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60회 ... 이시백(李時白)묘. 이시백(李時白.1581~1660)는 자 돈시(敦詩).호 조암(釣巖)이다.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안군(과거 연백군)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와 장민의 딸 장씨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으며, 현명하고 겸손하며, 풍채가 당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의 연양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군사를 모집하여 정충신 등과 함께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퇴했다. 정묘호란 때는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동작나루로 가서 인조를 강화도로 피난시켰고, 병자호란 때는 수어사를 겸임해 남한산성의 관리를 전담했다. 성품이 올곧고 강직했으며, 7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만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8년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다.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지지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출처 : 다음백과 ○ 풍수적 고찰 연양 부원군 이시백 묘역은 태화산(460.5m)에서 출맥하여 손사(巽巳)ㅡ갑묘(甲卯)룡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건해룡(乾亥龍)으로 입수하여 좌정하였다. 당판은 튼실해 보이나 중심맥보다는 주인 자리를 보(補)하는 청룡맥으로 봐야... 좌향(坐向)은 해자사향(亥坐巳向)에 정사분금(丁巳分金) 파구(破口)는 손파(巽破)로 당문출이다. 우수(右水)가 장대하여 좌측의 손방(巽方)으로 나간다. 사자(巳字)를 침범하지 말고 백보전란(百步轉欄.약 130m 정도 내의 거리에서 굽어져 사라진다)하면 ㄱ.대부대귀(大富大貴) ㄴ.인정(人丁)이 흥왕한다. ㄷ.남녀 모두 장수한다. 단 龍穴이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다면 패절하게 되리니 가히 함부로 사용하지 못한다. 사용하려면 ㄱ.용진혈적(龍眞穴的) ㄴ.천간자 파구(天干字 破口). ㄷ.백보전란(百步轉欄).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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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0회 ...고려 왕비의 강화 가릉(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60회 ...고려 왕비의 강화 가릉 가릉은 인천시 강화군 영도면 능내리에 있다. 고려 원종의 왕비이자 충렬왕의 모친인 순경태후의 능이다. 내부가 석실로 구성되어 있으나 도굴되어 현재는 내부가 비어있고 관을 놓았던 자리만 볼 수 있다. 풍수적인 특징이 뚜렷하지 않고 길지라 하기도 어렵다. 다만 고려의 왕비능이라는 점에서 방문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