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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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7회... 메밀꽃 필 무렵.ㅡ이효석(李孝石) 생가.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7회... 메밀꽃 필 무렵.ㅡ이효석(李孝石) 생가. 이효석[李孝石:1907~1942.본관 전주(全州).호 가산(可山).강원도 평창 출생]은 경성 제1 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졸업.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어려서부터 문학에 천재성을 띠어 짧고 젊은 나이에 메필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내었는데 그만 37세에 뇌수막염으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데...? 생가 뒷산이 문필봉.안산.주위산도 문필봉이다. 높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지만 집에서 볼 때 안산이 좀 높은 편이면서 준수하게 쭉 용립(聳笠)을 못하고 5부 능선이 푹 꺼져 있어 잘 나가더라도 중간에서 부침을 겪을 상이다. 생가지는 산진처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취기처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제대로 하려면 현재보다 입구 쪽으로 옮기고 좌향은 양택 최고 좌향인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한다면 흠이 있는 안산 문필봉의 영향을 덜 받아 중도에 그치지 않고 쭈욱 나갔으리라 문필은 붓끝처럼 끝이 뾰족하면서 수려한 봉우리로 사(沙)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귀인봉이다. 귀인봉은 귀(貴)를 대표하기에 사세가 갖춰지고 취기된 곳의 음.양택에서 문필봉과 조응하는 음.양택은 후손이나 거주자에게 발음(發蔭)이 오는데... 1.충효 현량한 자손. 2.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손 3.과갑(科甲) 4.뛰어난 학문.문장으로 존귀 5.문.무.재(文武財)에서 승승장구. 6.무병장수 7.오복...등을 누림. 8.대 문장가 9.대 행정가 10.대 언론인.11.정당인 12.달변가 13.학자및 연구원 14.화가 및 예술인...등을 배출하죠. 즉 자손들이 총명하고.뛰어난 학문.문장으로 극귀하다. 귀인봉으로 인한 발음을 볼 때 주산.안산.임관방(臨官方).삼길육수방.역마방.용호.손(巽)방에 봉우리를 으뜸으로 치고.조당.파구...등을 보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주산(主山)이 문필봉.또는 안산(案山)이 문필봉은 문(文)의 대명사격으로 귀(貴)를 관장한다. 문필봉이 고축(誥軸)과 같이 있으면 과갑(科甲)한다. 문필봉이 석모(席帽)와 어병(御屛)이 가까이 있으면 동궁(東宮)의 시독(侍讀) 벼슬에 나가 태자.세자 보필한다. 문필봉이 적당한 높이이고 준수하면 선비형이요. 문필봉이 용립(聳笠)하면 대학자.대문호.대 언론인.대행정가 낮으면서 흠집이 있으면 초기엔 문사로 특출나지만 말기엔 유명무실하거나 요절한다. ●귀인(貴人) 1.임관귀인(眞貴人)ㅡ臨官方에 수려한 봉우리. 2.역마방.삼길육수(震庚亥.艮丙.巽辛.兌丁)방에 봉우리가 솟아도 귀인봉이다. 3.三吉.ㅡ좌향에 관계없이 震庚亥방위에 풍만 수려한 봉우리면 자손이 부귀복록을 누리고 장수한다 4.六秀.ㅡ좌향에 관계없이 艮丙.巽辛.兌丁)방에 淸高 수려한 봉우리가 있거나 마주(巽과 辛...)보면 귀인. 빼어나면 拱福貴人으로 官人은 六判書에 오르고. 私人은 得財壽福한다. 辛丙丁庚이 수려하면 陽催官귀인 巽兌艮震이 수려하면 陰催官귀인. • 祿과 귀인 역마를 겸하면 더욱 귀하고 속발하다. 驛馬方ㅡ亥卯未坐-巳方.인오술坐-申方. 사유축坐-亥方. 신자진坐-寅方 .•六秀 귀인중 으뜸 순위는... ㄱ.巽方峰-천자의 권위(상징.생사.전쟁.재앙관장)太乙屋 ㄴ.辛峰과 巽峰이 相照ㅡ官位가 諫臺로 上貴다. ㄷ.辛峰ㅡ天乙屋.인간 세상의 吉凶 관장 ㄹ.艮峰.ㅡ天市垣으로 福祿의 재물관장. ㅁ.丙峰과 艮峰이 相照ㅡ發鼎元. ㅂ.丙峰ㅡ天貴星.貴관장. ㅅ.兌方峰.ㅡ小彌垣으로 인간의 기쁨을 관장. ㅇ.丁峰ㅡ南極星.壽福 관장 ※삼길육수나 기타 귀사라도 험하고 함몰되고.깨지고 날카로우면 어느 방위를 막론하고 흉하다. ※문필은 火星體에 가깝고 巽方은 木星이니 木生火다 壬坐丙向.丁破口시 巽方은 向上의 임관方으로 極貴 ●집안은 부유하였고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면장을 하였으며 후손으로는 1남 1녀가 있는데 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선생 유택은 초장지는 25년간 기념관이 있는 봉평면 창동리에 있었는데 1998년 경기도 파주시 동화 경모 공원 묘지로 한밤중에 이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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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풍수지리확회, 시산제 및 229차 경기도 양평지역 답사(정통풍수지리확회 = 제공) 정통풍수지리확회 시산제 및 229차 경기도 양평지역 답사 [한국풍수신문] 정통풍수지리학회는 지난 26일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소방서에서 양평의 주산 추읍산을 바라보며 올 한해 무탈하고 모두 부자 되시라고 시산제 및 양평군지역 답사를 진행했다. 시산제 및 양평지역 답사는 한양대학교 동양문화 학과 석,박사와 일반인들도 함께 참석해 밝고 화기애애한 자리였다고 한다. ◎익평위 홍득와 숙안공주 묘, 숙안공주는 효종의 둘째딸이고 유명한 장희빈의 라이벌이였다 한다. ◎황은위 정재화와 청선공주의 묘, 사도세자의 딸이 청선공주다. ◎택당 이석의 묘, 이석의 묘에는 아들은 좌의정 이단하등의 묘가 있고, 양평 최고의 명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봉황정,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 앉았다는 뜻, 물은 바람의 통로라서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맞을수 있는곳이라고 한다. 정통풍수지리학회 박정해 이사장은 "풍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주는 선조님의 지혜를 볼수있고, 참석하신 모든분들 가정의 화목과 부자 되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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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5회...출화금(出火金): 화성에서 나와 기물을 만드는 금성한국풍수신문,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5회 4. 출화금(出火金): 화성에서 나와 기물을 만드는 금성 ➀ 화(火)에서 금(金)이 나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 금(金)으로 전(傳金)하였다. 기물을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땅(地)이다. 그러므로 화에서 나온 진금(眞金)은 기물을 이루니 가히 공경할만 하다. ➁ 금(金)에서 화(火)가 나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 금(金)으로 전(傳金)하였다.이것은 기물을 만드니 요(曜)가 된다. 금(金)중에서 제일 묘(妙)하다. 수려함이 나오고 조정에 올라 의정(廊廟)을 도모한다. 5. 출산광(出山鑛): 산에서 나온 광석의 금성체 ➀ 석산으로 나무나 풀이 자라지 못하는 민둥산이다. 이러한 출산광(出山鑛)은 흉(凶)이 있다. 이러한 산은 화(火)의 변환을 얻어 물러나 청수(淸秀)한 산이 되어야 아름답다. 만약 화를 만나지 못하면 반드시 초목이 살지 못하는 산이 된다. 또한 산에서 광석이 나와 어지럽게 많이 있다. 아직 재련(煆 煉)되지 않은 금이다. 제일 불길하다. 산에 있는 광석이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 매우 천하다. ➁ 낮은 산에서 광석(鑛石)이 나와 빛이 나고 둥글어 마치 알 껍질 같다. 광석(鑛石)이 참되고 완전하면 빛이 나고 둥글어 매우 좋다. 무직(武織)과 봉후(封侯)이고 외국(外國)에서 공물을 바친다. 앞에 있는 출산광(出山鑛)은 난잡하고 강한 돌인 난완석(亂頑石)이다. 그러므로 천(賤)하다. 그러나 이것은 섞여 빛이 나는 둥근 돌로 진광(眞鑛) 이다. 그러므로 귀(貴)하다. 비록 아직 제련은 되지 않았지만 자질은 이미 귀(貴)하다 할 수 있다.그러나 역시 무신(武臣)에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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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1회... 고대 하늘(天) 인식과 風水(SK사옥의 하늘천자-거북이 머리를 상장한다.)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1회... 고대 하늘(天) 인식과 風水 [한국풍수신문] 상고시대 사람들에게 ‘하늘’은 해와 달, 별들이 떠있는 곳으로, 비를 내리고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자연물로 인식하였다. 요순(堯舜)시대에는 농경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홍수(洪水)와 같은 재난(災難)에 봉착하게 되었고 자연현상에 대하여 예민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 명산과 대천, 풍우, 뇌전 등 자연현상과 자연물 등을 神으로 보고 수호신(守護神)으로써 ‘하늘’을 믿게 되었다. 그 실증으로써 요(堯)가 帝位에 있을 때에 중여의 후손인 희씨와 화씨에게 천지사시(天地四時)를 관장하는 세습관직을 제수하고, 하늘을 경외(敬畏)하고 하늘의 움직임을 잘 조사하여, 역상(曆象)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파종과 제초, 추수 등의 시기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요(堯)의 후계자인 순(舜) 역시 자연현상의 관찰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공경의 대상으로 하늘을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자연숭배사상은 더 나아가 천지자연과 사물에 어떤 정령이나 영력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를 경배하던 소박한 사고방식은 인지의 발달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낱낱의 자연현상을 통합하였다. 이를 체계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우주 전체를 통할하는 절대최고의 영적 존재자가 있음을 상정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자연계의 제신(諸神) 내지 우주 전체 섭리를 지배하는 신비스런 영적 존재자가 상제 또는 ‘하늘’이고, 그것을 숭배하는 신앙이 곧 경천사상이다. 천명사상은 바로 경천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은 초월적 존재를 의미하는 관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SK사옥의 하늘천자-거북이 머리를 상장한다. 하늘을 의미하는 ‘天’이라는 글자는 원래 인간의 머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갑골문에는 ‘天’이라는 글자가 아래 그림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갑골문에서의 천자(天字) 그림에서 보듯이 ‘天’이라는 글자는 본래 사람의 머리 부분을 상형한 것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天은 이마이고, 위가 없는 높음에 이름이고, 하나의 큼을 따름” 이라고 하였다. 안병주는 "天字의 원뜻은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마 내지 두부(頭部)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오(武內義雄)는, "天字는 大字 위에 선을 그은 문자로서, 大는 사람이 두 손을 벌리고 두 다리로 이 세계를 덮는 천공(天空)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天’은 우리들 위에 있는 상공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은대(殷代)에는 자연신으로 ‘하늘’ 못지않게 조상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미래의 일을 묻는 점복(占卜)을 통해서 구체화되었고, 각종 제례(祭禮)에 신명(神命)과 더불어 조상을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조상의 산소를 잘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의식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같은 기를 가진 후손의 발복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동기감응론은 기본논리를 형성하게 된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하늘’의 종교적 관념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왕에 이르러 종묘제도가 성립되고 통치 질서가 확립됨으로서 천명을 계승한 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하늘과 조상을 제사하는 관습은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 의미에서의 ‘하늘’의 관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음양의 학설로써 우주간의 현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즉 양으로서의 하늘이 존재한다면, 음으로서 땅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하늘’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연현상으로 존재하던 ‘하늘’은 점차 신격화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은대(殷代)에는 종교적 색채까지 띠기 시작한다. 주대(周代)에는 점차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 사고가 발달하게 되면서, 자연현상으로서의 ‘하늘’의 관념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경(敬)과 덕(德)이 있어 德의 실천성이 강조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면서 공자(孔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우주만물의 운행원리로서 道의 관념을 강조하면서 ‘하늘’을 자연물로 인식하는 노자(老子)의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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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4회...정좌금(定座金): 낮게 특이하게 서 있는 토질(土質)의 금성산[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4회 3. 정좌금(定座金): 낮게 특이하게 서 있는 토질(土質)의 금성산 ➀ 정좌금(定座金)은 헌천금(獻天金)의 다음으로 높으며 정상이 둥그렇고 골이 파이고 험하지 않다. 이러한 금성산은 화성(火)을 얻으면 쇠를 녹이어 땅 위에 맺히고 이 금(金)은 변화(變化)하여 점차 기물을 이루니 반드시 보옥(寶玉)이나 도검(刀劍)의 세(勢)가 있다.그러므로 무관의 기운이 있어 팔좌(八座: 좌우(左右) 복야와 영(令)과 육상서(六尙書)의 총칭(總稱)가 나란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금성산이 토질(土質)이면 문장가의 기질이 함께 있다. ➁ 위의 산은 같은 정좌금으로 토질(土質)이고 이 성(星)은 석질(石質)이다. 토(土)는 유(柔)하므로 문(文)이고. 석(石)은 강(剛)하므로 무(武)이다. 금성의 본성은 무성(武星)이고 또 앞에 요성(曜星)을 생(生) 한다. 이러한 기운은 장군의 기운을 주관한다. 따라서 이러한 금성 아래에 있는 요(曜)는 금(金)의 수기(秀氣)가 생(生)한 것이고 화(火)가 아니다. 이러한 터는 당연히 극품(極品)의 귀(貴)를 본다. 귀룡(貴龍)중에서 이 성(星)을 보면, 비록 문장(文章)의 대신(大臣)이나 역시 장수(將)로 제상(帝相)이 된다. 만약 이러한 성(星)을 대(帶)하지 않으면 즉 조정에서 소임을 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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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한국풍수신문,주암선생의 문화탐방16회 ...무학대사와 운곡 원천석한국풍수신문,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5회 ...무학대사와 운곡 원천석 [한국풍수신문] 한국 풍수의 계보는 통일 신라말의 도선국사에서 무학대사로 이어지는데 비보 풍수를 중시한 도선 국사는 주로 음택보다는 양택 위주여서 음택으로 소점한 자리는 전남 영암의 거창 신씨외 극소수에 불과하고 주로 사찰ᆢ등이 대부분이었죠. 반면 무학대사는 자신과 인연이 닿는 사람에겐 보시를 위한 일환으로 음택.양택구분 않고 소점을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신과 친구이고 태종의 소시적 스승인 운곡 원천석신후지지를 잡아 주었 다고 전해 내려 온 곳이 현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 37(일반번지.행구동343)다. 신안이라 칭해오던 무학대사가 소점했으니 모두들 대명당이라고 칭찬 일색이지만 묘가 안정을 못 찾고 허물어지거나 후손이 발복을 못했다면 분명 뭔가 잘못된 거라고 봐야 한다. 기운이 취기되지 않고 흘러가 버렸거나 아님 취기된 곳이 다른 곳이거나 재혈에서 빗나갔거나...등 여러가지 일 텐데 실지로 후손중에 5대손에서 혁연(赫然.동추.종2품).인후(仁厚.대제학정2품)가 전부였다고한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목은 이색등과 성리학 보급에 힘쓰다가 고려말 정치가 혼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숨어 버렸고.조선 개국 후에 여러 차례 벼슬을 하사 하였지만 끝내 고사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걸로 추앙을 받고 있죠. 충절을 지킨 선생의 유택자리는 어떤가?무학대사가 잡아줬으니 최소한 명불허전은 될까? 묘역은 좋은 명당터이자 취기된 정혈 자리는 있으나 선생의 계신 곳은 실혈된 곳으로 명성에 걸맞지 않음은 물론 자기 안을 삼는 기룡혈도 또한 아니다. 굳이 분류한다면 봉요혈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산중에서 급히 내려오다 살짝 내려 앉은 연소혈로도 볼수 있겠지만 물형론은 보는 이에 따라 각양각색이라 딱 이것이다.라고 정답 내리기엔 좀 그렇다. 혈장지는 음양이 교구되어 가장 편안한 자리이기에주변 사세(四勢)는 물론 천지 음양이 어우러진 중심지에 자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청룡 쪽 좌견에 해당하는 남서쪽이 낮아 허해 보이나 중중으로 돌고 청룡 작국으로 1차 안산이 될 정도로 유정하게 감싸 안았고 풍수에서 제일 꺼리는 간인방도 백호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주인을 호종하고 있어 전체적인 국세는 안온한 자리임이 분명하다 현재 좌향은 진좌 술향이나 정혈처의 좌향은 15도 이상 청룡 방으로 틀어야만 기운과 안산겸 조산(사진6)이 맞아 떨어지는데 아쉽다. 이기인 88향법으로 보면 을좌신향에 건해파로 정묘향 정음정양법은 정음으로 왔으니 정음향인 을좌신향으로 안산과 조산은 부귀를 겸전하는 금성체로 좌견이 약해 장방보다는 이방(二方)이하와 백호가 우람하니 딸과 외손이 많이 발복 받으리라. 회원들이 정성 들여 가져온 제수를 놓고 예를 갖춘 후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사랑하는 학구열을 본 받고자 묘소 앞에서 기념 촬영하고 안산을 보고자 했으나 미세먼지 관계로 소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보여서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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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3회...헌천금(獻天金):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금성[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3회 헌천금(獻天金):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금성 ➀ 하늘높이 솟아 제일 높은 것을 헌천금((獻天金)이라 한다. 부귀(富貴)가 함께 한다. 목성의 신체(身體)는 둥근 것이 작고 높고, 금성의 신체(身體)는 둥글고 넓다. 헌천(獻天)은 그 높은 기운을 취한다. 헌천금이 5개가 있으니 제왕의 지위가 함께 한다. ➁ 금성이 하늘 높이 특이하게 일어나고 구름을 뚫고 둥글다. 일품(一品)으로 지극히 귀(貴)하고 거듭 정권(政權)을 잡는다. 이처럼 대성신(大星辰)이 특이하게 일어나(特起) 홀로 선 것을 귀(貴)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주위의 숲에 의지하여 서 있는 것은 같지 않다. 제왕의 기운이 있다. 2. 퇴지금(堆地金): 작은 산이 돌 무더기처럼 쌓여 있는 금성 ➀ 퇴지금(堆地金)은 작은 산이 돌무더기처럼 하나로 모인 곳이다. 작은 산이 돌무더기처럼 쌓아 지상(地上)에 금괴(金塊)를 쌓아두는 것 같다. 금(金)이 쌓여있는 퇴지(堆地)모양이면 대부(大富)하고 또 귀(貴)하다. 집안의 재산이 크고 가득하며 팔좌(八座)의 지위(地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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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 10회... 연소혈의 영월암 풍수(혈처에 자리한 마애불)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 10회... 연소혈의 영월암 풍수 [한국풍수신문] 불교는 그 어떤 사상과 문화도 수용하려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다양한 장점을 수용하며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가에서 사찰의 입지선정은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이는 불교가 융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고 중국의 경우에도 같은 모습인데, 길지의 중요성과 활용성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불교와 함께 풍수가 인도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다. 당에 유학한 스님들이 주로 간 곳은 형세풍수가 발달한 곳으로 알려진 강서성이었다. 그곳에서 양균송의 형세풍수를 접하고 돌아온 스님들에 의해 기발한 지역에 입지를 선정하였다. 특히 암자의 입지는 현대의 풍수가로 하여금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곳을 선정하고 있다.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월암도 여기에 해당한다. 영월암을 우리는 연소혈이라 하는데, 제비집처럼 높고 오목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어 아늑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영월암은 제비집의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바위를 그대로 둔 채로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풍수의 핵심인 혈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바위 자체를 활용하는 절묘함까지 보여주고 있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선배 풍수가들의 뛰어남과 동시에 순발력을 칭찬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실력을 배양하는데 옛 선배들의 결과물은 언제나 중요한 배움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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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2회...금성(金星): 무관(武官)의 기운[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2회 3. 금성(金星): 무관(武官)의 기운 금성(金星)은 산 정상이 둥글고 그 기운은 무관(武官)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혹 금성이 홀로 있으면 창(倉)으로 재물의 기운이 있으나 화성(火星)과 조화를 이루면 불로 금을 녹여 장군이 쓰는 보검(寶劍)을 만들 수 있으니 무관의 기운을 나타낸다. 또한 금성은 우주행성에서 수성 다음으로 있어 금수상간(金水上間)으로 부와 귀를 주관한다. 그 형상은 종부(鍾釜)와 같고, 혹은 복마(伏馬)와 같고, 혹은 원립(圓笠) 같고, 혹은 자병(糍餠) 같다. 금성의 변화는 분별이 제일 어렵다. 토(土)와 비슷하고, 목(木)과도 비슷하며 첨수(尖秀)하여 화(火)와도 비슷하다. 목(木)은 가지가 단출(單出)하고 금성은 양방에 다리가 둥글게 나온다. 또한 머리가 넓게 펼쳐 둥글다. 대개 목성은 면이 좁고 길며, 금성은 면이 넓고 옆으로 펴진다. 목성은 목이 다한 끝이 미미하게 첨(尖)하고 둥글다. 그러나 금성은 크고 둥글다. 이것이 구별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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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5회...만고충신(萬古忠臣) 엄흥도(嚴興道)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5회...만고충신(萬古忠臣) 엄흥도(嚴興道) ■ 만고충신(萬古忠臣) 엄흥도(嚴興道) 만고충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로 오랜 세월 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신하를 말하는데 영월 엄 씨의 엄흥도 또한 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엄홍도는 본관이 영월(寧越).시호는 충의(忠毅).영월의 호장. 단종이 세조에 의해 청령 포에서 금부도사 왕방연등에게 시해되자 누구하나 후환이 두려워 방치한 시신을 수습 하고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절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영월을 떠나 숨어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이후 현종(조선 제 18대) 때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주청으로 복위되었으며 1.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고 2.1726년(영조 19년)에 정문(旌門)과 공조판서에 증직되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됨. 3.1833년(순조 33년)에는 다시 증 공조판서에 추 4.1877년(고종 14년) 충의공(忠毅公)의 시호 받음. ★풍수적 고찰은 국지 산에서 힘차게 기동해 위이굴곡과 박환을 거듭하여 달려온 내룡이 목마름을 해소코자 남한강을 앞에두고 고삐를 잡아채 멈추니 유좌묘향(酉坐卯向)에 신묘분금(辛卯分金)이다. 기골이 장대한 용장(龍長)이 좀 더 편안히 쉬기 위해 좌측의 아담한 안산으로 자리 잡으면 경좌갑향(庚坐甲向)의 정묘분금(丁卯分金)에 묘파(卯破)지만 용진혈적(龍眞穴的).백보전란(百步轉欄).천간자(天干字) 파구가 안 돼 이기에도 미흡하다. 만고의 충신이 좌정(坐定)한 자리가 그 어느 자리보다 복후지지(福厚之地)하고 옹룡불박(雍容不薄)하여야 하는데 안 돼 아쉬움이 크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룡을 밟아보니 천장지비(天藏地秘)한 곳이 묘후(墓後)에 있어 다행이다. 이는 동량지재(東梁之材)로써 나라를 빛낼 위인이나 충신...등 진정한 주인을 기다리는 것일게다. 엄흥도를 모신 사당 문경 충절사 ★아래는 단종을 애달게 그리는 왕방연 시조 한 수 첨부합니다. 단장곡( 斷腸曲) 천만 리 머나만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녜놋다 이 시조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유배지 청령포를 굽어보는 강변 언덕에 앉아, 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연군(戀君)의 단장곡( 斷腸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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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 풍수이야기 9회 ... 아방궁의 진실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 풍수이야기 9회 ... 아방궁의 진실 [한국풍수신문] 아방궁(阿房宫)은 진시황제가 세운 궁전이다. 함양과 위수 근처 즉, 섬서성 서안시 서측 13km 지점의 아방촌(阿房村)에 자리한다. 진시황의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었지만, 진이 멸망한 탓에 미완성으로 끝났다. 진시황제가 재위하면서 효공이 세운 함양궁은 협소하다고 하여 황하 지류 남측의 상림원(上林苑)에 새로운 궁전 축조를 계획했다. 아방(阿房)의 땅에 궁전을 건설하려고 했지만, 진시황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사마천의 『史記』에 의하면, 궁전 규모는 동서로 5백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600m~800m, 남북으로 113m~150m에 이른다. 그 궁전 위에는 10,000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15미터 가량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전 밖에는 목책(木柵)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남산에 이를 수 있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궁에 연결되었다. 『史記』에 따르면 아방궁은 楚나라 項羽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항우에 의해 불탄 것은 함양궁이고 아방궁은 불타지 않았다는 설이 2003년에 제기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방궁은 이 궁궐의 정식 이름도 아니었다. 사마천의 『史記』에 따르면 아방(阿房)의 ’아‘는 가깝다는 뜻이고, ‘방’은 곁방(傍) 자와 같은 뜻으로, 기존 함양궁 근방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는데, 공사 중에 임시로 이 지명 아방을 붙여 아방궁이라고 불렀고, 결국 미완성 상태에서 끝나 정식 이름은 지어지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궁전으로서 역할도 못하고 사라졌지만,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였던지 아방궁이란 명칭은 한자 문화권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남아 있다. 본래 진나라의 수도에는 이미 여러 차례 증축한 거대한 함양궁이 존재했는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만 하더라도 계속 함양궁에 머물렀다. 이후 거대한 능묘와 만리장성처럼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것이 아방궁이다. 그러나 아방궁은 중국 역사상 황제의 거대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대명궁과 자금성, 원명원, 기타 황실 불교 사원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작은 편에 속한다. 진시황이 건립한 만리장성이나 능묘가 실존하는 만큼, 이 건물도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정작 아방궁지에서는 관련 유물이나 증명할 만한 고고학적 자료는 출토되지 않아 실존을 의심하는 학자도 많은 편이다. 진시황의 호화 궁궐이었다는 전설 속의 아방궁은 짓다가 중단한 설계상의 건축물이고, 초나라의 항우(項羽)가 불 질렀다는 고사는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나왔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와 시안(西安)시 문물보호국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아방궁 발굴단은 지난 2002년부터 5년간 아방궁 터를 전면 탐측·발굴한 결과 아방궁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발굴단의 리위팡(李毓芳) 연구원은 시안시 함양(咸陽) 아방궁터 추정지 부근 62㎢를 샅샅이 정밀조사했으나 건물을 짓기 위한 토대만 남아 있을 뿐 건축물이 완성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발굴 결과에 따르면 아방궁터에는 동서 1천270m, 남북 426m의 흙이 단단히 다져진 토대가 있었고, 이 토대는 동서와 북쪽에 담으로 둘러싸였으나 남쪽에는 담이 없었으며 불탄 흔적도 없었다. 담은 흙벽이 쌓아졌고 벽 위를 장식했던 기와도 있었지만 기와는 진나라 때의 것이 아니고 나중의 동한(東漢)과 북조(北朝)시대의 것이었다. 결국 아방궁은 설계상에만 존재하고 건물을 세우기 위해 토대만을 닦은 후 진나라가 멸망하자 중단된 미완성 공사인 셈이다. 리위팡 연구원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에 항우가 함양에 진입한 이후 사람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는 등 학정을 했던 사실은 기록돼 있지만 아방궁을 불 질렀다는 기록은 없다고 강조했다. 『사기』에 적힌 항우의 군대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진나라 궁전에 불을 질러 석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수많은 보화와 부녀자가 재로 변했다"는 기록은 아방궁을 가리킨 게 아니라 아방궁 이전의 진나라 궁궐인 함양궁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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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4회... 방랑시인 김삿갓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4회 방랑시인 김삿갓 ■ 방랑시인 김삿갓 기다란 죽장을 짚고 큰 삿갓으로 눌러쓰고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방랑하며 뛰어난 필력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세상과 인간사를 꼬집었던 김삿갓.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은 싸우지를 않고 반란군에게 항복한 죄로 처형당하자 모친은 6살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영월의 깊은 산중에 숨어살게 되죠. 20세 때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조부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지만 역적의 자손에 조부를 비판한 것.으로 자괴감을 느껴 가족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들어선 김삿갓. 멀리 화순땅에서 졸(卒)하였지만 첩첩산중 와석리 노루목에 안장된 유택은 어떤가? 제반 여건상 경황(景況)이 없어서였을까? 마대산(1052m)에서 지현굴곡으로 달려온 내룡은 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과룡의 한 지맥의 안쪽 가장자리인듯하나 호위하는 좌우 용호사가 뚜렷하지 않고 좌향은 남향이나 안산은 높으면서 주인 에게 투권(鬪拳)모양새고 향전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할각수로 반배를 하니 안정감등을 봤을 때 잠시 숨어 있는 것은 가(可)하나 영면하는 유택자로는 빛 좋은 개살구격이라 아쉽다. 지기는 별 볼 일 없지만 납기는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준비해간 제물을 진설하고 예를 갖춘 후 하산을 서두르자 자꾸 더 있다가 가라고 옷깃을 잡는다.... PS 본명은 김병연[(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본관 신 안동.자는 성심(性深), 호는 이명(怡溟)·지상(芝祥)·난고(蘭皐), 별칭은 방랑 시인(放浪 詩人),일명은 김난(金鑾, 金蘭, 김란), 속칭은 김삿갓, 김입(金笠, 김립).아버지 김안근(金安根), 어머니 함평 이씨 부인(咸平 李氏 夫人) 시를 보면 가관(可觀)으로 과연 김삿갓이다. 아마 이는 속세의 모든 걸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다보니 그랬우리라... 書堂乃早知(서당내조지-서당을 일찍부터 알았으니) 學童諸未十(학동제미십-방 안은 모두 귀한 자제들이라.)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학동은 모두 열 명도 안되고) 訓長來不謁 (훈장내불알-훈장은 와서 인사도 않는다.) 毛深內䦢 必過他人(모심내활 필과타인-털 깊고 속 넓으니 필히 누가 지나갔다.) 溪邊楊柳不雨長(계변양류불우장-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라고.) 後園黃栗不蜂坼(후원황률불봉탁-뒤뚤의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잘 벌어진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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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1회...입수화(入水火): 수(水)안으로 들어가는 화성산[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1회 5. 입수화(入水火): 수(水)안으로 들어가는 화성산 ➀ 입수화(入水火): 화성산(火星)이 안에 있고 수성산(水星)이 평평하게 밖을 두르고 있다. 비록 수려하나 불리 쉽게 꺼지니 부귀(富貴)가 영원하지 못하고 기를 쓸 수 없는 터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터에서는 마땅히 화(火)가 토(土)를 얻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대개 토(土)는 비록 화(火)를 극(剋)하지만 화(火)는 토(土)에서만 머무를 수 있다. 수와 화가 만나면 수(水)가 주(主)가 되고 화(火)가 왕(旺)하면 즉 물을 끓여 삶는 전살(煎殺)의 해(害)가 있고, 화(火)가 주(主)가 되고 수(水)가 왕(旺)하면 즉 꺼트리는 우환이 있다. 그러므로 화(火)가 강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② 입수화(入水火): 화(火)가 수각(水脚)을 대(帶)하고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다. 이처럼 화(火)가 크고 수(水)가 작으면 부귀(富貴)하고 즐겁다. 그러므로 화 가운데서 걸출한 인물이 나는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부귀(富貴)와 쾌락(快樂)있는 터가 된다. 수화기제(水火旣濟) 부귀(富貴)의 터가 된다. ⓷ 기제화(旣濟火): 수성과 화성이 서로 흥하는 터 화성산 아래에 연못이 이 있고 연못을 따라 내려가 화성산이 생(生)한다. 또한 연못의 언덕(池岸)이 깨진 곳은 첨(尖)이 있어 불꽃인 화염(火焰)이다. 이 이름을 기제화(旣濟火)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산을 수화기제(水火旣濟)라 한다. 수화기제(水火旣濟)는 지극히 윤택하고 지극히 순수하다. 녹성의 기운이 기이함(奇)을 생(生)하고 문무(文武)로 대귀(大貴)하다. 따라서 이러한 연못은 산인 용(龍)을 기르는 양룡(養龍)의 연못(池)이 된다. 화성(火)의 성질은 마르고(燥) 수성(水)의 성질은 습(濕)하다. 그러므로 둘이 만나야 윤택(潤)하다. 화성은 (火)는 강(剛)하고 수성(水)는 유(柔)하다. 그러므로 둘이 만나야 순수(粹)하다. 그러므로 두 화성의 녹성(祿星)이 두 연못(雙池)을 끼고 있으니 지극히 대귀(大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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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0회...가목화(架木火): 나무를 태우는 화성산[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0회 4. 가목화(架木火): 나무를 태우는 화성산 ➀ 가목화(架木火): 목성산(木山) 몸 위에 화성(火星)이 걸려있다. 또한 목성(木星)의 몸(身)위에 뾰족한 봉우리가 나와 불꽃을 만든 것이다. 목성산의 문(文)이 수려(秀)하고 비록 좋아도 화(禍)의 근본이 있으니 화(禍)가 있다. ➁ 가목화(架木火): 누워있는 면목(眠木)위에 화(火)기 있다. 목성의 문성(文星)을 짊어지고 있으니 화의 녹(祿) 기운이 스스로 문성의 명성을 멀리 전파한다. 목화통명(木火通明)이다. 면목(眠木)의 또한 평강 위에서 첨(尖)한 석(石)이 나와 문성을 짊어지고 있으니 마땅히 길(吉) 하다. 한회음조분(韓淮陰祖墳)위의 산도는 한회음조분(韓淮陰祖墳)이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높이 솟고, 정절(旌節)과 진지가 있으니 무관의 기상이 나온다. 이곳이 회음 한신의 조분(祖墳)인데 만고의 한서(漢書)에 이름이 남았다. 황반(黃斑) 골짜기의 안길이 더디기만 하구나. 일찍 일어나는 행인은 해 저무는 것을 두려워하고, 신선의 미묘한 조화는 볼 수 없으니, 누가 돌을 가리켜 양의 발굽을 알겠는가? 발휘왈(發揮曰): 채원정 이 터는 용(龍)으로 말하면 목화가 서로 혼잡한 목화상잡(木火相雜)이고, 혈(穴)로 말하면 수화가 서로 혼잡한 수화상잡(水火相雜)이다. 불길(燒)이 극하여 삶으니 자연 유방(劉)에게 살육(殺戮)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화상잡과 수화상잡이 발(發)하여 죽임(殺)을 주관하니 그것이 패(敗)하게 되며 역시 살(殺)을 주관한다.무릇 화(火)가 왕(旺)하고 토목수(土木水)가 약하기 때문에 대귀(大貴)하나 대화(大禍)가 있고, 직책(職)은 이것으로 인한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우연히 이 산도를 얻어 여기에 부치니 옥수진경에서 말하는 증험(驗)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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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3회...단종 유배지 한(恨) 많은 청령포(淸泠浦)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3회...단종 유배지 한(恨) 많은 청령포(淸泠浦) [한국풍수신문] 청령포는 1457년(세조 3) 숙부인 세조(世祖)에 의해 노산 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된 단종[端宗ㅡ조선 제6대 왕(1441~1457)의 유배지이다. 주변의 지형 지세는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쪽ㆍ북쪽ㆍ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환포를 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영조가 1763년(영조 39년)에 ‘단묘 재본부 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 써서 내린 비석과 금표비.망향탑.관음송...등이 있다. 노송들이 한 많은 한(恨)을 안고 유명을 달리한 단종을 향해 읍하고 또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듯한 자세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후대에 건축한 처소(處所)도 지형 지세로 봐서는 동향(東向)을 해야 하나 오매불망(寤寐不忘) 자신의 왕 자리를 향한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