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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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5회 ...석파정(石坡亭)(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5회 ...석파정(石坡亭) 석파정(石坡亭)은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였다. 이름은 흥선대원군의 호인 '석파(石坡)'에서 따왔다. 부암동에 있으며 정자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별서 전체를 석파정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석파정 명칭 자체는 정자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0다. 그래서 가옥 부분을 정자와 구분하고자 '흥선대원군 별서'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으로서 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김흥근의 별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이었다. 삼계동정사가 있는 자리는 경치가 굉장히 좋기로 유명했던 곳으로,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역시 이 주변의 경치에 반해 근처에 별서 무계정사를 세울 정도로 빼어난 풍광에 반한 고위층들이 별서를 두던 동네였다. 고종 즉위 후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야사 하나가 있다. 안동 김씨 세도를 꺾고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세도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흥근의 경치좋은 삼계동정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흥근이 순순히 내줄 리 만무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삼계동정사에 행차하게 한 다음 하루 자고 가게 한 것. 조선의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감히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흥선대원군에게 삼계동정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별장 주변의 장엄한 바위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짓고 별서의 이름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사후에는 흥친왕, 영선군, 이우가 세습해서 쓰다가 6.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천주교에서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했다. 그후에 병원에서 활용하다가 개인 소유로 넘어갔고 여러 번 경매에 오르는 등 소유자가 자주 바뀌었다. 1974년 1월 1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지정받았다. 2004년 12월에 빚으로 힘들어한 당시 소유자가 경매에 내놓았는데 2번이나 유찰되었다. 거의 대부분 부지가 문화재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등 개발이 제한된 구역이라 낙찰이 쉽지 않았다. (참고문헌 나무위키.) ● 풍수적 고찰 석파정(石坡亭)은 북악산(北嶽산.342m)에서 인왕산(仁王山332.m)으로 가는 둔덕에 위치한 곳으로 작은 국세를 이룬 곳이다. 작은 국세라 생활공간보다는 번뇌를 잠재우고 잠시 잠깐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였을까?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의 별서로 유명해세를 타 고종 황제까지 행차해 묵었던 곳이었으니 가히 짐작할만하다. 석파정(石坡亭)의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남향(南向)이다.아마 예전 나경으로는 정남향이었을것이디. 파구(破口)는 병오파(丙午破)다.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은 수(水)가 병오방(丙午方)으로 나가니 향상(向上)의 녹위(祿位)를 충파하는 것으로 소황천(小黃泉)이 된다. 소황천은 궁핍하고 요수하며 과부가 난다. 이 황천(黃泉)은 혹간 수(壽)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지만 여러형제가 많아도 결국은 핍사하고 곤궁하여 부자는 없더라. 미자상(未字上)을 침범하고 창도(創刀)와 악석(惡石)이 있으면 횡폭하여 투쟁을 좋아하는 자손이 나리라. 하였다. 별서의 좌향과 파구를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수법으로 봤을 때 소황천(小黃泉)이라 장기간 거주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지만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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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2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2회 4. 금성(金星) 1) 금수토(金水土)의 조화로 큰 무관이 나오는 터 【1】 금성(金星)이 조산으로 일어나고, 금(金)으로 락(落)하여 횡으로 넓다. 【2】 금성이 수(水)를 만나 다시 생(生)하니 더욱 왕(旺)하다. (金水相間) 【3】 또한 수성과 토성(水土)이 다시 자윤(滋)하여 좌(坐)를 일으키고 터를 만들었다. (水土會) ☞ 수려하고 또 문장이며 큰 무(穹武)의 관직(職)이다. ☞ 금(金)은 무성(武星)이다. ☞ 수(水)는 수성(秀星)이며 역시 문(文)이 있다. 바람이 다니면 물결 모양의 파문(波紋)이 일어나고 서리가 얼면(霜凝)물의 무늬(紋)가 나타난다. 이것이 물에 문(文)이 나타나는 바이다. ☞ 무성(武星)이 조산(祖)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터가 생(生)하니 사람이 태어나는(生) 바는 반드시 청귀(淸貴)하고 문(文)이 가능하다. ☞ 이에 무공(武功)이 나타나 공적을 쌓으니 역시 무직(武職)으로 몸이 드러나 지위가 높게 이른다. ☞ 금(金)은 수(水)로써 수려하게(秀)되는 것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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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4회 ...성주향교(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4회 ...성주향교 성주향교는 정말 좋은 곳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향교의 입지가 관아에서 가까워야 한다는 제한적인 요인으로 인해 좋은 곳이 드문데 성주향교는 단연 돋보이는 곳에 자리한다. 주산과 입수룡이 어우러진 곳에 대성전을 지음으로써 제향중심 향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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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4회... 청와대(靑瓦臺) 관저.(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4회... 청와대(靑瓦臺) 관저. 청와대 관저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했던 곳이다.대통령이 구 본관에서 집무하던 시기에는 구 본관 2층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노태우 대통령 때 새로운 본관을 짓기로 하면서 1990년 10월 관저를 신축하였고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구분되었다. 관저를 지을 때 전통 목조건축 양식을 도입하였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청기와를 얹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공간인 별채가 'ㄱ'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으며, 앞마당에는 뜰과 사랑채가 있다.관저의 대문은 전통한옥 삼 문 구조로 현판에는 '인수문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어질고 장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풍수적 고찰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청와대(靑瓦臺)로 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향명이치(嚮明而治)를 못하고 임기 말년에 좋지 않는 행로를 보여 왔는데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 청와대 관저가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이 아니라 음룡(陰龍)이다. 음룡이라 조당이 좁고 협소하니 5~7m 이상의 축대를 쌓아 조당격인 마당(뜰.정원)를 넓혀 건축한 곳이라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최적이 될 리 없다. 양택(陽宅)의 생명은 취기처(聚氣處)보다는 ㄱ.사세(四勢)가 갖춰지고 ㄴ.지기(地氣).천기(天氣)..조응기(照應氣). 형상기(形象氣)가 좋아야 하고 ㄷ.좌향(坐向)이 어긋(공망)나지 않고.ㄹ.택주(宅主)와 궁합이 맞아야 하고. ㅁ.인심(人心)이 있는 곳이어야 하고.ㅂ.물길.도로.길..등이 반배하지 않아야 한다. 양택삼요의 1.배산임수(背山臨水)-뒤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병풍처럼 있고. 앞은 물이 금성수로 흐르는 곳이면 좋다. 2.전저후고(前低後高)-집 앞은 집과 터보다 낮아야 하고 집 뒤는 적당한 높이가 되어야 좋다. 3.전착후관(前窄後寬)-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넓지 않으면서 좁아야 하고 집 안쪽은 좁지 않은 넓은 곳이어야 좋다. 재물이 모이는 조당을 물길이 금성수로 감싸고 돌면 금상첨화다. 그럼 양택(陽宅 -거주 공간)의 영향은 어떨까? 양택이 지기(地氣).천기(天氣).인기(人氣).조응기(照應氣).형상기(形象氣)가 좋으면 ㄱ.좋은 컨디션 유지 ㄴ.건강한 생활유지. ㄷ.매사에 자신감 ㄹ.사회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냄. ㅁ.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 ㅂ.종사하는 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ㅅ.적덕을 쌓게끔 하여 ㅇ.좋은 배우자 만나고 ㅈ.최상의 컨디션 상태에서 수태. ㅊ.최적의 태교가 되어 ㅌ.큰 인물이 될 좋은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난다. 대통령 관저로 입수한 용맥은 한북정맥의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 낙산(駱山,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인 현무(玄武)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자 청와대의 주산이기도 하다. 북악산의 주맥이 석맥으로 급하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탈산(脫殺)을 하면서 암석 지대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있는 곳으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한다. 청와대 주맥(主脈)은 소조산이 배면(背面)한 우측의 한 지맥이 청와대 본관으로 급하게 입수(入首)하고 소조산의 주맥 좌측 아래에 관저가 자리하고 있다. 관저의 전체적인 국세의 주산은 소운정에서 내려오는 석맥이다. 그런데 주맥을 주산으로 하는 건물은 대통령 숙소가 아닌 만찬장 건물이다. 풍수지리로 보면 만찬장 건물이 주(主)이고 숙소 건물은 객(客)인 행랑채격으로 주객전도(主客顚倒) 형태다. 좌향(坐向)은 신좌을향(辛坐乙向)의 동향이다. 재물을 관장하는 물길은 주산의 골에서 흐르는 물이 관저의 지하로를 통해 정미파(丁未破).또는 곤신파(坤申破)로 나간다. 이는 인정(人丁)과 재물이 날로 쇠하여져 불발하는 파구다. 아무리 높은 최고의 권력자들일지라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地氣)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잘 어우러져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이 편안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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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3회 ...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3회 ...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 성인보의 묘는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다. 해석이 쉽지 않은 자리다보니 여러 의견이 있는듯하다. 어느것 하나 형세풍수의 원리에 부합하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양명하게 빛나고 있으니 더 어려운 것이다. 함께 공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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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1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1회 12) 목토(木土)의 조화에 토(土)가 강하여 문(文)이 짧고(夭) 탁부(濁富)의 터 【1】 조산의 목(木)이 낙(落)하여 토(土)가 되고 목(木)과 토(土)가 뒤섞여 어수선하여(錯雜) 주(主)가 없다. 【2】 또한 두 개의 토(二土)가 융성하고 후부 하여 횡(橫)으로 쓰러진 목(木)을 토(土)가 이기게 된다. 【3】 왕(旺)한 토(土)가 목(木)을 이기고 토성으로 전(傳)하여 터를 만들었다. ☞ 토(土)가 너무 왕(旺)하여 목(木)을 바꾸어 넘어져 쓰러져 엎드렸다. 때문에 문(文)과 수(秀)에 불리(不利)하다. ☞ 그러므로 모두 문(文)이 짧고 수(壽)가 탁(濁)한 것을 주관한다. ☞ 토(土)가 왕(旺)하여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 입목(立木)을 생(生)하여 점점 높이 솟아야 목(木)이 왕(旺)하고 이후에 터를 만들 수 있다. 그 조화(造化)는 마땅히 목(木)이 생왕(生旺)을 얻는 곳을 따라서 그곳에서 구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나아가 입목(入木)을 얻으면 길(吉)함을 생(生)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문(文)이 짧고(夭) 탁한 부(濁富)에 그치는 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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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 청와대(靑瓦臺)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2022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한 공간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열두 명의 대통령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명칭을 '청와대'로 변경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기에 건물의 보수·증축과 함께 녹지원 조성, 영빈관 신축 등 청와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에 관저와 춘추관을, 1991년에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현재의 청와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1993년 구 본관을 철거 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20대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청와대는 국민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1991년 지어진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이 집무와 외빈 접견 시에 사용한 곳이다. 본관 외부에는 전통 건축양식의 팔작지명에 15만 여장의 청기와를 올렸으며, 내부에는 현대적인 건축과 성을 갖추고 있다. 본관 중앙부에는 2층 한옥양식의 를 두고, 좌우에는 단층 한옥양식의 별채를 배치하였다. 이는 2담회나 소규모 만찬장으로 사용한 인왕실, 영부인의 집무실과 무궁화실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접근 및 회의 긴소로 사용한 집현실이 있다. 서쪽의 별채에는 국무회의가 열렸던 사실, 동쪽의 별채에는 임명장 수여식 등에 사용된 층수 안에 있다 청와대(青瓦臺)의 이 터전을 고려조(高麗朝)의 이궁(離宮)으로 조선조(朝鮮朝) 경복궁(景福宫)의 후원(後園)으로 천년(千年)에 걸친 역사(魔史)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일제(日帝)가 우리의 옛 건물(建物)들을 헐고 이 곳에 지은 총독(總督)의 집을 국가원수(國家元首)가 건국(建國)이후 이제껏 써왔다 노태우대통령(盧泰愚大統領)은 1988년 12월 17일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전통(傳統)을 잇고 드높아진 나라의 위상에 어울리는 청와대(青瓦臺)를 신축(新築)토록 하였다 관저(官邸)가 1990년 10월 25일 완공(完工)되고 본관이 1991년 9월 4일 준공(竣工)되니 천하(天下)에 으뜸가는 복지(0福地)위에 겨레의 앞날을 무한히 밝혀줄 청와대(青瓦臺)가 새로 지어졌다 ● 풍수적 고찰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청와대(靑瓦臺)로 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향명이치(嚮明而治)를 못하고임기 말년에 좋지 않는 행로를 보여 왔는데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먼저 청와대로 입수한 용맥부터 보자. 청와대는 한북정맥의 북악산 지룡의 산진처에 자리 잡았다. 주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악산(北岳山.342m)이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맥으로 수우산(水于山)·-대성산(大成山)·-운악산(雲嶽山)-·주엽산(注葉山)··불곡산(佛谷山)·홍복산(弘福山)·도봉산(道峰山)·삼각산(三角山)·노고산(老姑山)··현달산(見達山)··장명산(長命山)으로 행룡한다. 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면사 청와대의 주산(主山)이다. 북악산의 정맥은 급하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탈산(脫殺)을 하면서 암석 지대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하나의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 있는 곳으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行龍)한다. 청와대 주맥(主脈)은 소조산이 배면(背面)한 우측의 한 지맥이 청와대 본관으로 급하게 입수(入首)하고 있다.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는 게 대원칙이라 할 수가 있는데 청와대 본관이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이 아니라 음룡(陰龍)이다. 음룡이라 협소하니 용맥을 크게 절단하여 터를 넓혀 건축한 곳이라 지기(地氣)와 사세(四勢)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주산이 후덕(厚德)해야 거주자의 심신(心身)이 안정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가 어우러져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에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니 관대룡(冠帶龍).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로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한다고 하는데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미흡하다 보니 본관에 들어간 자마다.인정(人丁)보다는 금권(金權)에 눈이 멀어 자못 오점이 점철되지 않았을까.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지 집무실.회의실.등을 살펴보니 풍수이론에 합당하기보다는 합당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는 관계라 완전한 평화의 무대가 펼쳐진 것은 아니기에 최고의 책임자가 거처한 곳을 이전한 것은 섣부른 감이 있으나 청와대 본관이 성군이 머무르기에는 흡족한 곳이 아니기에 그렇게 나쁘게 볼일은 아니다. 다만 용와대의 대통령실은 가보지를 않아 가타부타 언급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앞으로 최고 통치자는 위에서 군림하는 권위보다는 국민이 바라는 성군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 천하제일복지.ㅡ구 청와대 본관 터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이 곳은 일찍이 명당 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後苑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융문당降文室, 융무당降武堂, 경농재, 벽화실碧華室, 오운각五閣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운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웅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秘地).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美軍政) 사령관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 관저를 건축했고 다음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 집으로 남게 되었다.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관사 건물을 철거한 후 옛 지형 그대로 복원해 원래 이 터의 이름을 따라 경무대구 본관 터라 하였다. 구(舊) 본관터는 1948년부터 43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한 구 본관이 있었던 자리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 현재의 본관과 관저를 신축하였고,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구 본관을 철거하였다. ● 풍수적 고찰 북악산(北岳山.342m)에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금성체의 아담한 소원봉을 이루고 석맥의 결인을 한 후 취기(聚氣)를 한 곳이 구(舊) 본관터다. 혈장(穴場)이 생각보다 넓지 않아 양택지(陽宅地)보다는 음택지(陰宅地)로 활용해야 할 곳이다. 지세(地勢)의 좌향(坐向)은 정남향(正南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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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0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0회 11) 목금목(木金木)의 조화에 금(金)이 강하여 부귀(富貴)한 가운데 마침내 흉화(凶禍)가 있는 터 【1】 통천목(通天木)이 조(祖)가 되고, 【2】 또 아래에 목(木)이 부(父)가 되고 목(木)이 변(變)하여 금(金)이 모(母)가 되었다. 【3】 그리고 3개의 금(金)으로 금(金)이 수기(水氣)를 빌려 왕(旺)하고, 터에 이르러 목(木)으로 되었다. ☞ 겹겹이 쌓인 무더기(磊磊:뇌뢰)는 모두 금(金)이고 외로운(孤) 목(木)으로 터를 만드니 반드시 수려하고 귀(秀貴)한 사람이 나온다. ☞ 그러나 금(金)이 강하여 부귀(富貴)한 가운데 마침내 흉화(凶禍)가 있으니, 오래가지 못하고 수족을 잃고 곱사등의 병을 가진 사람이 나온다. ☞ 이것은 목(木)이 강한 금(金)의 상(傷)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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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2회 ...벽진이씨 공조판서 이상길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2회 ...벽진이씨 공조판서 이상길의 묘 이상길의 묘는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다. 도시의 개발로 인해 전체적인 원형의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혈의 크기는 주룡에 달려있는데, 대혈이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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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79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79회 10) 목토(木土)의 조화에 토(土)가 강하여 문장이 빛나고(文采) 청수(淸秀)하나 패(敗)하는 터 【1】 조산에 목성(木星)이 일어나 락(落)하여 토(土)가 되었다. 목(木)은 토(土)의 북돋움(培)을 얻으니 자연 번화하고 무성하다(榮茂). 【2】 그러나 조(祖)가 일어난 아래 낙(落)하여 토(土)가 되고, 토(土)가 앞으로 전(傳)하여 후부 하다. 그러므로 후부한 토(土)가 면목(眠木)위에 있으니 압(壓)을 받고 목(木)이 부패하여 썩는다. 【3】 그리고 다시 그 아래 목(木)이 횡(橫)으로 엎드려 일자문성의 면목(眠木)이 전(傳)하여 건너가고 터에 이르러 가토목(架土木)이 되었다. ☞ 가토목(架土木)은 도지목(倒地木)위에 토(土)의 언덕(阜)이 그곳을 압(壓)하여 목(木)은 토(土)의 압(壓)을 받으니 반드시 소멸하여 썩어 목(木)이 득지(得地)하지 못한다. ☞ 비록 문장이 빛나고(文采) 청수(淸秀)한 사람이 나와도 반드시 장수(長壽)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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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78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78회 9) 목화(木火)통명(通明)과 목수금(木水金)으로 무(武)가 문(文)으로 바뀌어 부귀(富貴)한 터 【1】 조산(祖)이 목(木) 삼태(三台)이고, 그 아래 화(火)가 장막(障)을 두르고 횡(橫)으로 개각(開)하였으니 목화통명(木火通明)이다. 【2】 화생토(火生土)로 변(變)한 삼토(三土)의 솟(鼎)을 목성(木星)이 떠 바치고 아래의 수성을 대(帶)하고 있으니 목성(木星)은 역시 수려(秀)하다. 【3】 터에 이르러 수(水)가 왕(旺)하게 거듭 와서(重來) 수(水)가 삼금(三金)을 생(生)하니 무(武)가 문(文)의 계급(階)으로 바뀐다. ☞ 목(木)은 스스로 수(秀)하고 문(文)이니 목(木)에 이르러 금(金)은 꺼리고 범하는 것이 없으니 마땅히 그것은 길(吉)하다. ☞ 처음에는 무(武)가 나왔으나 곧 문(文)으로 바뀌었으니, 마땅히 과거에 급제하고 부귀(富貴)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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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1회 ... 행주기씨 영의정 기자헌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1회 ... 행주기씨 영의정 기자헌의 묘 기자헌의 묘를 찾기 위해 중앙대 주변을 몇번에 걸쳐 헤맨끝에 드디어 답사할 수 있었다. 골프 연습장 안쪽에 이정표 하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필자는 묘소 찾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인데도 이렇게 어렵게 접근해야 했다. 풍수적인 특징은 찾을 수 없었고 특별함조차 없는 평범함뿐인 묘소라 할 수 있다. 풍수하는 사람들은 어렵게 찾은 곳이 눈이 번쩍 띄는 특별함이 있으면 그날은 행복한 날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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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2회... 유가사(瑜伽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2회... 유가사(瑜伽寺) 유가사(瑜伽寺)는 비슬산(琵瑟山.1083.4m)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827년(흥덕왕 2) 도성(道成)이 창건하였고, 889년(진성여왕 3) 탄잠(坦岑)이 중창하였다. 1047년(문종 1)에 학변(學卞)이 중수하였으며, 1452년(문종 2)에 일행(逸行)이 중수하였다.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나, 임진왜란의 전화로 소실되었다. 그 뒤 1682년(숙종 8)에 도경화상(道瓊和尙)이 대웅전을 보수하였으며, 1729년, 조선 영조 5년 취화(就和)와 파봉(巴峰)이, 1760년, 보월(寶月)이, 1776년, 밀암(密庵)이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31본사사찰령」에는 유가사가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로 되어 있어 당시 유가사의 사세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76년에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하였으며, 1979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용화전(龍華殿) ·나한전 · 산령각 · 범종루(梵鐘樓) · 천왕문(天王門) ·백화당(白華堂) · 동산실(東山室)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범종루는 취적루(翠滴樓)로 불리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2003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유가사 석조여래좌상과 괘불(掛佛), 삼층석탑, 15기의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괘불은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적군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에는 괘불에 소원을 빌고 대견사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높이 364㎝이며, 아래쪽에 있었던 원각사터에서 1920년에 옮겨온 고려시대 양식을 띤 작품이다. 또, 이곳에 있는 15기의 석종형 부도는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아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낙암당(洛巖堂) · 월호(月湖) · 휴영당(休影堂) · 설청(雪淸) · 해백(海白) · 경수(景修) ·진흘(眞汔) · 명학(明學) · 처명(處明) · 사옥(思玉) · 영규(靈圭) · 도경 · 풍렬(豊烈) · 하초(夏初) · 세민(世敏) 등의 부도이다. 부속암자로는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수도암(修道庵)과 경상북도의 3대 수도처 중의 하나인 도성암(道成庵)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풍수적 고찰 비슬산(琵瑟山.1083.4m) 이름은 다분히 풍류적이다.비슬산은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비슬산(琵瑟山) 정상에 유가사(瑜伽寺)가 있다. 유가사(瑜伽寺)의 유(瑜)도 아름다운 구슬옥을 넣어 지은 것을 보면 돌들이 빼어난 곳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비슬산의 한 맥은 동남쪽으로 행도하여 당나라 문종이 꿈에서 알현했다는 대견사의 명찰을 낳았고. 또 다른 한 맥은 서진하여 유가사의 명찰을 낳았다 실지 유가사 터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암반.석수등이 용호(龍虎)의 맥(脈)뿐만 아니라 곳곳에 있는데 나름대로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인 국세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나 용호(龍虎)가 제대로 감싸지 못하고 있어 재물보다는 수행처가 더 적합하다. 그래도 석맥(石脈)을 타고 내려온 기세가 있어 혹 기원이 필요하시거나 탐방(探訪)을 하게 된다면 산신각에서 발원을 하면 좋을듯하다. 좌향은 지세에 맞게 서향을 하였는데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 이는 향상(向上)으로 임관(臨官)을 충파하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이다. 살인대황천은 다 큰 아들이 喪을 당하고 패절하며 절름발이.피부병.혈압.노질.토혈.등의 증세가 있으며 먼저 둘째 집이 상(傷)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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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77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77회 8) 목금목(木金木)이나 목(木)이 약하고 기(氣)가 없어 향화지지(香火之地) 【1】 조산으로 부터 목성(木)이 약(弱)하고 기(氣)가 없이 터를 만들었다. 이러한 목성(木星)은 반드시 재배(栽培)할 수 있는 영양분인 자양(滋養)을 요하고, 그런 연후에 조화(造化)에 합(合)하게 된다. 【2】 가지도 없고 잎도 없이 혼자 나가면 종(縱)으로 늘어져서 모이니(融會) 천장(遷葬)이 불가(不可)하다. 사묘(祀廟), 사관(寺觀), 향화지지(香火之地)에 그친다. ☞ 이러한 터는 이미 기(氣)가 없으니 당연히 가업(家業)의 퇴락(退落)을 주관하고 자손(子孫)이 쇠퇴하고 끊긴다. ☞ 비록 문성(文星)이 되더라도 귀(貴)가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 옥봉보전(玉峰寶傳)에 이르길 용(龍)이 귀(貴)하면 생왕(生旺)이고,생왕(生旺)은 반드시 붙어서 심을 수 있는 (滋植)것에 의지해야 한다. ☞ 마치 목(木)은 반드시 수(水)이고,화(火)는 반드시 목(木)이며, 금(金)은 반드시 토(土)이고, 수(水)는 반드시 금(金)이고, 토(土)는 반드시 화(火)이다. 각각 조화(造化)의 도움을 얻은 이후에 생왕(生旺) 득지(得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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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0회 ...경주이씨 영의정 이항복의 조부 이예신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0회 ...경주이씨 영의정 이항복의 조부 이예신의 묘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광촌마을에 위치한 이항복의 조부묘는 "也'자 명당의 중심맥을 차지하고 있다. 본인은 비록 진사에 머물렀으나 손자가 영의정에 올라 좌찬성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