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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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0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90회 9) 금목토(金木土)의 조화로 공경(公卿)이 나오는 터 【1】 조산의 금(金)에서 금(金)으로 락(落金)하여 보개성(蓋星)이 되었다. 【2】 보개성에서 목(木)이 뚫고 내려와 높게 솟아 수려(聳秀)하고 아래에 다시 화개삼태(蓋蓋三台)가 있으니 그 귀(貴)가 가히 수려하다. 【3】 그리고 다시 일토(一土)로 변(變)하여 목(木)을 배양(培)하고, 일토(一土)를 앞으로 전(傳)하여 금(金)을 생(生)하니 토산(土山)에서 연(連)이어 세 개의 금(三金) 나오고, 그런 연후에 금(金)으로 앞으로 나아가 터를 만들었다. ☞ 이 터는 조화(造化)가 갖추어져 귀(貴)와 수(秀)를 얻은 땅이다. ☞ 반드시 태어난 사람이 청수(淸秀)하고, 문장(文章)으로 과제(科第)하여 나라에 신명을 바쳐 지위가 공경(公卿)에 이른다. ☞ 그 차례는 먼저 나아가 무직(武職)을 받들고(金), ☞ 집이 거부(巨富)에 이른 후에 뛰어난 아들이 나오고(土), ☞ 귀(貴)한 자손(孫)을 낳으니 바야흐로 공경의 지위(卿位)에 오르고(華蓋) , ☞ 물러나 개성(蓋星)에 이르니 지위가 공상(公相)에 이른다(寶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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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9회 ...정순왕후의 조부 송복원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9회 ...정순왕후의 조부 송복원의 묘 송복원의 묘는 서울 서초구 우면동 송동마을에 있다. 이 곳에는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어머니 민씨와 조부등 여러 기의 묘가 산재해 있어 송씨네 선산인 셈이다. 현재는 그린벨트로 개발이 제한되어 있으나 앞으로 개발 될 여지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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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9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9회 8) 금목금(金木金)의 조화에 목(木)이 강하고 수토(水土)가 없어 자손(子孫)이 비록 귀(貴)하나 수(壽)가 없는 터 【1】 조산에서 금성(金)의 보개(寶蓋)가 금(金)을 낙(落)하여 매우 귀하다. 【2】 아래로 목성(木)의 보개(寶蓋)가 스스로 생(生)하여 3개의 목(木)을 앞으로 전하니 목(木)이 왕(旺)하고 수려(秀)하다. 【3】 그리고 낙(落)하여 반듯한 일자문성(一字文星)이 되고 다시 나아가 금(金)이 되어 터가 되었다. ☞ 전체적으로 많은 무리의 목(木)이 금(金)을 압(壓)하고 있어 금(金)은 비록 썩지 않고(朽) 멸(滅)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다. ☞ 이것이 무직(武職) 드러나지 않고 가라앉는 까닭이다. ☞ 그러므로 이 터는 지금 수토(水土)가 없어 흠결(欠缺)이 된다. ☞ 그러므로 일절은 금(金)이 무성(武星)이 되니 무직(武職)에 그친다. 그러나 수토(水土)가 있어 후룡으로 물러나 문성(文星)에 그치면 즉 응당 태어난 사람이 청수(淸秀)하고, 수려한 목(秀木)에 이르면 과명(科名)이 스스로 드러난다.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나 화개성(蓋星)에 이르니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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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8회... 아산 전윤장 묘(牙山 全允臧 墓)(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8회... 아산 전윤장 묘(牙山 全允臧 墓) 전윤장( 全允臧)은 고려 충혜왕에서 공민왕대에 활약한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천안.이다.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상호군으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분묘의 형태는 고려후기 세족계층 분묘의 일반적인 형태인 방분으로 4면에 장대석으로 된 2단의 호석(護石)으로 둘렀다. 방분의 규모는 318(전면)×379(측)×140(높이)cm이며 호석의 크기는 부정형이다. 우측 문인석 규모는 153(높이)×40(가슴폭)×30(두께)cm, 좌측 문인석 규모는 117(높이)×35(가슴폭)×26(두께)cm이다. 문인석은 얼굴을 바로 들어 당당한 자세이고, 근엄한 인상을 주며, 눈썹은 표현되지 않았다. 목을 표현하지 않고 머리가 어깨 가슴 등과 연결되어 있고 양 소매 사이의 의습선은 ‘八’형보다는 ‘11’형에 가깝다. 눈은 가장 자리를 깊게 파내어 장승의 분위기를 풍기며 몸통도 대체로 윤곽이 없는 형태이며 관모는 복두공복형이다. 분묘의 전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져 있으며 상석은 판석의 형태로 두께가 얇게 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분묘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인 경우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남지역에 고려시대 분묘형식인 호석을 두른 방분은 매우 드물어 역사적 가치가 높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참고문헌 : 위키백과.) ● 풍수적 고찰 전윤장( 全允臧)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천안 전씨 시조인 전섭(全攝)의 39세손으로 증조부는 밀직사 全昇. 조부는 복주목사 全信.父는 공부상서 希安이다. 태화산(460.5m)에서 발조한 용(龍)은 壬子.ㅡ癸丑龍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소원봉을 성봉한 후 甲卯龍으로 직입수(直入首)하였다. 주산은 높지는 않지만 아담하면서도 빼어난 문필봉이다. 국세는 평안하고 안온하다. 주산에서 급하게 내려온 용은 옹골찬 당판을 이룬 후 좌정하였다. 청룡사는 낮게 부복(俯伏)하듯 순하게 중중으로 읍하면서 주인을 호위하는 조밀한 국세인데 무지한 후손이 첨하(籤下)의 내당을 넓혀서 주차장과 확 트인 느낌을 주고자 용미(龍尾)를 자르는 우(愚)를 범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좌향(坐向)은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정서향이다. 내당(內堂) 파구는 경유파(庚酉破).외당 파구는 신술(辛戌)로 양공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에 합당하다. 취기처에서의 좌향(坐向)은 묘좌유향(卯坐酉向)에 파구는 신술파(辛戌破)로 차고소수자왕향이다. 파구는 좌수도우(左水到右)하여 신술(辛戌)로 파구(破口)되니 이는 양공(楊公. 834~900.唐나라 국사)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이다. 이는 임관룡(臨官龍).우선룡에 좌수도우.경유향에 신술파.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쇠방으로 물이 나가도 되고 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여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오래살고 인정(人丁ㅡ인물과 장정)이 왕(旺)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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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8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8회 7) 금화(金火)의 조화에 화(火)가 강하고 수토(水土)가 없어 귀(貴)하고 수(秀)하나 온화(瘟火)와 재화(災火)가 자주나는 터 【1】 조산의 금성에서 작은 금성(金星)이 락(落)하 부(父)가 되고, 금(金)이 변(變)하여 화(火)가 되니 생(生)이 된다.【2】 그러나 거듭 강한 화성으로 앞으로 나아가 금성(金星)의 터를 만드니 강한 화(火)에 작은 금(金)이 상(傷)하게 된다. ☞ 터에 강한 화가 있고 금(金)이 있으면 어찌 멸(滅)하지 않겠는가? ☞ 만약 사나운 무리의 화(火)가 밤낮으로 불사르면, 훌륭한 공인이 거처 할 곳이 아니며, 오직 녹아 없어질 뿐이다. ☞ 귀(貴)하고 수(秀)하나 온화(瘟火)와 재화(災火)가 자주 나타나는 터가 된다. ☞ 이것이 흉(凶)한 까닭이다. 만약 중간에 화(火)가 머무를 수 있는 토(土)가 있고 금(金)을 생(生)하는 수(水)가 있으면 녹귀(祿貴)가 있는 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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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8회 ...밀양 어변당(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8회 ...밀양 어변당 어변당은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에 있다. 조선전기의 무신 박곤이 지었다고 하는데, 연못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어변당 앞에는 장군이 만들었다는 적용지라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물고기를 길러 부모를 효도했고 이에 물고기가 그 효성에 감동해 용이 되어 승천해서 건물 이름이 '어변당(魚變堂)'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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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7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7회 6) 금수상간(金水相間)이나 수(水)가 강하고 수토(水土)가 없어 이향(離鄕)후 귀(貴)가 나오는 터 【1】 조산의 금(金)이 낙(落)하고 변(變)하여 수(水)가 되어 생(生)이 된다. 【2】 그러나 강한 수(水)가 굴곡(屈曲)하여 넘쳐흘러 그치지 않는다. ☞ 이 터는 수(水)가 강하고 금(金)이 약하니 반드시 중간에 목(木)을 얻고 토(土)를 얻어야 바야흐로 조화(造化)가 된다. ☞ 순수(純水)는 뜨고 넘치니(泛濫) 역시 흉해(凶害)가 있다. ☞ 반드시 사는 사람이 고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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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7회 ... 금강산 건봉사(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7회 ... 금강산 건봉사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군 냉천리에 있다.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인 만큼 6.25 이전에는 거대 사찰이었다고 하는데,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적멸보궁에서 부처님께 복을 빌고 촛불을 밝히는 정성을 기울렸다. 대웅전과 적멸보궁이 이 사찰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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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6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6회 5) 출수금(出水金)으로 금수상간(金水相間)이나 수(水)가 강하여 귀(貴 )하고 수려(秀)하나 쉽게 기울어지는 터 【1】 조산의 금(金)이 수(水)로 빼어나니 역시 수(水)로 생(生)한다. 【2】 그러나 조산 아래로 5개의 수(水)가 성(盛)한 가운데 금(金)이 있어 쓸려 내려가고(蕩) 물에 가라앉아(汨沒) 나타나지 않는다. ☞ 금성의 터가 외롭게 있고 홍수(洪水)가 가득 넘친다. 귀(貴 )하고 수(秀)하나 쉽게 기울어진다. ☞ 금(金)은 수(水)로 수(秀)하고 수(水)로써 생(生)한다. 그러나 수(水)가 너무 성(盛)하여 즉 금(金)으로 하여 방탕하여 절제가 없이(蕩逸) 수(水)를 따라 물에 가라앉아(汨沒) 스스로 볼 수가 없다. ☞ 이는 고향을 떠나는(離鄕) 사람이 나오고 금(金)에서 수(水)가 나오는 수출금(水出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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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6회 ... 해평윤씨 영의정 윤은보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6회 ... 해평윤씨 영의정 윤은보의 묘 윤은보의 묘는 의정부시 신곡동에 있다. 주변이 온통 개발되어 홀로 외롭게 도심지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물론 후손들은 조상이 물려준 땅으로 인해 흐뭇한 상황이겠지만 말이다. 풍수적인 특징은 별로 찾기 어려운 펑퍼짐한 언덕위에 여러기의 무덤이 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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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5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5회 4) 금토(金土)의 조화로 부귀쌍전(富貴雙全) 이나 수(水)가 없어 수(秀)가 없는 터 【1】 고산(高山)의 금(金)이 낙(落)하여 금(金)을 생(生)하고, 【2】 토(土)가 다시 잉육(孕育)하여 물러나(退出) 어린 금(嫩金)이 되었다. 【3 】금(金)이 아래로 두 개의 작은 금(金)을 만들고 다시, 큰 금(金)의 자취(躅)를 만들어 다시 두터운 토(土)를 만들었다. 【4】 그리고 터에 이르러 금성(金星)의 터를 만드니 무신(武臣)의 복(福)이 있다. ☞ 금(金)은 본래 무성(武星)인데 토(土)가 더하면 탁(濁)하다. 그러므로 토(土)는 오직 무신(武臣)의 복(福)이 된다. ☞ 그러나 그 조화(造化)를 논(論)하면 금토(金土)가 생왕(生旺)하면 금 (金)은 귀(貴)하고, 토(土)는 부(富)하니 역시 부귀쌍전(富貴雙全)의 땅이다.☞ 단 문(文)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조화(造化)의 정미(精微)함을 논(論)하면 오히려 수(水)가 없어 수기 (秀)를 발하지 못하는 것이 흠(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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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 연천군에 묻혔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復辟)운동이 일어나기 딱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 때도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서 각각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것. 사실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도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참고로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 때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휴전선 남쪽에 들어와 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경순왕릉 묘비가 있는데 내용은"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ㅇ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마지막에는 영조 23년(1747년)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한국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풍수적 고찰 권불십년(權不十年-높은 권세라도 10년못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권력 맛을 본 사람은 죽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코자 자신의 핏줄인 자식에게까지도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헌데 천 년(935년간) 가까이 이어온 종묘사직을 통째로 넘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통일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 도중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빈 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은 자결을 명해 죽자 왕의 먼 친척인 김부(金傅)를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56대 경순왕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핍박(逼迫)을 당하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에 평화적으로 종묘사직을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결혼해서 23년간 살다 76세에 생을 마쳤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료가 약하고 대신 장자인 마의태자는 울분을 삭이고자 산천을 헤매다 생을 마쳤고 나머지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럼 사후의 유택은 어떨까? 경순왕 묘가 맨 처음 있던 곳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1514.위쪽이었는데 1985년에 이장한 곳이 현재의 능이 있는 경가도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이다 좌향(坐向)은 계좌(癸坐)인 남향이다. 앞의 전순은 전부 쌓아 올린 것이고 좌우 용호사는 나(주인=혈)에게 다가온 듯하나 약하고 주산은 금성체로 가까이 있어 좋으나 너무나 내려오면서 퍼져 내려와 취기가 되질 않고 있다. 안산은 청룡작국이나 비주(飛走)하는 형태이다. 앞인 조당은 툭 터져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늑한 감을 주어 납기(納氣)명당은 괜찮아 보이나 자세히 보면 지기(地氣)는 약하고 용호(龍虎)의 호위가 약해 명당이라 말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인생을 100으로 본다면 살았을 때가 50% 사후가 50%인데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후에는 명당혈에 들어가야 편안하고 안온한 후생이 되는데 경순왕릉은 망국의 한(恨)을 간직한 분이라 후생에는 좋은 곳에 계셔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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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4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4회 3) 순금(純金)으로 융회(融會)하여 무직(武職)으로 문(文)이 나타나지 않는 터 【1】 조산이 금(金祖)이고, 금성의 부(金父), 금성의 모(金母), 금성의 자(金子)로 모두가 금성으로 금(金)이 왕(旺)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화(火)가 아니면 아름답지 못하다. 【2】 4개의 강환 금(金)을 (火)로 녹이니 둥글고 순수한 아름다운 금(金)이 된다. 【3】 그러나 변화하지 않고 순금(純金)으로 융회(融會)하면 즉 무직(武職)이고 문(文)이 나타나지 않는다. ☞ 즉 완고하고 강한 금(金)이 되면 화토수(火土水) 세 개로 조화(造化)를 이루어야 녹여 이룰 수 있는 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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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5회 ...진위향교(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5회 ...진위향교 평택 진위면에 자리한 진위향교를 살펴본다. 영의정 심순택의 묘를 보러 가는 길에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둘러보게 되었다. 약간은 경사지고 언덕진 곳에 자리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입지선정에 있어 풍수를 중시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음택과 양택 입지선정의 기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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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3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3회 2) 금화(金火)와 금수(金水)의 조화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터 【1】 조산의 헌천금(獻天金)이 낙(落)하여 소금(小金)이 되었다. 그러므로 연하고 어리다. 【2】 다시 석산(石火)이 나온다. 그러므로 쇳돌 같은 금인 광금(礦金)이 되었다. 화(火)가 있으나 금(金)을 상(傷)하지 않는 화(火)이다. 【3】 완고하고 쇳돌 같은 광금(礦金)은 화(火)를 밑천(資)으로 쇠를 녹이 고 단련하여야 비로소 아름다운 물질을 만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한 자(資)는 화(火)로 데우는 것이고, 화성(火星) 아래 둥근 금(金)이 나오면 즉 쇠를 녹이어 만든 용금(鎔鑛) 이다. 그러므로 금(金)을 녹이면(鎔) 둥글게 된다. 【4】 금(金)에 이미 화(火)가 나오면 반드시 수(水)로 담금질 하여야 견고하고 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水)는 금(金)을 담금질 하여 견고하게 하고 금(金)을 담금질 하여 그릇을 만든다. (淬金水) ☞ 그러므로 금(金)은 무성(武星)이니 수(水)로써 담금질 하면 수려(秀)해지고, 화(火)로 이루어(成)지면 녹(祿)을 이루니, 반드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가 나온다. ☞ 장군이 되어 제상이 된다. 그러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