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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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8회... 풍운아 허균(許筠)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8회... 풍운아 허균 ■ 풍운아 허균(許筠) [한국풍수신문] 허균(許筠.1569~1618)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다. 父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엽(曄). 母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광철(光轍)의 딸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봉(篈).성(筬)과 난설헌(蘭雪軒)이 형제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PS 풍운아(風雲兒)에서 역적모의를 한 혐의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허균(許筠.1569~1618)은 조선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해 홍길동전.이라는 최초의 한글 소설을 통해 강한 반감을 드러낸 한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죠. 그럼 그의 유택은 어떤가? 수정산(344.4m)에서 서북으로 행도하다 소원봉을 기봉한후 신술룡(辛戌龍)으로 기복굴곡을 하여 다시 곤신(坤申)룡으로 지현굴곡을 하여 경유룡으로 입수를 하였다. 혈형은 와겸유돌(窩鉗乳突)에서 와형(窩形)이다. 당판(當坂)은 보통이고 취기(聚氣)는 유혈의 필수인 미돌(微突)이 없어 미약한 보백지지에 불과한 자리다. 용호는 우각사(牛角沙)로 감아줘야 좋은데 그러지를 못했다. 초장지 묘역은 서울시 서초구에 있었는데, 1968년 도시개발로 인해서 현재의 위치인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초장지의 자리에 대한 길흉 유무는 알길이 없고 현재의 묘의 좌향은 서향인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정유분금(丁酉分金).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 이는 양균송의 수법(水法)으로 보면 향상으로 임관(臨官)을 충파(沖破)한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이다.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은 다 큰 아들이 상(喪)을 당하고 패절(敗絶)하고 절름발이. 피부병. 혈압. 노질. 토혈.ᆢ등의 증세가 있으며 먼저 차남 집이 상(傷)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고 하니 극히 조심해야 할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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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13회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연재 13회 9. 부목수(浮木水): 나무를 기르는 수성산 수(水)는 나무를 생(生)하니 수생목(水生木)이 된다. 목성산(木星山)아래에 수성(水星)이 있으면 나무는 수를 기반으로 자라기 때문에 목의 기운이 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장가의 기운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수(水)가 너무 왕성하면 물에 나무가 떠내려가 이향(離鄕)을 주관하니 수(水)의 강약을 잘 살펴야 한다. ➀은 높은 고산의 목성산이 떨어져 내려와 평지에 누워있는 목성산(倒地木)이 중간(中間)에 있고, 지각(支脚)에 수성산(水)이 곁에 붙어있어 목을 잘 자라게 해 준다. 그러므로 나무를 기르는 수성산이 된다. 이러한 수성산은 문(文)의 기운이 강하여 공후(公侯)의 근본(根)이 되는 터가 된다. ➁는 수성산에서 목성산이 중앙을 뚫고 내려와 목(木)의 뿌리가 수(水)를 얻어 자라고 있다.이러한 수성산은 목성산과 함께 문(文)과 귀(貴)가 있다. ➂은 수성산이 평지에 내려와 중간에 땅에 누워있는 목성산(倒地木)이 되고, 곁에 둥근 수성체의 지각이 붙어 목성산을 기르고 있다. 수(水)위에 떠 있는 도지목(倒木)은 마치 옥사편(玉鞭)과 같은 무리(族)이다. 이러한 터는 목(木)을 기르니 수려한 기운(秀氣)가 모이는 곳(鐘成)이고 부귀(富貴)하고 복(福)이 있다. 그러나 수성이 너무 강하면 나무는 떠내려가기 때문에 강약을 잘 보아야 한다. 아래 산도는 이태백(李太白)의 조묘(祖墓)이다. 황룡이 새끼를 데리고 바닷물을 마시러오는 황룡인자음해형(黃龍引子飮海形)의 명당이다. 목성이 수성의 도움으로 문장가가 탄생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수성이 너무 강해 나무가 물에 떠내려가는 형국을 이룬다. 이러한 사례를 채원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다. 이태백(李太白)의 조묘(祖墓) 황룡인자음해형(黃龍引子飮海形) 황룡이 새끼를 데리고 바닷물을 먹으로 가는 황룡인자음해형(黃龍引子飮海形) 이다. 해수(海水)를 안산(案)으로 하였다. 옛날 고시(古詩)에 "황룡인자음해형(黃龍引子飮海形)으로 바다 건너 귀인(貴人)이 맑고 푸르다. 문장이 세상을 덮는 명성이 나온다. 그리고 사면(四面)의 수(水)가 교회(交會)하는 것이 보인다. 또 말하길 활룡(活龍)의 옆구리 안이 마치 반룡(盤龍)같아 귀룡(貴龍)이 물을 마시러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 같다. 비단옷을 허리에 걸치고 제왕을 알현함을 주관한다. 조정에 들어 명성이 무궁 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채원정은 발휘(發揮)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조산이 개장(開障)하고 귀인(貴人)이 중출(中出)로 나왔다. 기이한 만두와 수려한 봉우리가 다시 평강에 락(落)하여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간다. 또 횡으로 물결이 일고 몸을 날려 협(峽)을 맺은 후에 평출(平出)하였다. 용호(龍虎)가 분명하고 수봉(秀峰)이 조응(朝應)한다. 또 해수(海水)가 크게 물결치고 아득한 바다가 끝이 없다. 그러나 옛날 고시에 논한 것은 오직 그 아름다움만 칭송하였고 아름다움 가운데 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오성(五星) 조화(造化)의 묘미를 알아야 하는데 자미(子微)의 이론이 아니면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그 응험을 유추하여 만약 맞다면 이것은 어병수성(御屛水星)이 기조(起祖)하고 하자(瑕疵)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수성(水星)아래의 목성(木星)이 맞지 않는다. 목을 기를 토(土)가 없이 수(水)가 지나갔고 또 목(木)이 천(穿)하니 목(木)은 약하여 물에 떠내려가는 배(舟)이다. 그러므로 생왕(生旺)의 목이 아니니 물을 지나가도 머무르지 못한다. 목(木)이 수(水)를 천(穿)하고 나와 다시 왕(旺)하여 쇠약하지 않다. 그러므로 문장(文章)이 화려하게 드러났지만 목(木)이 생(生) 하는 곳이 없다. 수(水)가 많아 목(木)이 전(傳)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표탕(飄蕩)하고 범람(泛濫)하여 돌아가 머물 곳이 없으니 마침내 이렇게 멈춘 것이다. 그러므로 이태백 역시 고종명(考終命)을 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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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3회...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3회 [한국풍수신문]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 1. 관광지 형황분석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가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2. 장소 정체성 분석 1) 물리적 자연환경(풍수지리) (1) 해인사의 용세 해인사는 북쪽에 조산(祖山)인 가야산, 남쪽의 남산제일봉, 서쪽의 남산, 동쪽의 사자바위가 모두 1000m 넘는 바위로 거대한 화성체(산의 모양이 불처럼 뾰족한 산을 말함)이고, 해인사가 바라보는 남서쪽의 단지봉과 북쪽의 두리봉도 모두 1000m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용세가 강한 화성(火星:뾰복한 산)의 기운을 가지고 일반인이 사는 터 보다 사찰이나 수도의 터가 되기에 적당하다. (2) 해인사 터의 기운 해인사의 혈(穴)은 가야산의 화성 기운이 내려와 장경각 뒤 수미정상탑이 있는 돛대바위에 뭉쳐 그 기운이 대적광전에 뭉쳐 있다. 그리고 해인사를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터 안에 그 기운을 더하고 있다. (3) 해인사의 사신사 해인사의 사신사를 혈처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보면 뒤의 장경판전이 현무,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祖山)은 가야산, 좌측의 외청룡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신부락 뒷산, 외백호는 두리봉, 안산은 비봉산, 그리고 조산(朝山)이다. (4) 해인사의 수세 해인사의 수세는 해인사 경내에 모인 기운을 터에 멈추게 하는 외기의 역할을 한다.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해인사 우측 물과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 역시 해인사의 외청룡과, 비봉산에서 내려오는 보현암의 우백호가 서로 막고 있어 해인사의 물길이 곧바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5) 해인사의 방향 해인사의 방향은 대적광전의 향이 제일 중요하다. 특히 창건시 남향으로 하여 남산제이봉의 화성체의 화기에 의한 화재와, 이후 중건시 향을 남서향으로 단지봉을 향하여 조성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예방한 것이 향을 보는데 제일 중요하다. 해인사의 대적광전 앞에서 휴대폰의 나침반을 활용하여 남산제일봉과 단지봉을 살펴보게 하고, 향을 왜 단지봉이 있는 남서향으로 정했는지 직접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주위의 가야산과 두리봉, 남산도 확인 할 수 있도록 한다. (6) 해인사의 형국 해인사는 앞에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가야산은 선체가 되고, 해인사는 배의 선실이 되며,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이 되며, 장경판 뒤쪽의 돛대바위는 돛대역할을 하여 배가 출항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인사 경내의 배치도 행주형국의 모양을 띠고 있다. 해인사의 형국을 활용하여 행주 형이 되는 선미, 선실, 무게중심, 돛대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이러한 형국이 되는 조건들을 조감도를 설치하고, 전시실에 홀로그램이나 디오라마, 동영상 등을 만들어 설치한다면 해설에 도움이 된다. (7) 해인사의 비보 해인사의 비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행주형국에 따른 비보 과정과, 둘째는 남산제일봉의 화기에 의한 화재에 대한 비보로 나눌 수 있다. 경내에는 행주형국에 따른, 배가 머물고 출항하기 위하여 돛대를 만들었다. 돛대바위의 수미정상 탑이나, 석당간, 그리고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설치한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 배가 순항하기 위해 일주문부터 봉황문까지의 일직선 배치 등은 행주형국을 보충하기 위한 비보이다. 두 가지 관점인 해인사의 행주형국과,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높은 화성체의 산들을 활용한 비보방법에 대한 조감도와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설치한다. 3. 스토리텔링 구성 해인사의 자소정체성은 가야산의 자연적 환경 하에서 팔만대장경의 법보 사찰인 해인사를 지어 100년 동안 이어온 사찰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의 사상과 행공 양식은 관광객들에게 템플스테이, 힐링, 명상, 자아실현 등 다양한 형태로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법보 사찰로 가야산아래에 건립 된 사찰이다.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이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기에는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고 기술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살펴보면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또한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 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 황실에서 일행선사(一行先師(688-727))에 의해 풍수가 한창 번성할 시기이며 외국의 유학승들이 풍수를 접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풍수 지리적으로 입지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1) 해인사의 내기와 외기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1430m)은 해인사의 터를 이루는 조산(祖山)으로 강한 화성체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가야산은 남쪽으로 내려와 사자바위에서 서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해인사 백련암 뒤에서 가지를 나눠 하나의 맥은 지족암을 거쳐 성철 대종사사리탑에 멈추어 해인사의 청룡을 이루고, 마지막 하나의 맥은 해인사 뒤 수미정상 탑에서 기운이 뭉쳐 해인사의 경내로 들어간다. 옛 기록들은 이런 가야산세를 일러 "산형(山形)은 천하 으뜸이고 지덕(地德)은 해동(海東)의 제일”이라 적고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경상도는 돌로 된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은 듯하고 대단히 높고 또한 수려하다.”고 하였다. 석화성이란 돌 꽃 산을 말하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불꽃 모양처럼 타오르는 듯 한 첨예한 산세를 화형(火形)의 산으로 분류한다. 가야산은 풍수의 오성론(五星論)으로 볼 때 화(火)의 기운을 닮은 산이다. 화의 기운을 담은 산 형세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산봉우리가 불타오르듯이 뾰족하여 첨예(尖銳)한 모양을 띠고 있다. 화의 기운은 밝고 명랑하여 수도나 학문을 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본다. 물론 정통의 풍수에서는 양택(陽宅)이건 음택(陰宅)이건 화성(火星)의 산을 주산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인사는 화형의 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화의 기운을 탈바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해인사의 내기인 혈이 최종 뭉친 곳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백련암 뒤를 지나 장경각 뒤쪽에 있는 수미정상 탑이 된다. 이 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돛대바위의 거대한 바위에 기운이 응축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그러므로 가야산에서 내려온 내기의 기운이 수미정상 탑이 있는 거대한 바위에 뭉쳐 해인사 경내로 그 기운이 나누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터의 기운은 가야산 정상에서 내려온 홍류동천의 물줄기가 해인사를 감싸 터의 기운을 경내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해인사의 경내에 명당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사찰의 터는 사람이 사는 터로 궁궐이나 마을처럼 주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경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을 말하지 않고 해인사의 모든 건물이 있는 곳이 혈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택의 혈은 왕릉처럼 음택의 혈보다 크고 그 기운 역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해인사의 수세는 해인사 경내에 모인 기운을 터에 멈추게 하는 외기의 역할을 한다. 풍수에서는 터로 들어오는 기운을 음(陰)의 기운이라 하고, 터 앞의 흐르는 물을 양(陽)이라 한다. 이처럼 음양이 만나면 기운이 생기는 것이다.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해인사 우측 극락교와 홍제교를 지나서, 두리봉 방향의 홍제암과 원당암에서 흘러온 물과 서로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이처럼 해인사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이 외당수가 되어 터의 기운을 머무르게 한다. 터의 기운을 더하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처라 한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 역시 해인사의 외청룡과, 비봉산에서 내려오는 보현암의 우백호가 서로 막고 있어 해인사의 물길이 곧바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풍수에서는 터 안의 물이 산과 함께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산과 물이 함께 빠져나간다고 하여 제일 꺼린다. 이는 터의 기운을 머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현암 앞을 빠져나간 물은 다시 한 번 해인사 박물과 앞에서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가니 매우 이상적인 수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나가기 때문에 해인사의 향을 남향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나 이는 수세보다도 남산제일봉의 화산(火山)의 화기(火氣) 때문이다. 터의 기운이 뭉치게 하는 수세와 함께 해인사 주위의 사신사 역시 기운을 더하고 있다. 해인사의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법당이 된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해인사는 가야산이 기운이 수미정상 탑에 응축하여 그 기운이 장경판전을 지나 대적광전이 있는 법당에 모인다. 그리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뒤의 장경판전이 현무,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양택에서는 산이 멀리 있기 때문에 건물의 좌측을 청룡, 우측을 백호, 명당 앞 건물을 안산, 건물의 뒤를 현무로 여긴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의 가야산이 왕성한 화성체로 해인사의 주된 기운이 되고, 좌측의 남쪽 남산제일봉이 화성체로 청룡방위에서 조응하고, 북쪽 백호 방위에는 두리봉이 조응하며, 해인사 앞에는 비봉산이 봉황의 모양을 하고 날개를 살짝 비켜줘, 멀리 비교적 강하지 않은 조산(朝山인 단지봉을 보고 터를 정하였으니 매우 강한 화(火)의 기운이 주위에서 조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향의 남산제일봉의 화성을 피하여 비교적 순한 금체체의 단지봉을 향하여 향을 잡았다. 해인사의 형국은 보는 각도에서 다양하게 보인다. 먼저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1000m이상의 가야산, 두리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일봉, 사자바위 등의 산이 해인사를 감싼 꽃잎이 되고, 해인사가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여 화심혈(花心穴)의 형국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인사와 해인사 앞에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가야산은 선체가 되고, 해인사는 배의 선실이 되며,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이 되며, 장경판 뒤쪽의 돛대바위는 돛대로 하여 배가 출항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마지막으로 해인사 경내의 배치를 가지고 행주형국이라고도 한다. 해인사는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배가 출항하려는 형국과 같다. 일주문에서 봉황문 그리고 해탈 문까지는 뱃머리가 되고, 장경판전이 있는 곳이 선미(船尾)가 되며, 배의 무게 중심에 대적광전 앞마당의 삼층 석탑이 있고, 산 등허리에 배를 붙잡아 놓기 위해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가 있고,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 큰 느티나무를 심어 땅에 뿌리를 박아 놓았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미정상 사리탑이 있는 곳의 돛대 바위가 돛대가 되니 완벽한 행주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행주형이라한 것은 석존이 큰 교회의 그물을 펴서 인천(人天)의 고기를 건진다는 의미로 하고, 산중의 모양새는 마치 거대한 방주(方舟)와 같다는 불교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해인사의 배치와 비보 해인사의 좌향은 전체적으로 북동쪽에서 남서향을 하고 배치되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남향으로 남산제일봉의 강한 화성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좌향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틀은 남서향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좌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주위 산의 배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해인사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두리봉(1130m)이 있고, 남쪽에는 남산제일봉(1050m)이 강한 화성체(火星體)로 있고, 동쪽에는 사자바위(1064m)가 강한 화성체(火星體)를 가지고 있고, 서쪽은 남산(1113.5m)의 강한 화성체(火星體)가 있어 사방에 모두 1000m가 넘는 화성체의 산이 해인사를 두르고 있다. 그리고 해인사로 들어오는 맥은 북동쪽의 가야산(1434m)이 강한 화성체(火星體)에서 들어오고, 남서쪽은 금성체(金星體)의 단지봉(1030m)이 있다. 따라서 해인사를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남쪽의 남산 제일봉의 화기(火氣)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동안 해인사는 7차례의 큰불이 일어났다. 그래서 1817년 여섯 번째 화재 이후 재건할 때 대적광전의 좌향을 남쪽에서 남서쪽으로 만들었다고 해인사 사적기에 나온다. 따라서 남향을 하면 화기가 충천하여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오나 화재가 일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남쪽의 화기를 막기 위해 남산제일봉에 불을 막는 소금단지를 묻었고 지금도 단오날에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풍수에서 비보란 허결한 부분을 보태어 기운을 보충하거나, 흉한 것을 막기 위해 행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비보 형태는 해인사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허한 부분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일주문 바로 밑에 영지를 만들어 터의 기운을 보완하였다. 둘째, 형국에 의한 비보이다. 해인사는 행주형국이다. 배가 머물고 출항하기 위하여 돛대를 만들었다. 돛대바위의 수미정상 탑이나, 석당간, 그리고 천년 고목의 학사대 전나무,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설치한 대적광전 앞의 삼층석탑, 배가 순항하기 위해 일주문부터 봉황문까지의 일직선 배치 등은 행주형국에 따른 비보이다. 셋째, 흉한 것을 막기 위한 비보로는 먼저 남산제일봉의 화기에 의한 해인사의 화재를 대비한 남산제일봉에 소금단지 묻는 행사이다. 화기를 억제하기 위해 바닷물의 염도가 가장 강한 단오날을 택하여 남산 제일봉에 소금단지를 묻는 행사는 지금도 100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또한 화재시 방어를 위하여 대적광전과 장경판전 사이에 성토를 하여 급경사 계단을 조성하였다. 또한 우두산의 화성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우두산의 연화반개형을 향하여 수도산에 수도암 3층 석탑을 세워 보완하였다. 3) 해인사의 조성과 600년의 번영 해인사의 창건신화는「가야산 해인사고적」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그리고 1817년 여섯 차례의 화재를 겪고 대적광전의 자리를 현재의 남서향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남향으로 하여 훌륭한 도승(道僧)은 많이 나왔지만 화재로 이한 고심 끝에 향을 지금의 남서향으로 한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모바일 앱을 개발하여 제 1 주제는 창건신화를 주제로하여 만들고, 제 2 주제는 해인사의 중창기를 이용하여 만들고, 제 3주제는 빈번한 화재 이후 대적광전의 향을 남서향으로 한 내용과 해인사의 전체적인 형국을 가지고 만들어 전시실에 배치할 수 있다. 4) 해인사의 내러티브요소 1. 해인사는 조산(祖山)인 가야산, 남쪽의 남산제일봉, 서쪽의 남산, 동쪽의 사자바위가 모두 1000m 넘는 거대한 화성체이고, 해인사가 바라보는 남서쪽의 단지봉과 북쪽의 두리봉도 모두 1000m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용세가 강한 화성(火星)의 기운을 가지고 일반인이 사는 터 보다 사찰이나 수도의 터가 되기에 적당하다. 2. 해인사의 혈(穴)은 가야산의 화성 기운이 내려와 장경각 뒤 수미정상탑이 있는 돛대바위에 뭉쳐 그 기운이 대적광전에 뭉쳐 있다. 3. 대적광전의 왼쪽의 관음전과 보경당 등이 청룡이 되고, 우측의 궁현당과 청화당이 백호가 된다. 그리고 해인사를 큰 국세로 보면 조산(祖山)은 가야산, 좌측의 외청룡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신부락 뒷산, 외백호는 두리봉, 안산은 비봉산, 그리고 조산(朝山)이 된다. 4. 해인사의 터를 감싸고 흐르는 물은 해인사 우측 가야산에 골짜기에서 흘러나와 해인사 우측 물과 만나 해인사의 일주문 앞을 감싸고 삼선암과 보현암 앞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빠져나간다. 5. 해인사는 창건시 남향으로 하여 남산제이봉의 화성체의 화기에 의한 화재와, 이후 중건시 향을 남서향으로 단지봉을 향하여 조성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예방한 것이 해인사의 향을 보는 데 제일 중요하다. 6. 해인사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인사 경내의 배치를 가지고 행주형국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경내 배치를 기준으로도 행주형국이라 부른다. 7. 해인사의 비보는 화재를 대비한 비보와, 행주형국에 대한 비보의 요소들이 많이 있다. 8. 해인사의 창건신화와 중건신화를 바탕으로 한 해인사의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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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2회... "평산신씨 시조 신승겸 장군의 묘"한국풍수신문, 박정해 교수의 풍수이야기 2회... "평산신씨 시조 신승겸 장군의 묘" [한국풍수신문] 신숭겸 장군의 묘는 여러 전설이 있고 조선 8대 명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어우러져 더 할 수 없는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눈 오는날 찾아든 묘소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풍수공부를 하면서 이곳을 여러번 찾았왔고 여러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서 풍수이론과 실전에는 차이가 있고 이를 해석하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풍수이론을 곧이곧대로 적용하지 않으면서 8대명당이라는 분류는 어떤 기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 또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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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7회...포은 정몽주 선생의묘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7회...포은 정몽주 선생의묘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 묘 [한국풍수신문]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는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사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PS 충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택이 과연 신[神ㅡ시신을 고향 영천으로 운구하던 중 만장(輓章)날아가 따라가 보니 털어진 곳이 천하명당의 길지라 영천으로 가던 걸 포기하고 만장이 떨이진 길지에 용사했다.]이 점지할 정도로 길지인가?. 문수산(221 1m)에서 발조하여 辛戌인 행도하다 서향인庚酉龍.으로 기복굴곡을 하여 다시 辛戌龍으로 횡룡입수하여 유혈로 취기한 곳이다.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청룡과 백호사(龍虎沙)는 삼중으로 중중히 호종하니 국세가 장엄하면서도 편안하다. 유혈의 당판이라 좌우 선익사가 뚜렷하여야 하는데 인작으로 인해 구별이 쉽지가 않는 곳이다. 내.외사가 중중일때는 내사가 더 우선이라 내사를 중시하면 취기처는 조금 더 윗쪽으로 가야ᆢㆍ청룡보다는 백호가 중중으로 유정하게 호종하니 장손보다는지손. 딸.또는 외손이 더 발음(發蔭)을 받고 발음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좌향(坐向)은 辰坐戌向 庚戌分金 乾亥 破口.다 이는 양공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火局의 정묘향(正墓向)이다.정묘향(正墓向)은 관대룡.우선룡에 좌선수(좌수도우ㅡ水가 絶방으로 나감)로 書에 이르길 신입건궁백만장(辛入乾宮百萬壯ㅡ辛向을 하고 乾方으로 물이 나가면 큰 부자가 됨)이란. 바로 이 향이다. 이는 발부발귀(發富發貴). 人丁이 大旺하며 복수쌍전(福壽雙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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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2회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2회 7. 출산수(出山水): 산에서 물이 흐르듯 내려오는 수성산 8. 전송수(傳送水): 산에서 물이 흐르듯 내려오는 수성산 출산수(出山水)는 높은 산에서 평지로 산이 떨어져 세 갈래로 내려와 가운데 정맥(正脈)을 양 옆의 수성산이 호종(護從)하여 감싸고 내려와 마치 산에서 물이 내려오는 것처럼 내려오는 산을 말한다. 가운데의 정맥(正脈)은 평평하게 내려오는 수성(水星)이다. ➀ 이러한 출산수(出山水)는 수려한 기운이 굽어서 이어져 내려오니 청아하고 기이한 사람이 나오며 귀(貴)하고 또 아름답다. 순수하게 수성체만 있으나 섞여 혼잡하지 않으니 청귀(淸貴)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나온다. ➁ 세 개의 봉우리인 삼태봉(三台)에서 산이 떨어져 내려와 낮은 평지의 산인 평강(平岡)의 수성체가 된다. 삼태봉에서 세 갈래로 내려와 가운데 정맥(正脈)을 양 옆에 봉우리가 있는 삼태(三台)와 관리들이 쓰는 모자모양의 보필(輔弼)을 끼고 있다. 또 둥근 금성체의 산이 함께 호종하고 내려오니 부귀(富貴)가 비할 곳이 없다. 이러한 터는 삼공(三公)과 거부의 터가 된다. 삼공(三公)은 대개 삼태봉(三台)에서 나오고 거부(巨富)는 대개 둥근 창고(倉庫)를 띠고 있는 것이 많다. ➂ 수성산이 물이 흐르듯 서로 전하여 보내어 마치 뱀이 지나가는 것과 같다. 출산수처럼 양 옆의 산을 뚫고 내려오는 산이 아니고, 가운데 정출로 내려 보내 혈을 맺는다. 그러므로 전송수(傳送水)라 한다. 이러한 산은 수려한 선비가 조정에 오르고 이름이 빛난다. 또한 내려오면서 변환이 있고 중앙으로 수성산이 뚫고 나오니 순수하게 수려한 기운을 얻어 귀(貴)하고 명예가 떨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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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1회..."산관인정 수관재물(山管人丁 水管財物)의 출처와 풍수론"(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 박정해)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의 풍수이야기 "산관인정 수관재물(山管人丁 水管財物)의 출처와 풍수론" [한국풍수신문] 풍수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오래된 역사만큼 학문적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편견에 시달리며 미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과 대학원에 학과가 개설되어 석·박사 학위자가 배출되는 현재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미신이라 매도된 배경에는 풍수고전이나 합리적인 논거에 바탕을 둔 논리전개가 아닌, 자신만의 논리에 매몰되어 억지스러운 주장이 난무하는 현실이 한몫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과거의 논리에 매몰되어 억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미신으로 매도되는데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몇몇의 풍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풍수발전에 하등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인 인식만을 키우게 될 뿐이다. 때문에 누구나 납득 가능한 합리적인 논리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재 풍수계는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활용성이 많은 다양한 이점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한 필자의 책임도 크다. 대학원에 학과를 만들고 학생들을 배출하면서 사업모델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능성을 놓고 다각도로 고민중이다. 높은 부가가치로 승화시키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옆에 성큼 다가온 AI 시대에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야 한다. 생존하느냐 도태하고 말 것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선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노력을 하는 한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변신에 따른 고통은 필수적이겠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더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풍수인들이 '화장문화'火葬文化 때문이라고 하는데,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옳은 얘기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훨씬 더 크게 발전하고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데,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까운 맘이 크다. 즉, 현대인들이 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풍수를 사업화해야 한다. 우리는 풍수를 공부하는 동안에 선현들이 하던 말을 아무런 의심없이 사용하였다. "출처나 내면에 숨어있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시도없이 맹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말이 "山管人丁 水管財祿”이라는 말이다. 물은 재물을 관장하고 산은 인물을 관장한다는 말인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려는 시도는 없었다. 필자도 근래에 출처를 찾고자 다양한 풍수 고전을 뒤진 끝에『天玉經』 外篇(上)에 나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균송의 저서로 알려진『天玉經』 에는 "山管人丁 水管財祿”이라 기록하고 있다. 표현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뜻은 같다. 이미 1,000여년 전에 양균송은 물이 재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이중환의『擇里志』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중환은 물자의 유통이 유리한 곳에 돈이 모이고 사람이 살기 좋다는 뜻을 표명했는데, 대량의 물자 유통은 강이나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곧 풍수에서 말하는 수관재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재에도 물자의 유통은 재화 창출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당시 재화 창출의 또 다른 수단이 농사였는데, 쌀을 생산하는데 있어 물은 가장 중요하다. 물이 있어야 쌀농사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자의 유통과 쌀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물이 곧 돈이라는 의미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AI 시대의 생존전략은 곧 논리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술수는 컴퓨터를 통한 빅데이터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논리는 컴퓨터가 인간을 뛰어넘기 어렵다.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논리만이 풍수를 비롯한 동양학이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거와 같이 논리가 아닌 ‘술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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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1회[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1회 6. 평지수(平地水): 평지나 밭으로 지나가는 수성산 [한국풍수신문] 평지수(平地水)는 산이 평지에 내려와 다리(水脚)모양이 수성처럼 단정하고 둥글다. 평지(平地)로 수성체가 지나가니 밭이 평평하지만 층이 지어 높은 곳에 수기(秀氣)가 모인다. 그러므로 평지에서는 한 치만 높아도 산이고 한 치만 낮아도 물이라(高一寸爲山, 低一寸爲水) 했으며 약간 높은 곳이 좋은 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지에서 터가 되는 곳은 밭이 평평하지만 다른 무리의 밭보다 높은 곳을 말한다. 이처럼 밭으로 된 땅에서는 지나가는 맥(過脈)이 주위의 땅보다 높아야 지나가는 맥이 분명(分明)게 보인다. 이것이 맥을 보는 중요한 이론이 된다. 평지(平地)로 맥이 지나가고 밭에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에 수기(秀氣)가 모이는 곳이므로 공경(公卿)이 나온다. 만약 흐리게 나타난 평평한 밭이라면 높고 낮음을 분별 할 수 없다. 즉 산맥의 기운이(氣)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과룡처(過龍處) 이니 터로 쓸 곳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터에서는 좌우 앞에 약간 높은 밭들이 청룡, 백호, 안산이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평지의 밭으로 맥이 지나가면 비록 밭에 있는 터라도 형상(形象)이 참되어 진(眞)이니 터를 취할 수 있다. ➀번의 산도는 산에서 밭으로 내려와 본신으로 2중 3중으로 청룡 백호를 만들고 안산을 만들어 혈을 만드니 제1귀(貴)가 된다. ➁번은 산에서 평지로 내려와 용호(龍虎)를 만들고 본신안산을 만들어 제 2귀(貴)가 된다. ➂번은 높은 산에서 평지로 내려와 용호를 만들고 외래안산(外來案山)을 만들고 앞의 나지막한 밭을 안산으로 하니 제 3귀(貴)가 된다. 이러한 터에서는 부(富)와 귀(貴)가 함께 나타나고 공경(公卿)이 함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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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6회 ....조선 개국의 발음을 한 준경묘(濬慶墓)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6회 조선 개국의 발음을 한 준경묘(濬慶墓)입구에서 본 준경묘(濬慶墓) 전경 [한국풍수신문] 준경묘(濬慶墓)는 이양무 장군의 묘다. 이양무[李陽茂, ? ~ 1231년(고종 18년).는 본관 전주(全州)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장군[(將軍)을 지냈다. 조부 : 대장군 이용부(大將軍 李勇夫) 아버지 : 내시집주 이린(內侍執奏 李隣) 태조 이성계의 현조부(5대조)이다. 전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아들인 이안사와 삼척(三陟) 활기리(活耆里)로 이주하여 1231년(고려고종 18년)까지 살았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에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묘는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있으며 신좌을향이다.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조선왕조가 장자보다 중자들이 계통을 잇게 되었다.한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이 이곳에서 죽자, 목조대왕은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산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고 한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개토제(開土祭) 때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강원도 삼척의 마을인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덤은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그리고 대한제국기인 1899년에 이르러 황실에서는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하고 노동의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濬慶墓), 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PS 조선 개국의 발음처로 알려진 준경묘(濬慶墓)묘역 사방이 5봉으로 5백 년을 이루었다. 하여 천하 대명당으로 보고 있다는데 어떤가? 두타산에서 출발한 용은 지현굴곡으로 박환을 하여 금체의 주산을 이루고 다시 위이굴곡을 하여 신술룡(辛戌龍)으로 입수를 하였다.혈형(穴形)은 와겸유돌(窩鉗乳突) 중에서 유형(乳形).이다혈장의 당판은 옹골차면서도 튼실하다 혈장 크기 상하(上下).사세는 용립(聳立)으로 주인인 혈장을 압도하니 자식들이드셀 것이다. 단점.은 용호(龍虎)의 용립(聳立).에 좌견(左肩)이 함몰되어 중자(中子)에 변고가 있을 것이다. 안산은 백호 안산으로 장손보다는 지손이 더 득세할 형국이다. 끝은 무정(無情)하게 달아나므로 종국에는 음(陰-여자)의 배반이 있겠다. 묘의 좌향(坐向)은 신좌을향(辛坐乙向)에 갑묘파(甲卯破).로向上의 녹방위(祿方位)를 충파하니 소황천(小黃泉)이다. 소황천은 궁핍하고 요수(夭壽)하니 용진혈적하지 않으면 극히 삼가야 한다. 취기와 이기상으로는 경유좌(庚酉坐) 갑묘향(甲卯向)에 을진파(乙辰破)로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으로 해야만이 합당하다.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은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유유쇠방가에 합당하여 양공(楊松)의 진신수법(眞神水法)이다.이는 발부발귀(發富發貴)는 물론 수고(壽高)하며 인정(人丁)이 왕한다.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정자각 비각안에 있는 묘비 준경묘 설명 앞에서 본 준경묘(濬慶墓)ㅡ가져온 주과포로 기본 예를 표하고 도두에서 본 준경묘(濬慶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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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0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10회 5. 누시수(漏腮水): 터 옆에서 새어 나오는 물 풍수지리 경전인 금낭경(錦囊經) 에서는 산이 출발하는 곳에서는 물이 함께 따라 출발하고, 터에 이르러 산이 멈추면 물도 함께 따라 멈춘다고 하였다. 따라서 내오는 산맥이 터에 이르기 전 좌우에서 마치 양쪽 목이나 뺨에서 샘물이 나오면 이는 산을 따라 내려오는 기운이 누수되는 것이니 이를 누시수(漏腮水)라 한다. 이는 터로 들어오는 기운을 설기(泄氣)하는 것이니 흉하여 터를 만들지 못한다. 이처럼 터의 뒤나 목 근처의 양 옆에 있으면 누시수가 되어 쓰지 못한다. 그러나 터를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 물러나 떨어져 샘이나 연못(泉池)이 있으면 이것은 혈을 감싸고 앞으로 나아가는 물이 된다, 이것은 진응수(眞應水)라 하여 혈이 참됨을 나타내는 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응수는 산을 따라 내려온 물이 터를 감싸고 앞에서 모여 만든 물이니 터에 좋은 기운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터의 배후에 연못이나 물이 있으면 이는 터로 좋은 기운을 밀어주기 때문에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매우 좋은 기운을 터에 더하게 된다. 또한 터의 앞에 있는 산의 뒤에서 연못이나 큰물이 있으면 이것은 암공수(暗拱水)가 된다. 암공수는 터의 안산 명당 밖에서 터로 기운을 밀어 주는 기운이 되며 이러한 암공수(暗拱水)는 부(富)의 기운이 된다. 즉 뒤에서 밀어주는 공배수는 관(官)의 기운이 되고, 터의 앞에서 밀어주는 암공수는 부(富)의 기운이 된다. 또한 청룡이나 백호의 끝에서도 샘이나 물이 나오는데 이 또한 터에 좋은 기운을 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터에서는 터의 바로 위나 옆에서 나오는 물은 터로 들어오는 기운을 빼내는 누시수가 되어 제일 나쁘고, 명당 앞이나 조산의 뒤 그리고 안산의 뒤에서 밀어주는 수의 기운은 공배수와 암공수로 매우 좋은 기운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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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2회... "국사등재형의 명당 능길마을"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2회 [한국풍수신문] 국사를 배출시킨 국사등재형의 명당 능길마을 스토리텔링 1. 마을 현황 능길(能吉)마을은 동향면의 북쪽 국사봉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위쪽에 위치한 웃담을 상능(上能), 아래쪽에 위치한 아래담을 하능(下能)이라 부르고 이 두 마을을 합쳐서 능길(能吉)마을이라 부른다. 마을 앞에는 무주군 안면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흐르고 하천을 중심으로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하천을 따라 능길마을 아래를 추동(楸洞)마을이라 부른다. 능길마을은 지금으로 부터 약500여 년 전 양씨(梁氏), 정씨(程氏), 백씨(白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진안군지(鎭安郡誌)에 나와 있다. 문헌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공조참판을 지낸 정재영(丁載榮)[1798~1876])의 기록과 지선당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500년 전 부터 정씨(丁氏)도 함께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박씨, 홍씨, 백씨, 이씨, 유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2.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 1) 터를 만드는 출신 능길마을은 백두대간의 덕유산이 서쪽으로 구량천을 따라 50여 리를 내려와 마을 뒤에 국사등재형(國師登帝形)의 명당을 만드는 국사봉을 만들고, 그 아래 능금리의 상능길, 하능길, 추동마을, 외금마을의 4개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능길마을을 이루는 지세의 출신은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시작한다. 덕유산 정상에서 아래로 설천봉을 지나 무주리조트를 이루는 주산인 웅장한 두문산을 만들고, 서쪽으로 내려와 노전봉 아래서 안성재의 과협을 건넌다. 그 형상이 마치 거대한 용이 하늘에서 달려 내려오듯 기세가 웅장하다. 안성재의 과협을 건넌 지세는 대전통영 고속도로 위의 어둔산을 건너 마치 용이 승천하는 기세로 높이 올라 안성의 진산인 뾰족한 봉화대가 있는 봉화산을 만든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와 다시 서쪽으로 달려 마을 어귀에 있는 노루재의 과협에 다다르니 여기까지가 안성면을 만드는 지세가 된다. 안성면을 만들고 남은 지세는 노루재를 건너 힘차게 올라가 등근 귀인봉을 만들고 나서 마을의 진산인 국사봉을 만들어 거대한 귀인이 팔을 벌리고 승천하듯 웅장하게 마을의 뒤에서 호위하고 있다. 그 형상이 마치 국사가 하늘로 올라 등제하는 형상인 국사등재형이 된다. 그리고 그 지세는 마을에 이르러 상능길과 하능길, 추동마을을 품고 그 남은 기운은 국사봉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 목성체(木星體)의 성주봉을 일구고 그 아래 용담향교가 있는 외금마을의 연화부수형 명당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보면 덕유산이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안성의 봉화산이 중조산(中祖山)이 되며, 마을 뒤의 국사봉이 주산이 된다. 그리고 마을 앞을 구량천이 감싸고 흐르며, 백두대간의 삿갓봉에서 내려와 마을 앞 구량천을 감싸고 있는 산이 마을 앞 안산(案山)이 된다. 그 형상이 마치 신령스런 선학이 봉림산에서 내려오는 뱀을 잡는 선학포사형(仙鶴捕蛇形)이다. 그리고 마을의 좌측인 청룡은 덕유산에서 내려와 안성을 만드는 지세가 되며, 우측 백호는 국사봉 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보면 백두대간의 덕유산이 마치 거대한 용처럼 꿈틀대며 마을을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마을의 기운은 온화하며 마을 앞 구량천을 따라 넓은 구량들은 마을사람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이 된다. 2) 터의 내기와 외기 한(漢, 기원전 202년 ~ 220년)나라 때 만들어진 풍수경전(風水經典)인 청오경(靑烏經)에서는 터의 기운을 내기(內氣)와 외기(外氣)로 설명하고 있다. "터의 내기는 생명을 싹 티우고(內氣萌生), 터를 감싸는 외기는 성품을 만든다(外氣成形)”고 하였다. 이것이 풍수(風水)이며 이러한 내기와 외기가 서로 기운을 타면 풍수(風水)는 스스로 이루어진다(風水自成)이라 하였다. 즉 마을을 만드는 터의 기운은 내기가 되어 장차 태어날 인물이 되는 씨앗이 되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물, 바람, 햇볕, 공기가 그 씨앗을 길러 훌륭한 인물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나라 때 복응천(卜應天)은 설심부(雪心賦)에서 땅의 기운이 사람을 만든다는 "지령(地靈)은 인걸(人傑)”이라 하였다. 따라서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을 논하기 위해서는 마을을 만드는 지세인 출신(出身)의 내기(內氣)를 살피고, 그 다음에 마을의 형세인 외기(外氣)를 살펴 마을의 정체성을 파악 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신경준이 만든 산경표(山經表)에는 능길마을을 이루는 내기(內氣)인 출신(出身)의 기운이 백두대간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부터 시작한다. 덕유산은 그 정상이 평평한 토성체(土星體)와 둥근 금성체(金星體)로 후덕한 산이 된다. 그래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태조산인 덕유산은 후덕한 기운을 가지고 출발한다. 덕유산에서 설천봉의 지나 무주리조트를 만드는 웅장한 두문산은 그 형상이 둥근 금성체(金星體)이다. 오행으로 토(土)는 금(金)을 생(生)하니 토생금(土生金)으로 두문산이 금성체가 된 것이다. 두문산에서 안성제 과협을 지나면서 지세의 기운은 다시 충전하여 대전통영 고속도로위 어둔산을 지나 마치 용이 승천하는 기세로 높이 올라 뾰족한 봉화산을 만들어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형상이 뾰족한 화성체(火星體)가 된다. 화성은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둥근 금(金)을 만나면 달구어서 도검(刀劍)을 만들 수 있으니 그 기질이 무관(武官)이 된다. 따라서 봉화산을 진산으로 하는 안성은 무관의 기운이 매우 강한 터가 된다. 그리고 덕유산 자락의 삿갓봉에서 안성의 평장마을로 내려오는 지세 역시 뾰족한 화성체로 장차 무관의 기운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안성은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토생금(土生金)의 기운과 봉화산의 화성체(火星體)의 기운으로 무관의 기운이 강하게 나타난다. 안성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는 고려 때의 원(元)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일본 토벌에도 참여한 명신(武臣) 충간공 참정 김신(金侁)을 주향으로 하고,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인 삼부자 충신 장필무(張弼武)와 아들 장의현·장지현과 김희옹(金希雍)을 배향하고 있는 죽계서원(竹溪書院)이 있다. 이처럼 무관이 나온걸 보면 터의 기운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안성의 봉화산에서 서쪽으로 장안리 노루재를 건너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지세는 매우 힘이 있다. 안성에서 강한 화(火)의 기운으로 무관의 기운을 일으킨 덕유산의 후부한 토(土)의 기운은 마을에 이르러 노루재를 건너 둥근 금성체(金星體)와 물결처럼 수려한 수성체(水星體)를 만들고 다시 후덕한 귀인봉을 만든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지나 마을의 주산인 둥근 금성체의 국사봉을 만든다. 국사봉은 마을의 주산이 된다. 마치 국사가 팔을 벌리고 하늘로 오르듯 웅장한 자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노루재에서 국사봉까지 이르는 지세의 기운은 금수상간(金水相間)으로 부귀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금은 물을 생하며(金生水), 물은 금을 깨끗이 씻으니(水生金) 금(金)과 수(水)는 서로 제일 잘 어울리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당대(唐代) 명당경(明堂經)에서 일행(一行)은 이를 하늘에 비유하여 태양 다음에 수성이 나오니 물은 만물의 기본이 되고, 태양의 비(妃)가 되며, 수성은 금성과 처음으로 만나니 만물의 시작이 됨을 알린다 하였다. 그래서 금과 수의 만남을 금수상간(金水相間)이라 하여 부귀를 나타낸다. 헌출하게 둥근 국사봉의 금성체는 다시 하나의 지맥을 남서쪽으로 내려 높은 목성체(木星體)를 만들고 산의 임도를 지나 평평한 토성체를 만들어 그 아래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 기운은 국사봉 아래 나무를 쇠로 다듬어 기물을 만들어 쓸 수 있으니 문장가와 문관(文官)의 기운을 만든다. 그러므로 마을은 국사봉은 문관의 기운이 강한 터를 만들어 장차 문관으로 나라의 일을 논하는 국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국사봉은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의 주산이 되며, 국사봉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온 마지막 자락을 구량천이 감고 도는 마을이 외금마을이 된다. 그러므로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은 나라의 일을 논하는 국사의 탄생을 예고하고, 국사봉에서 문필봉을 지나 마지막 자락에 있는 외금 마을은 문장가로 학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능길마을 터의 기운이 되는 내기(內氣) 이다. 능길마을과 추동마을 터의 기운을 만드는 외기(外氣)는 능길마을을 감싸고 있는 좌측의 청룡과 우측의 백호, 마을 앞의 안산과 멀리 있는 조안산,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과 바람이 된다. 마을의 좌측을 감싸고 있는 청룡자락은 덕유산에서 안성을 거쳐 노루재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 되며, 우측은 국사봉의 우측자락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덕유산 삿갓봉에서 내려와 안성 IC를 거쳐 매방재산에서 구량천을 따라 마을 앞을 감싸고 있는 후부한 토성체(土星體)의 산이 마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마을의 안산은 산 정상이 평하고 양끝이 약간 둥글어 마치 영개굴들의 학이 봉림산에서 내려오는 뱀을 잡으려 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을의 안산 역시 후부한 부위 기운을 가지고 있다. 능길마을의 터의 기운을 만드는 외기(外氣)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좌측의 청룡과 우측의 백호, 마을 앞의 안산과 멀리 있는 조안산,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과 바람이 된다. 마을의 좌측을 감싸고 있는 청룡자락은 덕유산에서 안성을 거쳐 노루재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 되며, 우측 백호는 국사봉의 우측자락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덕유산 삿갓봉에서 내려와 안성 IC를 거쳐 매방재산에서 구량천을 따라 마을 앞을 감싸고 있는 후부한 토성체(土星體)의 산이 마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마을의 안산은 산 정상이 평하고 양끝이 약간 둥글어 마치 영개굴들의 학이 봉림산에서 내려오는 뱀을 잡으려 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을의 안산 역시 후부한 부위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재물이 되는 수세(水勢)는 덕유산 아래 안성에서 발원하는 구량천의 물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 추동마을을 거쳐 내금마을 에서 흘러나오는 양악천과 만나 외금마을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의 외기는 완벽하게 마을의 기운을 더하니 내기(內氣)인 터의 기운은 매우 좋은 기운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마을의 안산 뒤 내금마을에서 흘러나오는 양악천은 마을의 기운을 안산 너머에서 더하는 암공수(暗拱水)가 되고, 국사봉 뒤의 거대한 용담(龍潭)은 마을 뒤에서 기운을 밀어주는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마을의 기운을 한층 더 배가(倍加) 시킨다. 특히 마을의 뒤에서 밀어주는 기운인 공배수는 2001년도에 착공하여 그 기운으로 이 마을에서 나라의 국사를 논하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김선수 대법관 그리고 2명의 사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3. 국시를 탄생시킨 용의 기운 능길마을과 추동마을의 기운은 함께 국사등재형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마을 터의 내기는 문관의 기운을 가지고 있고, 터의 사람을 만드는 외기를 만드는 조안산(朝案山)은 후부하고 용담댐의 공배수(拱背水)와 양악천의 암공수(暗拱水)가 더하여 마을 터의 기운을 완성한 것이다. 정세균 국무총리의 부모역으로 들어오는 용의 출신은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시작된다. 덕유산은 덕이있어 여류로운 산으로 토성채(土星體)이다. 토성은 모든 것을 진압하고 다스리는 기운으로 재물과 제왕의 터를 만든다. 덕유산에서 두문산의 금성체를 지나니 토생금(土生金)으로 금의 기운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안성재 휴게소에 이르러 후부한 노전봉을 일구고 대전통영 고속도로의 오두재 터널의 어둔산을 지나 안성의 진산인 봉화산을 일군다. 안성의 봉화산은 880m의 아름다운 염정(廉貞) 화성체(火星體)로 녹(祿)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녹의 기운은 금을 녹이면 칼을 만드니 무관이 되고, 나무를 태우면 빛이나니 문관의 기운을 만든다. 봉화산에서 남서쪽으로 머리를 돌려 안성을 지나 부남면 장안리 노루재를 지나 능길 마을 뒤에 웅장한 금성체의 국사봉(國師峰) 만든다. 그리고 국사봉에서 아래로 내려와 목성체(木星體)의 문필봉을 만들고 임도(林道)를 지나 평평한 토성체(土星體)를 만들고 산 정산에서 지맥을 내려 터를 만든다. 따라서 터에 이르는 용의 출신은 덕유산이 태조산이 되고, 봉황산이 조종산이 되며, 국사봉이 할아버지 산인 조산(祖山)이 된다. 그리고 출신의 기운은 국사봉의 둥근 금(金)기운이 아래에 있는 목성체(木星體)인 나무를 만드니 문관의 기운이 강하다. 그리고 목성체는 그 아래 현무봉의 토성체(土星體)의 흙에 뿌리내리니 무척 강한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조산인 국사봉에서 현무봉까지 이어지는 터의 내기(內氣)는 장차 문관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조산에서 부모산을 거쳐 터로 내려오는 기운은 현무봉에서 개장 천심하여 좌측으로 청룡을 만들고 우측으로 입수룡과 백호를 만들어 혈장을 만들고 터의 내기를 완성한다. 청룡을 완연하고 백호는 반거(盤居)하니 터의 기운이 장경에서 이르는 대로 완벽하다. 특히 청룡자락 위에 서 있는 두 봉우리는 석모룡(席帽龍)으로 조정에 드는 기운을 가지도 있다. 또한 청룡자락 밖 불당골에 있는 저수지는 기운을 밀어주는 암공수가 되어 기운을 더하고 있다. 안산은 본신(本身)에서 나온 백호가 되며 매우 가깝다. 그리고 청룡이 3~4겹 감싸고 백호 역시 3~4 겹으로 매우 강하게 감싸고 있어 터의 기운은 무척 강하다. 태조산에서 부터 터에 이르는 기운이 내기(內氣)로 품성을 만든다면 청룡과 백호 물과 안산 그리고 조안산은 터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완성한다. 만약 터의 내기가 제왕의 기운이라면 밖을 감싸는 기운이 도와주어야 제왕이 된다. 터의 씨앗이 되는 내기는 문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의 외기 역시 안산과 조안산이 매우 특이하다. 안산은 가까워 빠른 발복을 나타낸다. 그리고 조안산(朝案山)에 있는 세 개의 금성체는 풍수에서 품자삼태를 나타낸다. 품자 삼태는 삼공성(三公星)으로 삼공인 재상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개의 귀인봉은 마치 연달이 있는 창고 모양으로 연오창(連敖倉)이 된다. 연오창은 대부귀( 大富貴)을 주관하여 재상의 응함이 있다. 따라서 내기의 기운을 완성시키는 외기는 재상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장차 재상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조산을 뒤로 감싸고 금강물이 되는 거대한 용담땜이 흐르니 터에 기은을 더해주는 공배수가 된다. 따라서 터의 기운은 내기와 외기 그리고 터의 뒤에서 밀어주는 기운으로 매우 강한 가운을 가지고 있다. 풍수의 고전에서는 터의 발복 년도를 1기(紀)인 12년으로 하고 있다. 보통은 조(祖)와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참고하여 그 응험을 예측하나 이 이 터는 발복이 빠르니 부모의 묘에서도 그 응함을 볼 수 있다. 전채적의로 발응은 다음과 같이 논할 수 있다. 첫째; 터에서 태어나는 내기의 기운은 조산에서 현무봉까지 금, 목, 토의 변화로 문(文)의 기운이 나온다. 둘째; 터의 기를 완성하는 외기는 삼공(三公)의 기운으로 재상(宰相)인 장관, 국회의장, 국무총리가 나올 수 있다. 셋째; 발복 시기는 안산이 가까워 2~30년 안에 가능하다. 넷째; 발복 공위(公位)는 우선룡 으로 입수하여 차남이 가능하다. 다섯째; 선대에 조성한 천반산 터의 천교혈(天巧穴)의 옥루보전(玉樓寶殿) 조안산은 제왕의 기운이 있다. 4. 능길마을 사람들이 만든 문화 1) 깃고사 진안군 지역에서는 기를 세우면서 제의를 행하는 것을 깃고사라 한다. 진안 지역 깃고사는 기세배와 다르게 기를 세우고 제의를 행하는 것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진안군 지역에서는 현재 동향면 능금리 능길 마을과 백운면 백암리 상백 마을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능길 마을 깃고사는 상능 마을과 하능 마을이 함께 지낸다. 역사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을 형성 연대와 관련하여 1800년대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에는 ‘능사사명(能社司命)’이라 새겨져 있는데 그 의미는 능길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능길 마을에서는 깃고사를 지내면서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 때문에 일종의 당산제 성격을 띠고 있다. 현재 깃고사 때 사용하는 기는 1999년에 제작한 것으로 그 이전인 1982년에 제작해 사용했던 기는 보관 중이다. 능길 마을 깃고사 기의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는 큰 기와 작은 기가 있다. 큰 기는 1999년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기의 훼손 정도가 심하면 다시 제작하여 사용한다. 기는 흰 천으로 직사각형 3×5m 정도의 크기이며 검은 천으로 테두리를 쳐 놓고 있다. 가운데에 ‘능사사명(能社司命)’이라 새겨져 있고 한쪽에 서기 199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새겨져 있다. 2개를 세우는 작은 기는 영기(令旗)라 부른다. 검은 천에 영(令)자가 새겨져 있다. 깃대는 대나무에 새끼줄을 감아 놓은 형태이며 크기는 7m 정도 된다. 깃대는 마을에 2개가 있으며 마을 창고 처마에 보관하고 기는 마을 회관에 보관하고 있다. 깃대 맨 위에 장식하는 것을 ‘꿩장목’이라고 하는데 흔히 꿩 깃털로 장식한다. 능길 마을에서는 꿩 깃털이 없어 깃고사를 지낼 때마다 짚으로 꿩장목을 장식한다. 꿩장목 바로 아래에 흰 천으로 감아 놓는 것을 ‘머리태’라고 한다. 흔히 영기에서는 꿩장목 아래에 수염을 다는데 능길 마을에서는 흰 천을 달아맨다. 기를 세워 묶을 수 있는 3개의 긴 끈이 필요하며 3~4개의 버팀 쇠가 필요하다. 기는 예전에는 논에 세웠으나 지금은 능길 회관 앞에 세운다. 능길 마을 깃고사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오전 10시 경에 지낸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기를 달아매어 놓은 후 2월 초사흗날에 뗀다. 제주는 섣달에 대동회에서 결정하며 동네에서 궂은 일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정하며 상능과 하능 교대로 정한다. 비용은 논 10마지기, 밭 400평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백설기, 삼색실과, 탕, 전 등을 준비하며 축문은 박찬언이 매년 시정하여 준비한다. 기 세우는 절차는 회관 앞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진행한다. 먼저 창고 처마에 보관 중인 깃대를 내려놓은 후에 깃대 끝 부분에서 2m 정도 아랫부분에 기를 묶는다. 이어 짚으로 만든 ‘꿩장목’을 깃대 끝 부분에 묶는다. 그리고 ‘꿩장목’ 바로 아래에 ‘머리태’라 하여 흰 천을 묶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를 세운다. 이와 함께 작은 기 2개도 함께 묶는다. 기를 세울 때에는 미리 세 곳에 버팀 쇠를 박고 세 줄의 끈으로 균형을 이루게 하여 팽팽하게 묶는다. 기를 세울 때 풍물을 울린다. 기를 세운 후 기 바로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풍물을 치면서 시작된다. 제의는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선정해 전통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제물장만은 상능마을 이장 집에서 준비하였다. 제물 역시 일반 제사 때 준비하는 음식과 같다. 제를 마친 후 소지를 올리는데 초헌관, 중헌관, 종헌관이 소지 하면서 제를 마친다. 한 달 후에 기를 내려놓는데 이때 특별한 제의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능금리 능길 깃고사 [能金里能吉-告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5. 멀티유즈 콘텐츠 개발과 마을의 희망 능길마을은 국사봉의 자연환경과 마을의 깃고사 문화를 원천소스로 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할 수 있다. 막연히 몇 명의 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적인 측면에서 현재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스토리로 차별화를 구성해야 한다. 국사봉의 이미지를 국사와 연계한 국사등재형 명당을 이용한 마을 정체성 확립과, 마을 홍보 안내판 제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국사등재형의 지세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을탐방로 설치와 해설은 마을의 진정성을 증가시킨다. 특히 지선당의 대학 이념과 효경의 이념을 부각시킨 "수신제가 입신양명”은 연계프로그램으로 체류형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을의 문화인 깃고사를 활용한 놀이문화와 농업의 중요성, 농자천하지대본의 의의를 체험 할 수 있는 깃고사 놀이를 개발하여 체험객에게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 할 수 있다. 이것이 마을의 차별화이며 콘텐츠개발 전략이 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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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9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9회 4. 지지수(地池水): 연못으로 된 수 지지수(地池水)는 연못(池)을 말하며 연못의 오행 모양을 말한다. 이러한 연못은 산을 타고 흐르는 물이 뭉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연못(池)은 용(龍)을 기르고 혈이 멈추는 증험을 표시하니 진응수(眞應水) 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연못은 기운(秀氣)이 모이는(鍾)곳이니 공경(公卿)의 기운을 나타낸다. 이러한 지지수의 형태 역시 일반 산의 오행 형태와 함께 유추한다. 즉 그 모양이 곧고 길면 목성(木星)으로 문관의 기운을 대하고 있고, 가장자리가 뾰족하면 화성(火星)으로 녹의 기운을 대하고 있고, 모양이 모나면 토성(土星)으로 재물의 기운을 대하고 있고, 모양이 등글면 금성(金星)으로 무의 기운을 대하고 있고,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너울거리면 수성(水星)으로 수기(秀氣)를 대(帶)하고 있다. 지지수에서 수(水) 화(火) 두 격은 수화기제(水火旣濟)가 되어 귀(貴)를 주관한다. 또한 수형(水形)은 각(角)이 둥근 것으로 모두 수성(水星)으로 터 앞의 연못(池)을 말한다. 이러한 연못의 오행은 반드시 터로 내려오는 본신(本身)의 오성산이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취하는 바를 보아 마땅히 어느 성(星)을 얻어야 하는 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터로 내려오는 본신의 산이 목(木)이면 수성과 토성이 적당하고, 화성이면 토성, 수성이면 금성, 금성이면 수성과 토성, 수성이면 금성이 적당하다. 이처럼 연못의 오성(五星)이 내려오는 산의 오성을 생(生)하는 바를 얻으면 대귀(大貴)하다. 또한 이러한 지지수(地池水)는 대룡(大龍)이 지나가다 끊어져 가는 곳에는 반드시 좌우에 연못(池)이 있다. 작은 소룡(小龍)이 끊어져 옴폭 들어간 좌우에도 역시 연못(池)이 있다. 이러한 곳은 반드시 귀(貴)하고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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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5회... 적멸보궁(寂滅寶宮)의 기도터-설악산 봉정암(鳳頂庵) · 풍수지리■ 적멸보궁(寂滅寶宮)의 기도터-설악산 봉정암(鳳頂庵)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 중인도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였던 적멸도량을 의미한다."적멸"은 모든 번뇌가 소멸돼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으로 불가에서는 성지 중의 성지로 여기기에 남녀노소는 물론 원근(遠近).고저(高低).험양(崄壤)를 따지지 않고 참배 수행은 물론 기도(祈禱)및 기원을 위해 불철주야 찾는 곳이죠.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 했다는 설악산(1708m) 봉정암(1224m)은 5대 적멸보궁 중에서 제일 영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죠.북현무 주산은 우람한 목성체 암반이고 좌우용호 또한 괴암괴석과 고봉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중심에 자리잡은 대웅전의 중앙자리(사진5)는 주인자리로 손색이 없는 곳이니 수행자나 기원.축원을 원하는 분들은 꼭 이용해보시라 추천합니다. 대웅전 좌향은 진좌술향.사리탑 좌향은 축좌미향으로 두 곳 다 재물과 관계 있으니 사업하는 사람이기원.축원하면 더 운발이 설 수 있는 곳이네요,허공기도를 원하는 분은 사리탑 앞에서 하시고 건강.수행,지혜.소원.축원.기원...등을 원하는분들은 대웅전내 중앙에서 하시면 좋겠습니다.고봉이고 괴암.괴석에서 흐르는 맑은 영심천을 따라 수렴동계곡,구곡당계곡,용소폭포,관음폭포 쌍용폭포를 지나 깔딱고개를 따라 올라가니 눈에 아련히 들어 온 고찰이 봉정암....초행자도 쉽지 않는 코스(백담사에서 약10.5km)라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십이 좋습니다. P.S5대 적멸보궁은?1.오대산의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 2.설악산의 봉정암의 적멸보궁. 3.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4.태백산의 정암사 적멸보궁. 5.양산 영취산의 통도사 적멸보궁.적멸보궁은 寂(편안.열반).滅(멸하다)寶(보배) 宮(궁궐.종묘)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부처님이 미혹(迷惑)의 세계를 벗어나 적멸(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의 날을 누리는 곳으로 불상이나 후불 탱화도 없고 불단에 방석만 준비되어 있으며 법당 바깥에 사리를 모신 탑이나 전각을 말하죠.봉정암은 조계종 제3교구인 백담사(百潭寺)의 부속암자로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져와 이곳에서 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하였으며.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鳳頂)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기에 "봉정"이라 했다,한다.헌데 보물 제1832호인 봉정암 오층석탑은 자장 율사가 사리를 봉안하였던 때보다 훨씬 후대의 양식을 띠고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기단부를 따로 조성하지 않고 자연의 암반 위에그냥 탑신을 안치하였으며, 탑신 자체는 잘 정제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5층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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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8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8회 ⓷ 행지수(行地水): 평양으로 지나가는 수성 ➀ 행지수(行地水) 이것은 낮게 땅으로 지나가는 수성이다. 이러한 행지수는 반드시 초목이 있어야 청귀(淸貴)함이 나오고 수려한 기운(秀氣)을 가지고 있다. 행지수(行地水)란 모두 낮은 산의 평강(平岡)이니 반드시 옆에 있는 각(脚)과 수(手)가 고르게 머물러야 좋다. 청(淸)과 귀(貴)가 나오고 수기(秀氣)가 있다. 또한 행지수의 지나가는 나눔이 세 갈래로 나란히 나누어 지나가면 반드시 가운데 갈래(路)가 바른 것이 된다. 만약 가운데로 나가지 않고 곁의 줄기에 터를 정하면 역시 역량이 가볍고 작다. 이처럼 산의 용맥(龍脈)도 관직(官職)의 등급(等級)과 같으니 높은 관직은 가운데(正出)에서 나온 곳에 머무른다. ➁ 행지수(行地水) 낮은 산에 지각(山脚)이 있고 반저 반고(半低半高)로 평지에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 지나가는 산이다.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산의 봉우리는 평지의 산(平岡)에 봉우리가 일어난 것이다. 높은 관직의 공경(公卿)이 태어나는 곳이 이러한 땅이다. ➂ 행지수(行地水) 낮게 지나가는 산의 양 옆에 지각(脚)이 나와 마치 날아가는 것 같고 구름과 같다. 이러한 산의 행진은 정(情)이 있다. 또한 아직 좋은 터를 만들지 않았지만 부귀(富貴)한 기운이 붙어 있다. 날아가듯 펼쳐서 층층이 나오며(層出) 모두 구름모양의 머리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산의 행진은 부귀(富貴)가 남의 힘을 빌려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 좋은 터를 만든다. ➃ 행지수(行地水) 낮은 산에서 평지로 중심을 뚫고 나와 마치 물결 같이 땅의 좌우가 가지런하게 펼쳐져 내려온다. 산의 모양이 마치 오동나무의 가지와 같이 균형이 바르게 있어 부귀쌍전(富貴雙全의 터를 만든다. 이러한 형태의 산을 매우 좋은 오동지(梧桐枝)라 부른다. 특히 지각이 좌우로 바르고 기운이 가운데로 지나가니 수려한 기운이 가장 많다. ➄ 행지수(行地水) 낮게 평지로 지나가는 산의 다리(地脚)가 뾰족하면 화성의 기운이 되고 약간 둥글면 수성의 기운이 된다. 이 그림은 땅으로 낮게 행진하는 수성체이나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러 있고, 다리의 지각에 수성과 화성이 어지럽게 섞여 수화상집(水火相什)이다. 그러므로 흉(凶)이 된다. 이러한 곳에서는 터를 만들지 못한다. ➅ 행지수(行地水) 수성산이 중앙으로 나와 서로 다리를 마주 하고 있으나 다리가 반대로 뒤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산은 역룡(逆龍)이라 하여 반역의 기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흉하다. 또한 앞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수성산과 화성산이 어지럽게 섞여 수화상집(水火相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터에서는 배신을 하는 기운이 있고 부모에게 불효(不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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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7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7회 1. 수성(水星): 秀星(수려한 기운) 수성산(水星山)의 형태는 산 정상이 마치 물결이 흐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성산은 산 높은 산의 정상에도 있고 평지에도 있다. 높은 산의 수성은 산 정상이 물결이 일어나고 흙무더기가 쌓인 것처럼 봉우리가 일어난다. 또한 높은 고산의 수성은 산 정상에서 아래로 물결같이 흘러내리는 무늬(溜紋)가 있는데 칠 팔 갈래로 내려와 나뉘고 다리에 붙어있는 지각(支脚)이 둥글다. 좋은 수성(水星)은 산이 정상이 평평(平)하고 단정해야 제일 좋다.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야 한다. 수성산(水星山)은 수려(秀麗)한 기운을 나타낸다. 수려한 기운이란 문관(文官)의 기운, 무관(武官)의 기운, 재물(財)의 기운, 녹봉(祿)의 기운을 포함한 일반적으로 훌륭한 기운을 말한다. 그러므로 수성이 목성을 도우면 문관의 기운이 있고, 강한 화성의 기운과 만나면 녹봉의 기운이 있고, 토성의 기운과 만나면 재물의 기운이 있고, 금성의 기운과 만나면 쇠를 불로 녹여 칼과 창을 만드니 무관의 기운과 부의 기운을 나타낸다. 그러나 수가 너무 강하면 목(木)은 떠내려가고, 화는 꺼지고, 토는 흙탕물이 되니 흉(凶)이 된다. ⓵ 천문수(天門水): 하늘 높이 솟은 수성 산 정상이 물결이 흐르듯 한 수성산이 하늘에 병풍을 두른 것 같이 하늘 높이 서 있어 천문수(天門)라 한다. 천문수(天門水)는 수성산 중에 가장 수려하며, 산의 양 어깨가 단정한 것을 제일로 한다. 이러한 천문수는 높은 고산(高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산의 정상(山頂)이 앞으로 기울면(欹) 전면에 좋은 기운이 있으니 전면의 터가 좋고, 우측으로 기울면 우측에 좋은 기운이 있으니 우측에 좋은 터가 있다. 이러한 천문수(天門水)는 수려하고 귀한 사람이 나오며 명성이 하늘에 닿아 있어 부귀(富貴)의 기운이 있다. 이러한 수성산은 산의 맥이 옆으로 나와도 해(害)가 없으나 터에 이르러서는 가운데로 들어와야 좋은 기운을 얻는다. ⓶ 어병수(御屛水): 어전(御殿)의 병풍 같은 수성 ➀어병수(御屛水) ➁어병수(御屛水) ➀ 산 정상이 물결이 흐르듯 한 수성산이 어전(御殿)의 병풍처럼 평평하게 펼쳐있어 공후(公侯)가 나오고 수많은 땅이 모이니 부귀(富貴)하고 사람들이 번성 한다. 어병은 천문수와 함께 가장 수려하고 귀(貴)하다. 어병(御屛)은 본래 토성(土)에 속하는데 만약 산 정상이 토성처럼 넓지 않고, 돌이 물결처럼 있고 작은 오목한 곳이 있으면 즉 수성(水星)이다. 만약 낮은 평강(平岡)이 횡(橫)으로 물결치듯 있으면 마치 수(水)가 주름 잡혀 움직이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수성(水星)이다. 그러나 만약 횡으로 마치 일자(一字)같거나 아미(蛾眉)같으면 수성(水星)이 아니라 즉 일자문성(一字文星)과 아미문성(蛾眉文星)이니 목성(木星)의 문성(文星)이 된다. ➁ 이러한 어병은 정상이 평평하고 단정하며 맑고, 물결이 일 듯이 아름답고 수려하다. 그러므로 대대로 공경(公卿)이 나온다. 어병(御屛)의 세(勢)에 산의 면에 물거품 같은 수포(水泡)가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토(土)에서 나오는 수(水)이다. 수(水)는 토(土)를 따라 생(生)하여 나오니 후부(厚)하고 또 수려(秀) 하다. 그러므로 모두 부귀(富貴)하고 오래간다. 토(土)는 부(富)를 주관하고 수(水)는 귀(貴)를 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는 산정(山頂)이 토(土)이므로 반드시 중앙 정맥(正脈)으로 천락(穿落)하여 전출(傳出)하여야 한다. 만약 맥이 옆으로 각(角)을 따라 나온 것은 반드시 터의 기운이 가벼우니 사용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