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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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9회[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9회 2. 행지화(行地火): 평양지로 내려와 들판을 태우는 화성산 ➀ 행지화(行地火): 땅으로 낮게 지나가는 행지화(行地火)는 동,서,남,북, 종,횡(縱橫)으로 불꽃이 잘게 부서지고 지각(脚)이 뾰족하여 모두 불꽃의 머리가 있다. 이러한 화성은 전신(全身)이 화(火)이기 때문에 화(火)가 너무 왕(旺)하다. 또한 전부가 화로 변환(變換)이 없기 때문에 귀(貴)한 가운데 흉화(凶禍)가 있다. ➁ 행지화(行地火): 화성산이 들판으로 내려와 전답(田畓)을 만든다. 이것은 화성이 낮은 산으로 내려와 땅으로 행(行)하여 논밭을 만들고 아름다운 요성(曜星)을 만들었다. 화성이 이미 가장자리가 꺾이어 부러지니 밭(田) 역시 이로움이 있다. 즉 화(火)가 수기(秀氣)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터는 감사(監司)가 나오고 대부대귀(大富大貴)하다. 또한 터의 양 옆에 수려한 봉우리가 서로 대하여 끼고 보좌하고 있으니 터가 더욱 귀(貴)한 것이다. 3. 소목화(燒木火): 나무를 태우는 화성산 ➀ 소목화(燒木火): 나무를 태우는 화(火)로 목성이 땅에 붙어있고 화(火)가 두르고 붙어서 나간다. 나무(木)를 태우는 화(火)이다. 복(福)도 작고 화(禍)도 작다. ➁ 소목화(燒木火): 목성(木星)이 지나가며 화성(火)을 만나 불사름을 당하여 화(禍)를 당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화성은 목성 아래 있으니 화(禍)가 된다. 또한 화가 강하고 목이 약하면 화(禍)가 된다. 그러나 만약 화성(火星)이 지나가고 목성(木)을 만나면 화(火)가 목(木)을 얻어 빛이 나므로 좋다. 그러므로 목성과 화성에서는 목성이 강해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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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8회...이천서씨 시조 서신일의 묘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8회...이천서씨 시조 서신일의 묘 [한국풍수신문] 서신일의 묘는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번지에 있다. 효양산 정상 부근에 있어 천혈이다. 높은 곳에 있지만 앞쪽에 물이 나와 논이 있었던 곳인데 현재는 연못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나무꾼과 사슴 전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보국과 입수룡이 잘 갖춰진 곳이다. 어찌 높은 산에서 이런자리를 찾았는지 우리 선배들의 높은 안목에 감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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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2회... 정종 태실비(正宗 胎室碑)와 공자 명당론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2회... 정종 태실비(正宗 胎室碑)와 공자 명당론 ■ 정종 태실비(正宗 胎室碑)와 공자 명당론 [한국풍수신문] 태실은 왕이나 왕족들의 태반을 묻는 석실무덤을 말한다.산수(山水)가 어우러지면서 사세가 잘 갖춰지고 지기가 취적(聚積)된 곳에 태반을 묻을시 건강은 물론 장수한다는 풍수설에 기인해 산수가 빼어난 곳을 찾아 묻고 이름도 태봉산으로 명명(命名)하죠. 정조대왕의 태실이 있는 산은 강원도 영월읍 동쪽에 닭의 발을 닮았다는 계족산(鷄足山-890m)인데 개발로 인해 본래 자리가 아닌 과룡지처에 쓸쓸히 있다.일찍이 공자 선생은 명당(明堂)의 풍수관에 대해 말하기를ᆢ. 1.산사태가 안날 자리. 2.수맥지가 아닌 자리. 3.동물이 훼손 안 할 자리. 4.개발되지 않을 자리. 5.후손이 팔아 먹지 못할 자리.가 명당이라고 했다. PS [정조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영월읍 정양리 계족산(鷄足山)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에 조성되었고, 1800년 가봉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구실로 전국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니 정조대왕 태실에서도 태 항아리를 꺼내 갔다. 6.25전쟁 이후 석회 비료 광산의 개발로 파괴·매몰되었던 것을 1967년 수습하여 영월읍내 금강공원의 KBS방송국 안으로 옮겨 놓았다가, 본래 자리에 석회석 광산과 송정탑이 들어서는 바람에 현재 위치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태실석함 등 태실조성에 사용된 석재와 태실비가 있고, 본래 태실이 있던 정양리에도 일부 석재들이 남아 있다. 태실비는 전면에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육년십월이십칠일건(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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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8회[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8회 2. 화성(火星)(祿星) 1) 화성(火星)은 산꼭대기가 불꽃(焰)처럼 뾰족하고 높게 일어나 수려하다. 2) 화성(火星)은 높은 산에도 있지만 옅은 산에도 있다. 3) 화성(火星)은 목성(木星)과 만나 나무를 태우면 빛을 발하여 문관(文官)의 기운이 있고, 금성(金星)과 만나 쇠를 녹이면 도검(刀劍)을 만들어 무관(武官)의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화성(火星)의 기운은 문관과 무관을 만드는녹봉(祿俸)의 기운이 된다. 4) 화성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나 장군의 기운과 제왕의 기운을 이루려면 화성이 있어야 한다. 5) 뾰족한 불꽃인 염(焰)은 파쇄되지 않고 단정해야 한다. 6) 그러므로 오직 면이 단정하고 둥근 것을 취하고 파쇄된 염은 취하지 않는다. 7) 만약 불꽃이 높고 ,몸(身)이 파쇄(破碎)되면 역시 화성(火星)이 병과 고달픔을 생(生)한다. 8) 화성은 홀로 첨(尖)하고 염(焰)이 없는 이것을 제 일로 여긴다. 9) 만약 두 개가 첨(尖)하고 세 개가 첨(尖)하면 역시 아름답다. 10) 그러나 또 염(焰)이 나온 것이 많으면(無數) 역시 완전한 길(吉)이 아니다. 1. 염천화(焰天火): 하늘 높이 단정하게 솟아있는 화성산 ➀ 염천화(焰天火): 하늘 높이 단정하게 솟아 있는 화성산인 염천화 (焰天火)는 단정하게 높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성산은 제일 귀(貴)하고 녹의 기운(祿氣)이 모여 이루어져 있어 대귀(大貴)하고 복(福)이 있다. 화성산을 볼 때는 봉우리가 파쇄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봉우리가 단정하게 솟은 것을 제일로 한다. 일반적으로 화성산은 불을 주관하여 화(禍)를 불러온다고 말하나, 이처럼 화성산이 수려하면 화재(禍災)가 없고 귀(貴)가 있어 화재(禍災)를 피할 수 있는 터가 된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택지에는 화성산 바로 아래에 터를 정하면 불가하고 떨어져 터를 잡아야 한다. ➁ 염천화(焰天火): 화성산은 하나의 봉우리가 일어나야 제일 귀하다. 그러나 면(面)이 파쇄(破碎)되지 않고 정상에서 3개의 화성의 봉우리가 일어나면 이것이 두 번째로 귀하며 녹(祿)과 귀(貴)의 기운이 있다. 이처럼 화성의 끝 봉우리의 불꽃이 세 개로 나누어지면 삼태(台)도 아니고 화개(蓋)도 아니다. 산정상(山頂)이 둥글고 높으면 양 어깨를 바르게 나누면 보개(蓋)가 되고 산정상이 화성이고 양 어깨가 화성으로 어깨를 바르게 나누면 화개(華蓋)가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삼태(三台)는 평지(平地)에서 세 개의 봉우리가 일어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염천화는 정상에서 삼봉(三峰)이 일어난 것이 다르다. 평지에서 일어난 삼태(三台) 역시 녹(祿)과 귀(貴)가 있으니 기운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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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7회...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한 축을 형성한 김병학과 김병국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7회...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한 축을 형성한 김병학과 김병국 [한국풍수신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조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김조순을 비롯한 세도정치 세력의 계보를 추적해 보면 모두 한 사람으로 연결되고 있다. 바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이다. 김창집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아들로 여섯명의 형제(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가 모두가 뛰어나 6창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김창집의 후손들이 뛰어났는데, 고손자가 바로 김조순이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사촌, 6촌 형제들이 세도정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특이하게도 김창집의 후손이 아닌 김창협의 후손에서 현달한 가문이 보이는데, 바로 김수근(이조판서)과 그의 아들 김병학(영의정), 김병국(영의정) 형제이다. 그중에 김병학은 다시 김준근의 양자로 가고 있어 별개처럼 보인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상헌(좌의정)-김광찬-김수항(영의정)-김창협(대제학)-김숭겸-김원행-김이직-김인순-김수근(이조판서)-김병학(영의정)과 김병국(영의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조순과 김수근, 김병학, 김병국등은 촌수가 멀어도 너무 먼 사이로 벌어져 있는데, 어떻게 세도정치의 한복판에 자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김창집의 손자인 김원행이 김숭겸의 양자로 입적하게 되고, 김창집의 고손자이자 김조순과는 6촌인 김인순이 다시 김이직의 양자로 오게 된 이유가 크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김원행과 김인순이 모두 김창집의 직계 후손으로, 안동김씨 세도정치 세력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수근이 이조판서를 역임할 수 있었고, 그의 두 아들이 영의정에 올라 세도정치의 마지막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에 영의정에 올랐으니, 세도정치의 영향만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어려운 시기에 그를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김병학과 김병국의 묘를 찾아보고 답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1979년에 발굴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안산의 반월공단 개발로 인해 그들의 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발굴상황을 정리한 『경기도 반월지역 안동김씨 분묘발굴조사보고서-김병국, 김수근 일가묘』가 출간되어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에는 묘소 전체를 촬영한 사진은 없고, 부분적인 모습만이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묘소를 발굴했던 온양민속박물관에 김병학과 김병국 그리고 김수근 묘의 석물을 가져다 가묘로 조성해 놓아 아쉬움을 달래 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무덤에서 수많은 옷가지가 그대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시신의 부패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라의 상태로 있었던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들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화장되어 뿌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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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 풍수이야기 6회...안동김씨 광주목사 김이기의 묘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 풍수이야기 6회...안동김씨 광주목사 김이기의 묘 [한국풍수신문] 김이기의 묘는 양평군 개군면 향리 41-2번지에 있다. 김이기의 아들은 공조참의 김용순과 이조참판 김명순이다. 그런데 김용순은 자식이 없어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판중추부사)을 양자로 잇는다. 안타깝게 김유근도 자식이 없어 좌의정 김홍근의 아들 김병주(이조판서)로 대를 잇고있다. 반면에 김명순은 김이경에게 양자로 갔는데, 아들 셋을 두고있다. 김홍근은 좌의정을 김응근은 공조판서를 김흥근은 영의정을 지낸다. 김홍근은 병연(승지)과 병주(이조판서)를 두는데, 병주는 김유근의 아들로 양자를 간다. 김응근의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김병시이고 김흥근의 아들은 김병덕으로 좌의정을 지낸다. 김이기의 묘는 횡룡입수해서 혈을 맺어 편안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김용순이 후손을 이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지만 김명순은 후손들이 현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를 우리 풍수인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후사가 이어지지 않았으니 나쁘다. 높은 벼슬에 올랐으니 좋은 자리다 하는 단편적인 사고만으로는 현대인들을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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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0회... 조순 선생의 생가 터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0회... 조순 선생의 생가 터 [한국풍수신문] 양택지(陽宅地)의 조건(條件) 예전부터 양택지(陽宅地)와 양택에 있어 말하기를 1.배산임수(背山臨水-뒤는 산 앞은 물이 흐름) 2.전착후관(前窄後寬-집앞은 좁고 뒤는 넓음) 3.전저후고(前低後高-집 앞은 낮고 뒤는 높음)를 [한국풍수신문] 양택의 3대 요소라 하는데 여기 그러한 3박자를 손색없이 다 갖춘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다름 아닌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472의 조순 전 경제부총리 겸.서울시장의 생가 터다. 집의 주산은 금성체의 산으로 아주 다정스럽게 집을 감싸 안았고 집의 입구는 좁은 반면에 문을 들어서면 널다란 정원과 뜰이 나온다. 집은 조당보다 높아 물의 침범이 있을 수 없었고 집터는 기운이 소천서사를 지나 안방을 통해 뚤방에 멈추어 서니 어디 흠잡을 데가 없다. 재물을 뜻하는 물은 1차로 집 앞의 조당에 쌓인 물 2차로 도로. 3차로 집 앞으로 흐르는 냇가 물로 재물 또한 풍족하고 인정(人丁)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안산(案山)도 옥대사(玉帶砂)로 과갑(科甲)하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그래도 흠을 잡아 본다면 집을 감싸는 뒷산이 아담하지만 생각보다 높지 않고 조당에 비해 집터가 그리 높지 않아 기개에 조금 약함을 보일 것 같다. 권력 쪽에서도 강하지 못하고 밀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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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7회...하탄수(下灘水): 아래로 떨어져 모래톱처럼 생긴 수성산[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7회...하탄수(下灘水): 아래로 떨어져 모래톱처럼 생긴 수성산 14. 하탄수(下灘水): 아래로 떨어져 모래톱처럼 생긴 수성산 15. 행지수(行地水): 땅으로 강하게 지나가 흙을 쓸어버리는 수성산 탄(灘)은 여울가 모래톱을 말한다. 이러한 수성산이 국세를 이루고 명당 앞에 있으면 이는 명당의 기운을 가로막아(攔)주니 좋은 기운을 나타내며, 홀로 떨어져 나와 있으면 흉하다. 이러한 형태의 수성산을 하탄수(下灘水)라 한다. 그리고 땅으로 수성산이 강하게 지나가 흙을 쓸어버리는 산을 행지수(行地水)라 한다. ➀ 높은 고산(高山)에서 낮게 수성산이 내려오고 그 아래에 모래톱 처럼 산이 막고 있는 수성산 이다. 하탄수(下灘水)는 낮은 수성체의 산이 높은 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높은 고산(高山)의 수(水)가 아래로 마치 개여울(灘)이 기운 것처럼 양 옆에 두 개의 산맥이 내려오니 청수(淸秀)하고 귀한 터를 만든다. ➁ 이러한 하탄수는 높은 산이 아래로 넘어져 떨어져 평야(平野)로 홀로 나온 수성산이다. 청수(淸秀)하게 보이나 옆에 따르는 호종의 산이 없으니 귀(貴)한 터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터는 외로운 사람이 나오고 부인이 과부가 된다. ➂ 수성(水星)의 수기(秀氣)가 수척하게 말라 있으나 수성이 강하여 터의 작은 토성이 견디지 못하고 쓸려 내려가 흙탕물이 된다. 이처럼 수성이 강하고 토성이 약한 터는 집이 가난하고 우환이 있어 고향을 떠나 멀리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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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6회...쉬금수(淬金水): 금을 담금질하여 기물로 만드는 수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6회...쉬금수(淬金水): 금을 담금질하여 기물로 만드는 수 13. 쉬금수(淬金水): 금을 담금질하여 기물로 만드는 수 수(水)와 금(金)은 금생수(金生水)로 부귀를 나타낸다. 특히 금을 불로 녹이면 기물을 만들 수 있고, 달궈진 금을 물에 넣으면 더욱 강한 기물을 만들 수 있다.처럼 불로 달궈진 쇠를 물에다 넣어 담금질 하는 수를 쉬금수(淬金水)라 한다. 그러나 화가 너무 강하면 금을 완전히 녹여버리니 조심해야 한다. ➀은 화성산에서 금성산이 락(落)하여 평양지에 떨어져 수각(水脚)을 두르고 있는 산이다. 이는 금(金)를 화(火)로 달구어 물(水)에 담금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물을 만드는 수(水)인 쉬금수(淬金水)가 된다. 만약 금성(金星)만 있고 수(水)가 있으면 도금수(淘金水)가 된다. 이러한 수(水)는 특별히 수려(特秀)하니 자연 귀(貴)가 나온다. ➁는 화성산아래 화성산이 락(落)하여 금성산을 만들고, 수가 약하게 두르고 있어 화의 기운이 강하여 금(金)이 화(火)에 상(傷)하니 온화(瘟火)의 화(禍)가 있다, 비록 수(水)를 얻고 금(金)을 담금질하니 수려한 기운이 있다. 만약 금(金)이 화 가운데에 있고 그 아래 수(水)가 적당하게 있으면 반대로 수려한 기운이 나온다.그러나 이처럼 금(金)은 본래 화(火)의 극(剋)을 두려워하는데 만약 화가 커서 금(金)이 불에 녹으면 소멸(消滅)한다. 이러한 형(形)을 보면 반드시 온화(溫火)를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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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5회...세종대왕의 영릉 자리에는 원래 이계전의 묘가 있었다.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5회...세종대왕의 영릉 자리에는 원래 이계전의 묘가 있었다. [한국풍수신문] 세종대왕의 영릉은 명당으로 유명한 것 만큼이나 여러 말들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말이 광주이씨 우의정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영릉자리에는 원래 이계전의 묘가 있었다. 이는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7일자에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배경에는, 지창룡의 『한국지리총람』 명당찾아 삼천리(1977, 295-302쪽)에 기록된 내용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지창룡은 원래 이곳에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 터를 잡아준 지관이 다리를 놓지 말고 재실도 짓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고 다리와 재실을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영릉터를 찾으러 왔던 지관들이 비를 피하러 재실에 와서 이인손의 묘가 명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영릉터로 정하게 되었다는 그럴싸 얘기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왕릉 터를 정하고자 할 때는 여러 후보지를 정하고 상지관과 대신들이 함께 답사를 하여, 최종 후보를 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기 때문이다. 지창룡 선생의 말처럼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선 재실에서 보고, 즉흥적으로 정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창룡 선생은 전혀 터무니 없는 말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인손의 무덤은 세종대왕의 영릉 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8일자의 기록에 따르면, "이인손(李仁孫)의 분묘(墳墓)는 이계전(李季甸)의 분묘 옆에 있다”고 조금은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월 1일자에는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은 영릉의 청룡(靑龍) 북쪽에 있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8일자에는 "천장(遷葬)할 때를 당하여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치서(馳書)하여, 그 아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극배(李克培)를 부르고, 행 호군(行護軍) 송문림(宋文琳)으로써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이극배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었는데 영릉을 천장하게 되면, 이인손의 묘도 아울러 이장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극배를 대신해서 송문림이 그 자리를 대행토록 조치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조선왕조실록』에 분명하게 기록된 내용을 애써 외면하고, 근거가 부족한 특정인의 말에 의존한 주장은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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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9회... 명주군왕릉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의 묘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9회... 명주군왕릉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의 묘 ■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묘 [한국풍수신문] 명주군왕(溟州郡王)인 김주원(金周元)은 신라태종 무열왕의 5대손으로 ,선덕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당시 시중 겸 병부령인 김주원(金周元)은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 쟁탈전에 패하여 785년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한편 김경신은 김주원을 무마하고자 786년(원성왕 2)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명주 관하의 3개 군과 1개 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PS 명주군왕(溟州郡王)인 김주원(金周元) 묘는 조선 선조(1552~1608) 때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김첨경(金添慶.1525~1583)은 강릉부사 재임 시,김주원(金周元) 의 현몽(現夢)으로 선대(先代)부터 실전(失傳)된 시조 묘소를 찾기로 결심하여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 끝에 지금의 자리를 찾았는데 발견할 때 능묘(陵墓)앞과 사면은 돌로 만든 층계가 있었고, 그것의 네 모퉁이에는 1척 남짓한 돌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무덤 속에서 유해를 담은 백사(白沙) 항아리가 나왔는데,그 뚜껑에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8c후반 ~9c초의 무덤이 700년이상 실전되었다가 각고의 노력끝에 찾아낸 묘이기에 본래의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에는애매하다. 명주군왕(溟州郡王)묘의 좌향은 갑죄경향(甲坐庚向)에 파구는 신파(申破)다. 양공의 88향법으로 보면 향상(向上)으로 임관방(臨官方)을 충파하는.살인대황(殺人大黃泉)으로 대흉이다..살인대황(殺人大黃泉)은 다 큰 아들이 상(喪)을 당하고 패절(敗絶)하고 절름발이. 피부병. 혈압. 노질. 토혈.ᆢ등의 증세가 있으며 먼저 차남 집이 상(傷)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고 하니 극히 조심해야 할 수법이다. 하지만 700년이상 실전되었다가 복원한 묘이기에 지형지세가 변했을수도 있고 조성시 점혈과 재혈이 다를수가 있어서 취기처와 좌향.파구등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좀 그렇다 현재의 취기처에서 본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에 신유분금(辛酉分金). 파구는 신파(辛破)로 하면 용진혈적.천간자 파구.백보전란.으로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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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5회...도토수(淘土水)흙을 기름지게 하는 수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5회 11. 도토수(淘土水): 흙을 기름지게 하는 수 수(水)와 토(土)의 관계는 일반 오행론(五行論) 에서는 토(土)가 수(水)의 물길을 막으니 토극수(土克水)가 된다. 그렇지만 자연에서는 적당한 물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이것을 수토회(水土會)라 하여 부귀(富貴)를 나타낸다. 그러나 작은 흙에 물이 강하면 물은 흙을 쓸어내려가고 흙탕물이 되어 흉(凶 )이 된다. 그러므로 토와 수의 건계 역시 강약을 고려해서 그 길흉을 예측해야 한다. ➀은 흘게 물을 대는 수로 흙을 기름지게 하는 수성이 된다. 토성산이 내려오고 양 변에 수성산이 끼고 있어 마치 둥근 수성의 지각이 나는 것 같다. 이처럼 토성산을 따라 가는 수성산이 진정한 도토수(淘土水)가 된다. 이는 토성인 흙에 물이 있으니 참된 흙이 되어 부귀(富貴)가 넉넉한 터가 된다. 단지 수성이 너무 강하면 흙탕물이 되어 나쁘니 토가 세력이 강해야 한다. 그러나 금성산 곁에서는 수성산이 강해도 무관하다. 토(土)의 복(福)은 후부(厚)하고 중(重)하며 재(財)는 실(實)하고 녹봉(祿)이 가볍다. 그러므로 이러한 터에서는 경감(卿監)이 나오는데 그친다. ➁는 연못 가운데 있는 토성산으로 물 속에서 흙을 기름지게 하는 수성이 된다. 이것은 토성산(土)이 참된 물을 얻었다. 그러므로 청(淸)하고 수기(秀氣)의 순수함과 깨끗함(精粹)을 얻는다. 이것은 수중(水中)에서 토성(土)을 생(生)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모두 돌로된 산이라야 마땅하다. 만약 흙이라면 진수(眞水)가 그 토(土)를 씻어 내려 아름답지 못하다. 토성산(土)은 후덕하고 수성산(水)은 청(淸)하기 때문에 수려한 기운을 얻는다. 이러한 터는 부(富)한 가운데 현인(賢)이 나와 세상에 이름이 뒤덮는다. 12. 도금수(淘金水): 금을 씻어 빛이 나게 하는 수 오행 상생상극에서 오지 수(水)와 금(金)의 관계만이 상생이 된다. 하늘의 오성 역시 태양을 기준으로 제일 먼저 탄생하는 것이 수성이고 그다음이 금성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태양은 왕이 되고 수성은 왕비가 되며 금성은 금성과 수성이 처음으로 만나니 새로운 창조를 나타내며 이를 금수상간(金水相間)이라 부른다. 이는 청수한 귀가 나타난다. ➀ 도금수(淘金水)는 수중(水中)에서 금을 씻어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금성산의 양방(兩傍)에 수성이 평지(平地)로 붙어 있어 평평하며 수(水)를 두른(帶) 것이다. 마치 물로 금(金)을 씻어 얻으니 마땅히 청수하고 귀(貴)가 나타난다. 금(金)은 본래 무성(武星)이고 수(水)를 얻으면 수려(秀)하다. 그러므로 시종(侍從) 감사(監司)에 이른다. ➁ 도금수(淘金水)는 물(眞水) 가운데 금성산(金山)이 있는 것이다. 수(水)는 본래 금(金)을 생(生)하니 사물의 이치가 순(順)이 된다. 그리고 물이 금을 씻으니 유익함(益) 이 드러난다. 금은 수(水)가 아니면 그 광채(光彩)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벼슬하는 사람이 나오고 자연히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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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4회...안동김씨 세도정치와 음택풍수(김조순의 묘)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4회...안동김씨 세도정치와 음택풍수 [한국풍수신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조순(1765-1832)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 김조순도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집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명문가로 자리하고 있었다. 김상헌(좌의정)-김광찬(동지중추부사)-김수항(영의정)-김창집(영의정)-김제겸(사복시첨정)-김달행(처사)-김이중(서흥부사)-김조순(영안부원군)-김좌근(영의정)-김병기(이조판서)로 이어지는 그의 가계도가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조카와 삼촌 그리고 더 넓은 범위의 친족들이 세도정치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창집의 묘) 대표적인 인물로 김문근(철종의 장인)과 김조근(헌종의 장인), 김병학(영의정), 김병국(영의정), 김영근(판돈녕부사), 김유근(판돈녕부사)등이 있다. 거대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들의 묘소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먼저 문인석이 없다는 것이다. 세도정치의 뿌리를 내린 김조순을 비롯하여 그들의 조상산소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미관말직을 지낸 양반가에서 흔하게 보는 문인석이 없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의 묘) 두 번째 와혈에 무덤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헌을 비롯하여 김창집, 김제겸, 김달행, 김조순, 김좌근, 김병기, 김문근등의 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셋째는 묘비석을 정면 혹은 측면에 세우고 있다. 묘비석의 형태도 같은데 거의 모든 안동김씨 묘역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본인의 벼슬과 합장한 부인들의 이력을 밝히고 있다. (김달행의 묘) 넷째는 남양주와 여주, 이천 등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거의 부드럽게 탈살한 야산자락을 선택하고 있다. 험하거나 강한 지세에는 조성하지 않았다. 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그 집안의 가풍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세도정치를 뿌리내린 김조순의 경우 굉장히 치밀하지만 겸손하고 치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이중의 묘) 얼마든지 맡을 수 있었던 정승을 맡지 않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요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비변사의 2인자의 자리를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의 특징적인 모습이 와혈에 무덤을 조성하는 경향과 부합하고 있다. (판돈녕부사 김연근의 묘) 또 다른 특징으로 부드럽고 순한 야산자락에 자리한 그들의 묘역도 역시나 부드러운 성품으로 나타나 적을 만들지 않고자 하는 성향과도 부합하는 모습이다. 권력의 중심에 있다 보면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과 적대적인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데,이를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성향과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격함에서 오는 많은 문제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화려한 분묘조성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이를 정립하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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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4회...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4회 10. 발화수(潑火水): 강한 불에 물을 뿌려 불을 도와주는 수와 불을 끄는 수 일반 오행에서는 물은 불을 극하니 물과 불이 만나면 흉(凶)이 된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불이 강하게 타오르는데 물을 뿌리면 불이 더 강하게 타오른다. 이와 반대로 불이 약한데 강한 물을 뿌리게 되면 불은 커지게 된다. 이러한 수를 발화수(潑火水)라 하고 이것이 일반 오행과 자연의 오행이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물과 불이 만나면 어느 쪽이 강하고 약한가에 따라 그 길흉을 판단해야 한다. ➀ 발화수(潑火水)는 불의 기운을 강하게 만드는 수성산이다. 이 발화수(潑火水)는 수(水)가 화(火)의 머리(頭)위에서 일어난다. 본래 수(水)는 불(火)을 꺼트리니 수극화(水克火)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무릇 화기(火氣)가 울창하게 찌면(鬱篜) 즉 자연히 수(水)를 만든다. 그러므로 화능생수(火能生水)라 한다. 이처럼 화(火)는 능히 수(水)를 생(生)하니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순천지리(順天之理)의 이치로 발화(潑火)라 이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산의 형상은 매우 귀(貴)하다. 화(火)는 본래 녹봉(祿)을 주관하고 수려한 기운(秀氣)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산은 대귀(大貴)하다. ➁ 발화수(潑火水)는 불을 꺼트리는 수성산이 된다. 만약 수(水)가 많고 화(火)가 작으면 즉 길흉(吉凶)은 서로 나빠진다. 또한 먼저 화(火)가 있고 뒤에 수(水)가 있으면 수(水)는 화(火)로 인해 생(生)하니 이치가 역시 순(順)이 된다. 그러나 만약 먼저 수(水)가 있고 뒤에 화(火)가 있으면 앞에 있는 수(水)는 진수(眞水)가 되어 수(水)가 화(火)물을 뿌리게 되어 꺼진다. 그러므로 흉(凶)이 된다. 게다가 화(火)를 양수(兩水)가 전후(前後)에서 서로 끼고 중간에 하나의 화(火)가 있다면 수(水)가 화(火)를 이기게 되어 반드시 흉화(凶禍)가 그 사이에 생긴다. 그러므로 이는 자연의 이치로 헤아려야 한다. 이수(二水)가 일화(一火)를 끼면 화(火)는 반드시 이기지 못하니 비록 수(秀)하고 귀(貴)하나 역시 흉화(禍)의 터(基)가 된다.비록 천심(穿心) 정출(正出)하여 이미 귀(貴)하고 수(秀)해도 벼슬살이를 하나 많이틀어져서 어긋난다(齟齬). 혹 강하고 괴팍하여 큰 화를 당한다. ➂ 발화수(潑火水)는 수성산과 화성산이 서로 섞여 혼잡하여 흉한 수성산이 된다. 수성산과 화성산이 서로 섞여 혼잡하여 흉한 수성산으로 벼슬에 나가 장원이 되어도(遭章) 빈부(貧富)와 재앙(災)으로 상처를 받는다. 또한 터에 이르러 수성체의 터에 주위가 강한 화성이니 가운데 수성은 불에 의해 끓어버려 후일에 벼슬에 나가도 삶아 죽음을 당하는 괴롭힘이 있고 평이하게 있어도 재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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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3회...윤선도의 세연정한국풍수신문,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3회...윤선도의 세연정 윤선도의 세연정 세연정은 윤선도가 맘껏 인생을 즐긴 곳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정자를 건설하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즐긴 곳이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말년에는 낙향하여 해남종택과 보길도를 왕래하며 살았는데, 더 할 수없는 풍류를 즐긴 것이다. 조상들이 물려준 만석지기 재산과 본인이 올랐던 참의 벼슬이 큰 힘이 되어준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의 풍수실력도 한몫하게 되는데, 절묘한 터잡기에 공간구성을 이루어 내고 있다. 하지만 남부지방의 가뭄은 세연정 연못의 물도 바닥을 드러내게 하고 있다. 빨리 비가와서 주민들의 가뭄도 해갈하고 세연정 연못도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기 바란다. 이곳은 비봉귀소형 혹은 갈마음수형등으로 혈명을 정할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