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명리/관상/주역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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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5회... 적멸보궁(寂滅寶宮)의 기도터-설악산 봉정암(鳳頂庵) · 풍수지리■ 적멸보궁(寂滅寶宮)의 기도터-설악산 봉정암(鳳頂庵)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 중인도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였던 적멸도량을 의미한다."적멸"은 모든 번뇌가 소멸돼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으로 불가에서는 성지 중의 성지로 여기기에 남녀노소는 물론 원근(遠近).고저(高低).험양(崄壤)를 따지지 않고 참배 수행은 물론 기도(祈禱)및 기원을 위해 불철주야 찾는 곳이죠.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 했다는 설악산(1708m) 봉정암(1224m)은 5대 적멸보궁 중에서 제일 영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죠.북현무 주산은 우람한 목성체 암반이고 좌우용호 또한 괴암괴석과 고봉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중심에 자리잡은 대웅전의 중앙자리(사진5)는 주인자리로 손색이 없는 곳이니 수행자나 기원.축원을 원하는 분들은 꼭 이용해보시라 추천합니다. 대웅전 좌향은 진좌술향.사리탑 좌향은 축좌미향으로 두 곳 다 재물과 관계 있으니 사업하는 사람이기원.축원하면 더 운발이 설 수 있는 곳이네요,허공기도를 원하는 분은 사리탑 앞에서 하시고 건강.수행,지혜.소원.축원.기원...등을 원하는분들은 대웅전내 중앙에서 하시면 좋겠습니다.고봉이고 괴암.괴석에서 흐르는 맑은 영심천을 따라 수렴동계곡,구곡당계곡,용소폭포,관음폭포 쌍용폭포를 지나 깔딱고개를 따라 올라가니 눈에 아련히 들어 온 고찰이 봉정암....초행자도 쉽지 않는 코스(백담사에서 약10.5km)라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십이 좋습니다. P.S5대 적멸보궁은?1.오대산의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 2.설악산의 봉정암의 적멸보궁. 3.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4.태백산의 정암사 적멸보궁. 5.양산 영취산의 통도사 적멸보궁.적멸보궁은 寂(편안.열반).滅(멸하다)寶(보배) 宮(궁궐.종묘)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부처님이 미혹(迷惑)의 세계를 벗어나 적멸(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의 날을 누리는 곳으로 불상이나 후불 탱화도 없고 불단에 방석만 준비되어 있으며 법당 바깥에 사리를 모신 탑이나 전각을 말하죠.봉정암은 조계종 제3교구인 백담사(百潭寺)의 부속암자로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져와 이곳에서 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하였으며.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鳳頂)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기에 "봉정"이라 했다,한다.헌데 보물 제1832호인 봉정암 오층석탑은 자장 율사가 사리를 봉안하였던 때보다 훨씬 후대의 양식을 띠고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기단부를 따로 조성하지 않고 자연의 암반 위에그냥 탑신을 안치하였으며, 탑신 자체는 잘 정제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5층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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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8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8회 ⓷ 행지수(行地水): 평양으로 지나가는 수성 ➀ 행지수(行地水) 이것은 낮게 땅으로 지나가는 수성이다. 이러한 행지수는 반드시 초목이 있어야 청귀(淸貴)함이 나오고 수려한 기운(秀氣)을 가지고 있다. 행지수(行地水)란 모두 낮은 산의 평강(平岡)이니 반드시 옆에 있는 각(脚)과 수(手)가 고르게 머물러야 좋다. 청(淸)과 귀(貴)가 나오고 수기(秀氣)가 있다. 또한 행지수의 지나가는 나눔이 세 갈래로 나란히 나누어 지나가면 반드시 가운데 갈래(路)가 바른 것이 된다. 만약 가운데로 나가지 않고 곁의 줄기에 터를 정하면 역시 역량이 가볍고 작다. 이처럼 산의 용맥(龍脈)도 관직(官職)의 등급(等級)과 같으니 높은 관직은 가운데(正出)에서 나온 곳에 머무른다. ➁ 행지수(行地水) 낮은 산에 지각(山脚)이 있고 반저 반고(半低半高)로 평지에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 지나가는 산이다.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산의 봉우리는 평지의 산(平岡)에 봉우리가 일어난 것이다. 높은 관직의 공경(公卿)이 태어나는 곳이 이러한 땅이다. ➂ 행지수(行地水) 낮게 지나가는 산의 양 옆에 지각(脚)이 나와 마치 날아가는 것 같고 구름과 같다. 이러한 산의 행진은 정(情)이 있다. 또한 아직 좋은 터를 만들지 않았지만 부귀(富貴)한 기운이 붙어 있다. 날아가듯 펼쳐서 층층이 나오며(層出) 모두 구름모양의 머리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산의 행진은 부귀(富貴)가 남의 힘을 빌려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 좋은 터를 만든다. ➃ 행지수(行地水) 낮은 산에서 평지로 중심을 뚫고 나와 마치 물결 같이 땅의 좌우가 가지런하게 펼쳐져 내려온다. 산의 모양이 마치 오동나무의 가지와 같이 균형이 바르게 있어 부귀쌍전(富貴雙全의 터를 만든다. 이러한 형태의 산을 매우 좋은 오동지(梧桐枝)라 부른다. 특히 지각이 좌우로 바르고 기운이 가운데로 지나가니 수려한 기운이 가장 많다. ➄ 행지수(行地水) 낮게 평지로 지나가는 산의 다리(地脚)가 뾰족하면 화성의 기운이 되고 약간 둥글면 수성의 기운이 된다. 이 그림은 땅으로 낮게 행진하는 수성체이나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러 있고, 다리의 지각에 수성과 화성이 어지럽게 섞여 수화상집(水火相什)이다. 그러므로 흉(凶)이 된다. 이러한 곳에서는 터를 만들지 못한다. ➅ 행지수(行地水) 수성산이 중앙으로 나와 서로 다리를 마주 하고 있으나 다리가 반대로 뒤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산은 역룡(逆龍)이라 하여 반역의 기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흉하다. 또한 앞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수성산과 화성산이 어지럽게 섞여 수화상집(水火相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터에서는 배신을 하는 기운이 있고 부모에게 불효(不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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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7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7회 1. 수성(水星): 秀星(수려한 기운) 수성산(水星山)의 형태는 산 정상이 마치 물결이 흐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성산은 산 높은 산의 정상에도 있고 평지에도 있다. 높은 산의 수성은 산 정상이 물결이 일어나고 흙무더기가 쌓인 것처럼 봉우리가 일어난다. 또한 높은 고산의 수성은 산 정상에서 아래로 물결같이 흘러내리는 무늬(溜紋)가 있는데 칠 팔 갈래로 내려와 나뉘고 다리에 붙어있는 지각(支脚)이 둥글다. 좋은 수성(水星)은 산이 정상이 평평(平)하고 단정해야 제일 좋다.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야 한다. 수성산(水星山)은 수려(秀麗)한 기운을 나타낸다. 수려한 기운이란 문관(文官)의 기운, 무관(武官)의 기운, 재물(財)의 기운, 녹봉(祿)의 기운을 포함한 일반적으로 훌륭한 기운을 말한다. 그러므로 수성이 목성을 도우면 문관의 기운이 있고, 강한 화성의 기운과 만나면 녹봉의 기운이 있고, 토성의 기운과 만나면 재물의 기운이 있고, 금성의 기운과 만나면 쇠를 불로 녹여 칼과 창을 만드니 무관의 기운과 부의 기운을 나타낸다. 그러나 수가 너무 강하면 목(木)은 떠내려가고, 화는 꺼지고, 토는 흙탕물이 되니 흉(凶)이 된다. ⓵ 천문수(天門水): 하늘 높이 솟은 수성 산 정상이 물결이 흐르듯 한 수성산이 하늘에 병풍을 두른 것 같이 하늘 높이 서 있어 천문수(天門)라 한다. 천문수(天門水)는 수성산 중에 가장 수려하며, 산의 양 어깨가 단정한 것을 제일로 한다. 이러한 천문수는 높은 고산(高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산의 정상(山頂)이 앞으로 기울면(欹) 전면에 좋은 기운이 있으니 전면의 터가 좋고, 우측으로 기울면 우측에 좋은 기운이 있으니 우측에 좋은 터가 있다. 이러한 천문수(天門水)는 수려하고 귀한 사람이 나오며 명성이 하늘에 닿아 있어 부귀(富貴)의 기운이 있다. 이러한 수성산은 산의 맥이 옆으로 나와도 해(害)가 없으나 터에 이르러서는 가운데로 들어와야 좋은 기운을 얻는다. ⓶ 어병수(御屛水): 어전(御殿)의 병풍 같은 수성 ➀어병수(御屛水) ➁어병수(御屛水) ➀ 산 정상이 물결이 흐르듯 한 수성산이 어전(御殿)의 병풍처럼 평평하게 펼쳐있어 공후(公侯)가 나오고 수많은 땅이 모이니 부귀(富貴)하고 사람들이 번성 한다. 어병은 천문수와 함께 가장 수려하고 귀(貴)하다. 어병(御屛)은 본래 토성(土)에 속하는데 만약 산 정상이 토성처럼 넓지 않고, 돌이 물결처럼 있고 작은 오목한 곳이 있으면 즉 수성(水星)이다. 만약 낮은 평강(平岡)이 횡(橫)으로 물결치듯 있으면 마치 수(水)가 주름 잡혀 움직이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수성(水星)이다. 그러나 만약 횡으로 마치 일자(一字)같거나 아미(蛾眉)같으면 수성(水星)이 아니라 즉 일자문성(一字文星)과 아미문성(蛾眉文星)이니 목성(木星)의 문성(文星)이 된다. ➁ 이러한 어병은 정상이 평평하고 단정하며 맑고, 물결이 일 듯이 아름답고 수려하다. 그러므로 대대로 공경(公卿)이 나온다. 어병(御屛)의 세(勢)에 산의 면에 물거품 같은 수포(水泡)가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토(土)에서 나오는 수(水)이다. 수(水)는 토(土)를 따라 생(生)하여 나오니 후부(厚)하고 또 수려(秀) 하다. 그러므로 모두 부귀(富貴)하고 오래간다. 토(土)는 부(富)를 주관하고 수(水)는 귀(貴)를 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는 산정(山頂)이 토(土)이므로 반드시 중앙 정맥(正脈)으로 천락(穿落)하여 전출(傳出)하여야 한다. 만약 맥이 옆으로 각(角)을 따라 나온 것은 반드시 터의 기운이 가벼우니 사용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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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4회...조선 8대명당 후보-윤관(尹瓘)장군 묘 · 풍수지리■ 조선 8대명당 후보-윤관(尹瓘)장군 묘 윤관(?∼1111)은 본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시호 문경(文敬), 문숙(文肅)으로 태조를 도운 삼한 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고손이며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 어머니는 경주김씨(경순왕의 손녀)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 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 하지만 여진족이 무력항쟁을 하거나 여러 조건을 대며 애걸하는 통에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되자 패군의 죄를 뒤집어쓰고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卒하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참고 : 다음백과) PS 윤관장군 묘는 조산이 박달산(360m)으로 건해(乾亥)-신술(辛戌)-곤신(坤申)의 수리봉들을 거쳐 甲龍-寅-子-癸-丑-艮寅-巽-辰-卯-艮-丑-甲卯-艮寅龍입수하였다.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 득수는 午득수. 파구는 .경파(庚破)로 양공(楊筠松-834~900.당나라 국사)의 이기법상 진신수법의 하니인 木局의 절처봉생향(絶處逢生向) 목욕소수(沐浴消水)다. 일명 문고소수(文庫消水)로 書에 이르길 녹존류진 패금어(祿存流盡佩金魚).라 말하며 이는 부귀하여 복수쌍전하지만 약간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패절하니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먄 용진혈적(龍眞穴的)하면 무방하다. 부를 논하는 물은 안산인 매봉이 치고 나오니 물은 자연 반배를 하게 되어 재물과는 큰 인연이 없겠다. 허지만 중간에 도로가 살포시 감싸고도는 형국이라 의식주에 구애받지는 않을 것 같다. 貴를 관장하는 주산은 금성체로 끝없이 문무의 권력을 지향하고.후손과 귀를 상징하는 용.호사는 내용호사는 주인과 같이 뻗어나가고 외용호사는 끝이 전체적으로 감싸고 밀어주지를 못해 아쉽다. 따라서 조상의 발음으로 출세는 지속적으로 할 수 있지만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내룡이 급하게 오면서 결인을 미처 못 하면 제동역할을 해주는 요석이 있거나 구(毬)가 있어야 하고 첨하가 뚜렷해야 하는데 인작으로 첨하를 길게 늘어뜨려 귀함이 떨어진게 아쉽다. 박달산은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산이라 명명됐다는데 이웃의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독수리가 많아서 수리봉 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지 내룡을 밟아보니 경사도는 있어도 높지 않아서 박달니무가 있어도 독수리들이 많이 서식했을 것으로 보인다. 통상 한 절에 발복이 30년간 오는데 실지 올라가보니 족히 30절은 넘어 보여 천여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어 여전히 발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수 있다. 더구나 400년간 산송문제로 다퉜던 청송 심씨와 화해를 하고 입수도두에 있던 심지원 묘를 천장하여 이제는 직접적인 흉작용은 없어져 학인의 한사람으로서 참다행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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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철 인터뷰] "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 박정해"(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 박정해) 지철 인터뷰, "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 박정해" 안녕하십니까? 한국풍수신문의 지철 윤명선 입니다 박정해 교수님,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풍수신문] 최근 관심도가 높은 풍수학의 깊이를 조명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한양대학교 박정해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 전공은 건축학이고 그런 그가 풍수학에 관심을 가진것은 어느날 학교 도서관에서 박시익 교수의 풍수박사 논문을 읽으면서 시작됐다... 다음은 박정해 교수와의 일문일답... ◎ 건축학 박사 이시고 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님 이신데 건축학과 동양문화는 어떻게 만나시게 되셨나요? 대학교 전공은 건축학입니다. 건축학을 공부하다 도서관에서 여러 풍수책을 접하게 됐고 건축학 보다는 풍수를 더 많이 공부하게 되고 풍수박사 박시익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학문으로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건설업에 종사하다 건설공제조합에 입사후 풍수답사와 인연으로 형산 정경연교수님을 만나서 팔도풍수사랑회를거쳐 사단법인 정통풍수학회 답사 위원장으로 공부 후 대학원 석사과정을 한양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반대를 많이 해서 힘이 들었고 한동수 지도교수님이 도움 많이 주셔서 2019년에 풍수학과 개설로 동양문화학과 주임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 동양문화학과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양대학교의 동양문화학과는 풍수, 명리, 관상, 손금, 주역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동양학, 동양문화학과, 미래예측학과로 개설 학교가 10여개가 있는데 한양대학교가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있고 동양학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꿈을 한양대학교에서 펼쳐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학회 이사장님 이신데 풍수학회 소개 해주시죠? 사단법인 정통풍수학회는 형산 정경연 명예이사장님에 의해 창립되고 교수님에게 풍수 공부를 하고, 정경연 교수님은 이사장님 직를 10여년 하시고 저한데 물려주셨습니다. 정통풍수지리학회에서는 풍수이론의 현대화를 통한 새로운 풍수문화를 창조하고 과거와 현시대를 연결하고, 음양오행을 기초로 하여 대자연의 법칙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환경의 상생를 도모하고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로 아름답게 이사장직을 이어 받았습니다. ◎ 동양문화 공부 하시는 후학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동양문화에 관심 많으신분은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고전도 많이 읽으시고 현장답사도 많이 다니시고 논문도 많이 읽으셔서 다양하게 사고의 폭을 넓이시길 바랍니다. 기존에 내가 알고있는 지식에 더 많이 플러스 하셔야 동양문화와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점은 많이 배우셔서 세상의 지혜를 넓혀가시길 바랍니다. ◎ 저의 연구실 문은 항상 열려있고 관심 있으신분은 언제든지 오셔서 차 한잔 하시지요. (좌측-한국풍수신문 대표 지철 윤명선 ,우측-주임교수 박정해 ) ◎방송출연 MBC 생방송 오늘 아침, 화제집중, 시사매거진2580 SBS 생방송 투데이, 세상에 이런일이, EBS 한국의 산하 RTN 유쾌한 풍수여행 진행 ◎저서 조선 유교건축의 풍수미학, 풍수명당이 부자를 만든다, 명십삼릉-풍수지리와 건축,사찰에서 만나는 불교풍수, 풍수 역사 이론 비평, 한국유교건축에 담긴 풍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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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6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6회 1.오성용수(五星龍髓) 제1(第一) 태초에 태극이 나누어지지 않아 혼돈상태에서 혼돈을 뚫고 천지가 밝았다. 이는 음양의 기운(元氣)과 형체(元形)가 서로 만나 생(生)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기운은 태양을 기준으로 수성(水星), 금성(金星), 지구(地球), 화성(火星), 목성(木星), 토성(土星)으로 차례로 늘어져 있으니 오성(五星)이 되고, 이러한 오성이 땅위로 흘러 산을 만드니 이것이 산의 오형(五形)이 되고 오행(五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성(五星)과 오형(五形)은 같이 한 몸이니 땅 위의 산 오형(五形)은 하늘위의 오성(五星)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성과 오형은 다섯 가지 모양을 만들었으니 반드시 그 모양이 쪼개지고 나누어져야 분명해진다. 오성의 형체는 비슷한 것이 있으나 실은 같지 않다. 금성(金星)과 토성(土星)은 비슷하지만 청탁(淸濁)의 분별이 있고, 화각(火脚)과 수각(水脚)은 비슷하지만 끝이 뾰족하고 둥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나야 효험이 있고 오성이 서로 분명하게 나누어지고 차이가 있어야 응험이 있다. 오성산을 구별하는 방법은 산의 머리인 만두(巒頭)를 기본으로 한다. 그 방법은 첨(尖:뾰족하고), 원(圓:둥글고), 방(方:모나고), 장(長:길고), 단(短:짧고), 기(欹:기울고), 정(正:단정하고), 고(高:높고), 평(平:평평함)으로 그것을 논(論)한다. 즉 만두가 뾰족하면 화성(火星), 둥글면(金星), 평평하면 토성(土星), 높고 끝이 둥글면 목성(木星), 물결처럼 늘어져 있으면 수성(水星)으로 나눈다. 이러한 방법은 산이 길고 짧고, 기울고 바르고, 높고 평평함을 기준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오성의 종류는 먼저 기본 오성의 5가지를 길(吉)함과 흉(凶)함을 나누어 설명하고, 다시 오성의 다섯 가지를 각기 다른 오성과 각각 비교하여 다시 길흉(吉凶)을 나누니 전부가 75가지가 된다. 즉 갑을병정(甲乙丙丁) 천간(天干)의 음양과 자축인묘(子丑寅卯) 지지(地支)의 음양을 각각 조합하여 60갑자(六十甲子)의 오행을 만들 듯이 오성의 이론을 전개한다. 오성용수의 기본 이론은 먼저 오성의 기본 형태와 이론을 이해해야 한다. 즉 만두를 기본으로 오성을 구별하고 오성의 기운인 목(木: 문(文)의 기운), 금(金: 무(武)의 기운), 토(土:재(財)의 기운), 화(火:록(祿)의 기운), 수(水: 수(秀)의 기운)를 구별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오성 기본의 형체에서 밖으로 나온 다리모양(지각:支脚)이나 함께 붙어 있는 다른 오성의 모양을 함께 보고 기운을 구별한다. 즉 조산에서 내려오는 두세 개 오성의 생극(生剋), 다소(多少), 강약(强弱), 전후(前後), 내외(內外)등을 구별하여 길흉을 예측한다. 이는 명리학에서 용신을 잡기위한 사주추론방법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므로 일반 술가(術家)에서 말하는 구성(九星)과 오성(五星)의 형체는 맞지 않는다. 즉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이론이 풍수지리의 기본 이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경전인 금낭경(錦囊經)에서 오기가 땅속에서 발동하면 만물이 생한다고 하였다. (五氣行於地中 發而生乎萬物, 其行也 因地之勢, 其聚也因勢之止) 그러므로 구성(九星) 구기(九氣)가 아닌 오성(五星) 오기(五氣)로 길흉화복을 예측해야 한다. 이것이 구성을 기본으로 하는 일반 술가의 풍수와 옥수진경의 이론과 다른 점이다. 옥수진경은 최초의 풍수경전인 한 대의 청오경(靑烏經), 적정경(赤霆經)과 진대의 금낭경을 기본으로, 당대(唐代) 일행선사의 오성론(五星論)을 받아들여 송대 장자미가 옥수경을 만들고, 채원정이 발휘(發揮)를 더하여 완성하니 진정한 풍수지리의 완벽한 경전이 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오성용수(五星龍髓)로 풍수지리의 기본을 오성으로 하여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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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1회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의 명당 내금마을 스토리텔링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관광풍수 스토리텔링... 1회 1.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의 명당 내금마을 스토리텔링 1. 마을 현황 내금(內金)마을은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 있다. 옛날에 마을 오른쪽에 금구사(金龜寺)가 있어 금구사라 불리다가 내금마을이라 불렀다. 마을의 뒤에 있는 주산인 명덕봉(明德峰)이 둥근 금성체(金星體)의 형상으로 김씨가 들어오면 잘 산다는 속신(俗信)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반남인(潘南人) 박지영(朴之英)이 성종 11년(1480년) 금산으로부터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고, 광산인(光山人) 김광후(金光厚)가 담양으로부터, 인천인(仁川人) 이승길(李升吉)이 영동으로부터, 여양인 진석원(陳錫元)과 달성인 서정주(徐景柱)가 합천으로부터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현재 마을에는 33세대 7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2. 마을의 물리지리적 자연환경 1) 진안의 지세 진안군의 기운을 만드는 지세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려와 제일로 덕이 있어 여유로운 덕유산을 만들고, 아래로 남덕유산을 지나 장수군의 장안산을 돌아 전주와 대전을 만드는 호남금남정맥을 만든다. 장수의 팔공산에서 다시 북으로 진안의 성수산과 진안의 마이산, 부귀산을 만들고 주화산에 이르러 하나의 맥은 전주로 들어가니 이것이 호남을 만드는 호남정맥이 된다. 그리고 하나의 지맥은 다시 북으로 운장산을 거쳐 금산을 지나 계룡산에서 대전을 만드니 이것이 금남정맥이 된다. 그리고 수세는 장수 뜸봉샘에서 산맥을 따라 북으로 진안의 용담댐을 거쳐 금산을 지나 대전을 돌아 서해로 들어가니 이것이 금강물이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물이 모여 용담을 이룬 곳에 진안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진안을 만드는 지세는 금강물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기운이 내려오고, 서쪽에서는 마이산과 부귀산, 운장산의 호남금남정맥에서 기운이 내려온다. 그러므로 진안의 동쪽지역인 동향면과 안천면은 후부한 덕유산의 토성체 기운으로 진안의 중심 기운이 되고, 서쪽지역인 백운면에서 부귀면과 주천면에 이르는 지역은 마이산과 부귀산, 운장산의 구봉산 기운으로 문무의 기운과 많은 인재가 태어난다. 그리고 1,000년 전 이름 붙인 조그만 용담천이 지금은 거대한 수룡(水龍)이 사는 용담(龍潭)을 이루니 새로운 남한의 중심 기운을 태동하고 있다. 2) 내금마을의 출신 용담에 물이차면 영귀산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내금(內金)마을을 만드는 지세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시작된다. 남덕유산을 대동여지도에는 봉황봉(鳳凰峰)으로 표기하고 조선 시대에는 봉황산(鳳凰山) 또는 황봉(黃峯)이라고 하여 산중에서도 제일 신령스러운 황제(皇帝)의 봉우리로 여겼다. 또한,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이라고 하고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덕유산이라고 한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남덕유산은 아래로 서봉을 지나 문필봉 모양의 삿갓봉을 만든다. 삿갓봉은 『한국지명요람』에 산의 모양이 삿갓 또는 붓처럼 생겼다고 하여 삿갓봉 또는 문필봉이라고 전해온다. 남덕유산에서 서봉과 삿갓봉을 지나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건너 계북면 솔재의 과협처로 내려오는 용맥의 기세와 모양이 하늘의 말(天馬)이 산비탈의 위에서 아래로 달려 내려오는(馳坂) 것으로 송대 주자의 친구 채원정이 발휘(發揮)한 옥수진경(玉髓眞經)에서는 천마치판(天馬馳坂)이라 부르며 이러한 형세는 터에 이르러 대귀(大貴)하고 발달이 빠르다. 그러므로 황봉의 기운이 천마치판(天馬馳坂)의 기세로 장차 마을에 이르러 대귀(大貴)한 기운이 나오는 것이다. 남덕유산에서 영귀산으로 힘차게 내려온 용맥은 왼쪽으로 천반산에 이르러 죽도를 머금고 있는 천반함주(天盤含珠)의 명당인 정재영의 묘역을 만들고, 오른쪽으로 마을로 내려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내려오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의 명당에 지선당을 만들어 5명의 과거급제를 이룬다. 남덕유산에서 계북면으로 내려온 용맥은 임평 삼거리에 있는 솔재의 과협처를 지나서 문필봉 모양의 우뚝 솟은 목성체(木星體)와 둥금 금성체(金星體)를 만들고 힘차게 마을이 있는 동향면 영귀산(靈龜山)으로 달려간다. 영귀산(靈龜山)은 영구산이라고도 부르며 그 모양이 둥근 금성체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귀산이라 부른 것이다. 영귀산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품은 산은 두 개의 지맥을 나눠 하나의 지맥은 왼쪽으로 달려가 장수 뜸봉샘에서 발원한 금강물과 구량천이 만나는 합수처 이르러 하늘의 소반처럼 웅장한 천반산(天盤山)을 만들어 죽도(竹島)를 머금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는 마치 천반산의 용이 죽도를 머금고 있는 형상의 천반함주(天盤含珠) 형상으로 산 정상에는 능길마을에서 태어나 내금마을 지선당에서 공부하여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전 국무총리 정세균의 5대조인 정재영(丁載榮)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하나의 맥은 마을로 내려가 명덕봉(明德峰)을 만드니 이는 내금마을의 주산이 된다. 명덕봉 역시 영귀산처럼 등근 금성체(金星體)로 마을로 내려오는 그 형상이 마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이 된다. 전체적으로 내금마을 터를 이루는 지세는 남덕유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하고, 영귀산(靈龜山)을 할아버지 산인 조산(祖山)으로 하고, 명덕봉(明德峰)이 마을의 부모산이 되어 현무봉이 된다. 그러므로 마을의 내기(內氣)는 남덕유산의 황봉(黃峰)의 기운이 내려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되는 대귀(大貴)한 기운이 되므로 장차 내금마을의 기운은 예측할 수 있다. 또한, 향후 조산(祖山)인 영귀산 아래 수침(水砧)마을의 물(水)을 다듬잇돌(砧)로 댐을 완성하면 이는 내금마을에 강한 기운을 밀어주는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마을의 기운은 한층 더 배가(倍加)될 것이다. 3. 내금마을 사람들이 만든 문화 1) 지선당 능금(能金)마을은 능길(能吉)마을과 금곡(金谷)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능금마을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지영(朴之英)에서 부터 시작한다. 내금마을 지선당에 있는 반남박씨 유허비문(潘南朴氏遺墟碑文)에 의하면 "공의 휘는 지영(之英)이고 본관은 나주의 반남현이다. 단종조의 충신(忠臣)인 박희권(朴希權)은 그의 6대조가 되며, 부친은 경복(景福)으로 세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공은 대대로 금산(錦山)에서 살았는데 임진(壬辰) 병란을 당하여 두 아우를 이끌고 이곳 금곡리(金谷里)로 피난하여 8년의 병화(兵火)를 무사히 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4명의 아들을 충효로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이러한 뜻을 받들어 5대손(1772년)에 이르러 명덕봉 아래에 지선당(止善堂)을 만들어 후학에 힘쓰고 가문의 기틀과 마을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공의 6대손에 이르러서는 박제대(朴齊大)가 49세 때인 1840년(헌종 6)에 식년시에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지사를 지냈으며, 그 후 낙향하여 용담 향교에 사마재를 건립하는 등 그 당시 유림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지니고 향리 발전과 후학 교육에 힘썼다. 그 후 공의 후손은 번창하여 각 마을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 1백여 호에 이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1825년 박제대 선생보다 3살 아래이며 이곳 지선당에서 공부하여 18세에 급제하여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의 증손(曾孫) 정임상(丁任相)이 쓴 글이다. 정재영은 이곳 반남박씨 외손(外孫)이 된다. 그리고 정재영 선생의 5대손이 전 국무총리 정세균이다. 따라서 능금마을의 시작은 금곡리 내금마을의 박지영(朴之英)에서부터 번창하여, 현재 용담향교가 있는 외금마을과 능길마을 그리고 추동마을로 이어지는 그것으로 보인다. 지선당에 걸려있는 지선당기(止善堂記)는 1772년(영조 48년) 박지영의 5대손 박상정(朴相禎)이 기문을 지었다. 지선당(止善堂)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박지영(朴之英)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이 지방 후학들의 교육을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세운 사당이다. 건립 연대는 1772년(영조 48)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을 비롯하여 1840년(헌종 6) 진사시에 합격한 박제대(朴齊大) 등 4명의 진사를 배출하여 모두 5명의 과거 급제를 시켰다. 1772년(영조 48년) 박지영의 5대손 박상정(朴相禎)이 쓴 지선당기(止善堂記)에 의하면 "당의 이름을 지선(止善)으로 한 것은 명덕봉(明德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명덕산의 봉우리가 덕유산(德裕山)으로부터 내려와 서쪽으로 돌아 내려와 마을 앞 두 시내의 합류지점에 우뚝 솟아있어 바라보면 높고 닦아 가면 엄숙하여 대인군자자 만인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나의 고조께서 금산으로부터 오셔서 남쪽 기슭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터를 잡아 덕행을 닦고 모자란 풍속을 교화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아 그 덕업을 기리고자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한 것은 첫째, 조상을 받들어 근본에 보답하니 이는 선에 그침(止善)이요. 둘째, 후손을 가르쳐 몽매함을 깨우치니 또한 선에 그침(止善) 이다. 대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이 명덕(明德), 신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인데, 능히 선(善)을 밝히고 본성을 회복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효공(孝恭) 하는 방법으로 종중안의 후진을 장려하니 이는 실로 명덕(明德), 신민(親民), 지선(至善)이 그침(止)이다. 하물며 이 집이 이미 명덕산(明德山) 아래 있으니 지선(止善)으로 이름한 것이 우연히 합하고 가까이에 다가선 것이다. 이에 똑똑히 깨달아 소리 내어 사례하고 곧 지선(止善) 두 글자를 당액에 건다. 무릇 지선당에 올라 책을 잡는 이는 고학(古學) 명선(明善)의 도(道)에 뜻을 두고 지선(止善)의 이름을 돌아보라. 스스로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하여 도학(道學)에 공(功)의 극치를 이룰 것이며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여 가문에 광채가 발동하고 또한 성(誠)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선당은 대학(大學)의 이념과 효경(孝經)의 이념을 가르치던 곳으로 박씨 가문과 능금마을의 정신적 기틀이 되는 중요한 곳이 된다. 2) 지선당 수학 인물 정재영(丁載榮) 정재영(丁載榮)은 조선 후기 진안 능길마을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근재(根齋), 자는 춘경(春卿). 할아버지는 정남추(丁南樞)이고 아버지는 정우언(丁宇彦), 외할아버지는 박경(朴烱)으로 반남박씨 외손이 된다. 정재영(丁載榮)[1798~1876] 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동네에 있던 외갓집 반남박씨의 서당인 지선당(至善堂)에서 공부하였는데, 글공부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년(철종 9)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년(고종 2)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정재영(丁載榮)은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동네에 있던 외가 반남박씨의 서당인 지선당(至善堂)에서 공부하였는데 글공부를 할 때는 밤에 호랑이가 길을 밝혀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선당에 걸려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부친인 정병남(丁炳南) 씨가 쓴 현판에는 "나의 고조(高祖)는 어려서 고개를 넘고 내천을 건너 명덕봉 아래 반남박씨 외가댁의 지선당에서 공무를 하였다. 10여 년을 불철주야 근면하게 공부하였고, 밤에 고개를 넘고 냇가를 건널 때는 큰 호랑이가 앞에서 인도하여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또한, 비가 오는 어두운 밤에는 도깨비가 불을 도로 좌우에 비춰 편안하게 건너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공이 순조(純祖)때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괴나리봇짐을 지고 길을 떠났을 때 어느 주막에 들르게 되었다. 주막에는 한양으로 과거 보러 오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런데 전날 밤 이 주막의 주인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주막 담장 밑에는 매화가 만발하였는데 "곰배"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자색 연기가 자욱하고 큰 청룡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내려오더니 거침없이 "곰배"를 휘감아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주인은 꿈에서 깨어나 다음날 행여나 하고 담 밑을 보니 과연 "곰배"가 있어 그것을 치우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때 풍채가 의젓하고 기골이 장대한 선비 하나가 대문을 들어서더니 선배들이 모여 있는 대청으로 가지 않고 담장 밑으로 가서 "곰배"를 깔고 앉았다. 주인이 이상히 여겨 "아직도 자리가 넓으니 대청으로 올라오시죠?” "이곳도 좋소이다"주인은 지난밤 꿈이 생각나서 "성씨가 무엇입니까?” "곰배 정(丁)씨요" 하고 대답을 하는 재영을 보고 주인은 무릎을 '탁' 치며 좋은 방으로 들게 하여 "정 선비께서는 이번 과거에 꼭 급제하리다" 하며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 그 뒤 재영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은 1816년(순조 16)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년(철종 9)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년(고종 2)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공은 많은 벼슬을 하며 충신으로 효자로서 선정을 베풀다 일흔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소는 현재 천반산(647.3m) 정상에 천교혈(天巧穴)로 옥루보전(玉樓寶殿)을 조안산으로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있으며 이는 현재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5대조가 된다. 묘에 올라보면 조안산이 무척 멀리 보인다. 천반산 정상은 647m로 혈장 아래의 사격은 보이지 않고 멀리 진안의 부귀산(806m)만이 오로지 옥루보전(玉樓寶殿)의 형태로 조산(朝山)이 되어 좌측 청룡자락 너머로 혈을 조응하고 있다. 이곳의 발응은 천교혈로 제왕지지가 합당하며 또한 옥루보전의 응 또한 제왕지지가 된다. 단지 안산이 매우 멀리 있어 발응 역시 더디게 된다. 따라서 140년 후에 국무총리의 탄생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 혈은 천교혈로 일반인이 쉽게 쓸 수 없는 터가 되며, 지선당의 건립이념인 명명덕(明明德)과 지선(止善) 그리고 입신출세하여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 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현실로 드러난 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철종실록(11권, 철종 10년 3월 6일)은 "집의(執義) 정재영(丁載榮)의 상소에 따라 전 평안 감사 김기만 등에게 간삭(刊削)의 형을 내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3월 7일 "집의 정재영을 대사간에 제수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정재영은 집의(執義)로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 소속 종3품이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전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기만(金箕晩) 등 9명의 관리의 비리와 죄를 논하였다. 이에 왕이 "과연 이러하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으며, 선비가 어떻게 과거를 볼 수 있겠는가? 너무도 한심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가 않다. 진실로 청백(淸白)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 미더움을 받고 있었다면, 이런 말이 어찌하여 이르겠는가? 위에 논열(論列)한 사람들은 우선 간삭(刊削: 관직이나 공신의 지위를 빼앗음)시키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朝鮮王朝 철종실록 11권, 철종 10년 3월 7일) 왕은 "이렇게 적요한 때를 당하여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집의 정재영(丁載榮)을 대사간에 제수하라.” 명하였다. 이처럼 정재영은 청렴결백하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정의를 위하여 직언과 실천을 행하여 대사간에 제수된다. 정재영의 상소를 보면 그 당시에도 관리들의 과거시험 부조리와 부패한 관리들이 많았으며 정재영은 이를 규찰하고 왕에게 직언하여 죄인들을 다스리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이다. 4. 마을의 희망 내금마을은 영구산 아래 수침댐에 물이차면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영구하산형의 명당기운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현재도 탄생하고 있는 마을이다. 근래에 들어와서도 군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박관순 의원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그리고 향후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의 2개의 비보탑을 복원하고 수침댐이 완공되면 더욱 많은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마을이다. 특히 지선당의 교육이념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대학 이념에 효경의 입신양명을 더하여 "수신제가 입신양명”으로 치국평천하보다 효의 마지막인 입신양명을 더하여 만든 교육이념은 현대 청소년 및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체험하여야 하는 장소가 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면 향후 중요한 마을의 콘텐츠가 될 것이다. 내금마을은 명덕봉 아래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곳에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마을 입구 바위에는 반남박씨세거(潘南朴氏世居)가 새겨져 있고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마을 입구 바위 아래 도로와 맞은편 개울 건너에는 2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이는 마을의 물길이 아래로 곧바로 빠져나가 마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하여 2개의 돌탑을 만들어 비보한 것이다. 그러나 도로 옆 돌탑은 작은 흔적만 있고 없어져 버려 아쉬움이 있다. 마을의 돌탑은 마을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한 풍수적인 비보 방법으로 마을에서 만들어온 중요한 마을의 문화이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탑을 복원하고 탑제를 지낸다면 단합하는 중요한 이를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예부터 내려오던 금구사(金龜寺)터를 재조명하여야 한다. 금구사란 이름은 영귀산과 명덕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영귀산은 신령스러운 거북으로 마을의 할아버지산이 되며, 명덕봉은 마을의 주산으로 둥근 금성체의 거북 모양이다. 그리고 마을의 형세 역시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으로 보이므로 사찰의 유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향후 영귀산 아래 수침댐에 물이 차면 용담댐의 기운과 더불어 내금마을은 다시 영귀산의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오는 기운을 가질 수 있으니 마을은 다시 중흥하게 된다. 그리고 멀티유즈 콘텐츠개발을 통한 프로그램개발로 마을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을의 희망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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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연재 5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연재 5회 5) 향후 풍수지리의 응용은 스토리텔링과 콘텐츠개발에 사용되어야한다. 영국의 지리학자 『에드워드렐프』는 장소정체성의 의미를 『물리지리적 자연환경 하에서,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만든 문화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여기에서 물리지리적 자연환경이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지역의 풍수지리적 조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역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면 그 지역의 풍수지리적 자연조건을 설명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만들어온 문화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여야 진정한 해설이 된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기본이론이 된다. 그러므로 스토리텔링의 기본이론은 풍수지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활용하여 지역을 해설하고 콘텐츠를 개발하는 이론 역시 정자의 이상수(理象數)이론을 적용한다. 주역전의대전(周易大典)의 역설강령(易說綱領)에서 정자(程子)는 "이치(理)가 있은 후에 상(象)이 있고 상(象)이 있은 후에 수(數)가 있으니 역(易)은 상(象) 으로 인해 수(數)를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마을을 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의 풍수지리적 형상을 보고, 어떠한 지리적인 이치가 있어서 마을이 중흥하였고, 어떠한 인물과 마을사람들의 문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터를 정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적합한 터를 찾아 살아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어 스토리를 만들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를 이해해야한다. 이것이 향후 풍수지리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개발과 콘텐츠개발의 융.복합 학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송대 이후 풍수지리 이론을 너무 장법위주로 편협되게 적용하여 욌는지도 모른다. 이는 오성이 아닌 구성과, 내기와 외기가 아닌 장풍득수를 강조하면서 이다. 그러나 옥수진경에서는 도읍을 만드는 터나 주.군.현을 만드는 터를 강조하였고, 몇 평의 명당을 설명하지 않고 수 백리의 넓은 형세를 논하고 그 안에서 주산을 찾아 진정한 터를 취한 것이다. 이것이 일반 풍수와 옥수진경의 차별화된 이론이다. 따라서 옥수진경은 향후 스토리텔링과 콘텐츠개발의 기본 이론서가 될 것이며 그래야만 풍수지리의 융.복합이 가능하다. 이것이 내가 환갑이 돼서야 마지막으로 옥수진경을 해역하여 세상에 내 놓고, 관광과 풍수지리를 접목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후학들의 풍수지리학문 발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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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3회...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주인(主人)!-청풍김씨 시조묘 · 풍수지리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3회...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주인(主人)!-청풍김씨 시조묘 ■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주인(主人)!-청풍김씨 시조묘 청풍명월은 말 그대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다. 산수(山水)가 어우러져야만 맑고 깨끗한 바람이 일어나고 산수가 어우러지면 대기층이 좋아져 달이 유난히 밝아 보이고 별도 초롱초롱 보인다. 즉 산수가 어우러지고 깨끗한 동네라는 것이다. 산수가 어우러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심이 좋아 타 지역에 비해 덕을 많이 쌓게 되고 사후(死後)에 덕을 쌓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우월한 후생(後生)을 살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청풍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어 온 지명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상징하여 약 1300여년전 경치가 수려하여 시인.문인들이 즐겨 찾아 시문을 읊던 곳으로서 청풍명월이라 불리었다 한다. 청풍명월의 유래는 송나라 시인 소동파(1036~1101)가 적벽강에서 뱃놀이하면서 "이 세상에서 내것이 아니면 어느것 하나 가질 수 없지만 강 위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 위에 뜬 밝은 달은 어느 누가 가져도 말리는 이 없으니 아름답고 맑은 기운을 무진장으로 가져 가라"고 했다는 말에서 유래 됐다 합니다. 산수가 어우러진 청풍명월의 고장에 "내가 주인이여"라고 산천에 선언하고 터를 자리잡은 곳이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 산8번지에 자리잡은 청풍김씨 시조묘인 김대유(金大猷)다. 김대유는 신라 김알지의 46세손이고 56대 경순왕의 4남인 김은열의 18세손이다. 이 묘 발음으로 조선조에 왕비2(18대 헌종비인 명성 왕후. 22대 정조비인 효의왕후)명.상신8명.대제학 3명.청백리1명.공신7명...문과급제자 110명을 배출하였다. 도전리 마을 입구엔 단소가 있는데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맞은편 산에 위치한 시조묘를 향해 제를 올린다고 하는데 이건 산소가 물형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데 닭등에서 제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실지로 국세를 보면 횡룡입수하여 비룡승천(飛龍昇天)한 수국(水局)으로 결지한 혈장(穴場)인데 입수맥(入首脈)이 후부(厚附)하고 좌우용호사가 아주 유정(有情)하면서도 조화롭게 균형을 맞춰서 주인을 호위하고 있어 음양(陰陽-남자.여자)이 골고루 출세 성공 할 것이고 안산은 중첩으로 있어 후손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튼실한 래룡맥이 비룡승천하여 입수를 하였고 혈장도 튼실하고 좌우용호사도 주인을 향해 유정하고 재혈도 적중하여 조상의 발음이 자손만대(子孫萬代)의 향화지지(香華之地)로 끊이질 않을 것으로 본다. 임자룡(壬子)입수이니 정양(淨陽)으로 입수이고 내파(內破)가 손사파(巽巳破)로 수국이니 12포태법으로 쓸수 있는 용은 임자룡.신술용.경유룡.곤신용으로 좌(坐)를 정할 수 있으나 정음정양법에 맞는 향은 오(午)만 있어 자좌오향이 법수에 맞다.실지로도 그 당시 자좌오향으로 용사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조상의 체백을 좋은 자리에 모셔 자손 대대손손 영화를 누리게끔 하고 본인은 대대손손 후손들로 부터 깎둣한 대접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으리요. 국세로 보나 혈장으로 보나 기운의 세기로 보나 용사의 정확도로 보나 조선8대 명당에 당당히 올리고도 남을 자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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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연재 4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연재 4회 4) 풍수지리의 기본 이론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장자미와 채원정에 의해 완성된 옥수진경이 완성되던 송대에 들어오면 풍수지리의 이론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특히 송대에 거론되었던 호수경과 금낭경의 진위를 비롯해서 많은 풍수가(風水家)가 탄생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당말 양균송(楊筠松)에 의해 시작된 강서학파(江西學派)를 들 수 있다. 양균송(楊筠松)의 학파에 관해서는 옥수진경 요성총론(曜星總論)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관성(官星)과 요성(曜星)이 전해 내려온 문파(傳門)는 본래 정통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 의해 내려온 편학(偏學)이고 대당국사(大唐國師) 양균송(楊筠松)에 의해서 나왔다. 그는 스스로 호(號)를 양구빈(楊救貧)이라 하였다. 그 책 들은 경림(瓊林)의 비밀 서고(秘藏)에 있었는데 황소(黃巢)의 난(亂) 때 양균송(筠松)이 그것을 훔쳐 달아나서 강서(江西省)으로 피신하였는데 지금의 감주(贛州)이다. 양균송(筠松) 전후(前後)에는 소위 지리(地理)에서 관요(官曜)는 명가(名家)에서는 전(傳)하지 않았는데, 당시 증문천(曾文辿)이 양균송의 술(術)을 모아서 전(傳)하여 그것을 정교하고 묘하게(精妙) 하였고, 마침내 관요(官曜)로서 일가(一家)의 학문(學)이 되었다.」 양균송이 활동하던 중국 왕조의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인해 BC 907에 멸망하고 송나라가 탄생한다. 그리고 장자미기 옥수경을 만들고 채원정이 옥수진경 발휘를 완성한 시기는 북송(北宋)시대인 BC 960 ~BC 1,127)이 된다. 그러므로 옥수진경에서 논하는 양균송의 행적은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 된다. 특히 채원정은 주희(朱熹)와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관계를 보이므로 옥수진경의 채원정의 글은 비교적 상세하다. 당 말 양균송에 의해 제창된 풍수지리 구성(九星)이론과 관성(官星)과 요성(曜星)이론은 그의 학파인 증문천(曾文辿)에 의해서 일반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일행의 오성이론을 이어받아 완성한 장자미의 오성이론은 소외되어 채원정이 마지막으로 발휘를 하고 완성한 이후 360여년 이후 명(明) 가정(嘉靖) 29년(1550년) 복주부간(福州府刊)에서 목판본으로 출간되니 당시 풍수지리 이론의 변천을 실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600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옥수진경의 실체를 기록하고 있다. 양균송의 구성 이론은 옥수진경의 오성이론과 차이가 있어 채원정은 많은 지적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채원정은 오성용수(五星龍髓)에서 『배우는 자가 반드시 분별(辨)하지 못하고, 또 술가(術家)의 구성(九星)이 가리키는 바와 오성(五星)의 짝이 완전히 서로 합(合)하지 않으니, 오성(五星)의 변한(變) 이름(名)을 다시 부득불(不得不) 깊이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 채원정은 구성은 오성(五星)이 변한 이름으로 오성의 짝과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옥수진경에서는 오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만두(灣頭)를 진룡명수(眞龍名髓)편을 만들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형상혈수총론(形象穴髓總論)에서는 서는『이제 오성(五星)으로 용(龍)을 정(定)하면 즉 상생상극(相生相剋)과 화복(禍福)을 만에 하나도 잃지 않는다. 또 일반 술가(術家)의 용(龍)과 같지 않으니 억지로 구성(九星)으로 궁(宮)을 나누어 논할 필요가 없다. 천하에 어찌 두 가지 이치가 있겠는가? 이미 오행(五行)의 학문이 전하니 즉 잡스러운 다른 학문이 필요 없다. 』 청오경에서 풍수지리이론을 기(氣)로써 설명하고 금낭경에서는 오기(五氣)로 설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론이 옥수진경의 오성론(五星論)이 된다. 그러므로 오성으로 풍수지리의 상생상극(相生相剋)과 화복(禍福)을 설명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균송의 구성(九星)으로는 설명이 어려워 잡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 그 당시 양균송의 구성 이론의 허구성을 옥수진경에서는 채원정이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구성이나 통맥법처럼 절수를 기본으로 하는 풍수 이론에 대하여서도 채원정은 다음과 같이 발휘(發揮)를 하고 있다. 『용(龍)은 자연히 골절(骨節)이 있는데 단지 절수(節數)에 구속 될 필요가 없다. 즉 술가(術)에서 말하는 72절(七十二節)의 설에 반드시 논할 필요가 없다. (중략) 용절(龍節)이 작으면 기(氣)를 작게 받고 그러므로 복력(福力)이 쉽게 마른다. 이것은 즉 용절(龍節)에 있으니 반드시 절수(節數)에 구애 될 필요가 없고 완전한 땅은 없다. 그리고 탐랑(貪狼)과 모든 성(星)의 펼쳐두는 용절(龍節)에 있어서는 즉 오류가 또한 심한 것이다. 오성(五星)은 천상(天上)과 지하(地下)에서 확연히 볼 수 있다. 사람이 이에 그 생극(生剋)의 길흉(길흉(吉凶)을 정하지 않고, 도리어 근거 없는 성(星)의 이름(名)을 정한 것이니, 용(龍)의 이름(名)으로 그 뜻을 어찌 취할 수 있겠는가?』 풍수지리는 음양오행과 주역의 이론을 바탕으로 출발 하였다. 그러나 양균송의 구성이론에 대해서는 옥수진경의 오성론처럼 아직 명확한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채원정은 이러한 양균송의 그 당시 구성이론을 찾아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한당(漢唐) 팔대오계지(八代五季志)에 전하는 사료(史料)를 조사해보니 대개 이런 이름은 없었다. 감덕, 성함(聖咸), 석신(石申)이 잠깐 언급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도(道)는 불경(不經)함을 알 수 있다. 감덕(甘德), 성함(聖咸), 석신(石申) 삼가(三家)의 이름(名)과 성(星)은 선현(先賢)이므로 또 모든 이런 것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만약 후인(後人)이 바야흐로 이러한 이름을 말한다면 즉 사지(史志)에 전(傳)하는 것을 살펴보아도 역시 이러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경(經)과 사료(史)에서 있는 것과 비교하여 칠성(七星)의 성(星)으로 선택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펼친 생기(生氣), 천의(天衣), 절체(絶體), 유혼(遊魂), 오귀(五鬼), 복덕(福德), 절명(絶命)등이니 이것은 세상을 기만하고 풍속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미(子微)는 취하지 않았다. 대개 길흉(吉凶)의 증험이 응하는 것과 오행(五行)이 합(合)하는 바는 모두 섞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 채원정의 글을 살펴보면 구성은 청오경이나 적정경, 금낭경의 풍수지리 기본 이론이 아닌 칠성(七星)의 이론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옥수진경 최국파 설 38 주작 혹문(崔菊坡設三十八 朱雀 或問)에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당시 존재하던 진대 이후의 모든 풍수서적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혹왈(或曰) 어째서 그것이 후인이 지은 것이라 압니까? 답왈(答曰); 역대의 천문(天門)은 모두 이런 성(星)이 없었다. 지금의 북두(北斗)는 오직 일곱개 성(星)만 있고 보성(輔星)을 더하여 팔성(八星)에 불과하다. 왈(曰) 추(樞), 선(璇), 기(璣), 권(權), 형(衡), 개양(開陽), 요광(搖光), 보성(輔星)을 말한다. 지금 술가(術家)는 즉 좌보(左輔) 우필(右弼)을 더하여 모두 구성(九星)이 된다. 천문(天文)은 진실로 보필성(輔弼星)은 북두(斗)와 나란하지 않다. 구성의 결과는 어느 곳에 근거하는가? 또 구성(九星)을 오성(五星)에 짝(配)하면 모두 그 바름(正)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이 후인(後人)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이러한 이름이 없는데 또 어찌 이것으로 화복을 논(論)할 수 있겠는가?』 『옥수경(玉髓經), 적정경(赤霆經), 명당경(明堂經), 명당내외경(明堂內外經), 곽박장서(郭璞葬書), 범월봉제서(范越鳳諸書), 자당비결(紫堂秘訣), 곽수일명당금쇄비결(郭守逸明堂金鎖秘訣), 일행선사 옥봉보전(一行禪師玉峰寶傳), 증공 용자경(曾公龍子經), 보엽장경(寶葉葬經)등의 문자는 모두 고금을 통하여 리(理)의 의(義)를 아는 자(者)가 저술한 바로 일찍이 경(經)에 후세 사람이 첨가하지 않아 잡란(雜亂)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논한 것이 모두이치가 있고 현묘하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금 마치 증(曾), 양(楊)의 모든 서(書)와 성요회숙(星曜會宿), 입식가(立式歌), 곽씨외편(郭氏外篇), 장법십유(葬法十遺), 토우경(土牛經), 낙도자(樂道歌), 심룡기(尋龍記), 행정기(行程記), 자미괘(紫微卦), 북신종묘(北辰宗廟), 제가괘좌(諸家卦座), 단우매화(單于梅花), 용자경별본(龍子經別本)과 같은 것은 지금에 이르러 전하는 바의 책으로 이름과 글자(名子)를 세웠으므로 그 기(機)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文)이 혹 비속하고(鄙俚), 혹 그릇되고 틀려서(舛謬) 학식이 있는 자는 그것을 보고서 옳은 것은 취하고 아닌 것은 버리는데, 우매한 자(者)는 그곳을 보고 그 설(設)을 믿어 일을 그르친다.』 옥수진경을 발휘하면서 채원정은 위의 진서(眞書)들을 참고 문헌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서적 일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송대 이후 지금까지 세월이 흐르며 손실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으며 오직 옥수진경에서 그 진위를 찾을 수 있다. 송대에도 지금처럼 풍수지리 이론의 진위 여부를 논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적정경, 청오경, 금낭경, 호수경으로 이어오던 풍수 경전의 체계가 당 일행의 이론을 기반으로 송대 장자미와 유윤중, 채원정에 의해 완성된 옥수진경에서 종합적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당말 황소의 난 때 양균송이 경림서고에서 풍수서적을 가지고 나가 강서학파의 주류를 이루면서 구성의 이론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의 이론은 경(經)을 기반으로 한다. 앞에서 살펴본 풍수지리의 이론은 장자방의 적정경, 청오경, 곽박의 금낭경, 백학의 호수경을 기본으로 한다. 모두 기(氣)와 오기(五氣)를 주된 기운으로 한다. 이러한 풍수지리 이론은 당 일행의 오성론을 발전시켜 장자미의 옥수경에서 완성된다. 특히 옥수진경의 체계 역시 청오경에서 말하는 내기(內氣)와 외기(外氣)를 기본으로 오성을 활용하여 길흉화복을 설명한다. 이는 구성을 활용하는 양균송의 구성법고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옥수진경의 체계 역시 내기인 오성용수, 천변용수, 진룡명수를 내기로 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물을 외기로 하여 저술 되었다. 그러나 양균송의 이론은 오성이 아닌 구성을 기본으로 활용하고 요성과 구성을 중요시 한다. 일반에서 말하는 형국론이나 형세론 역시 형상혈수(形象穴髓)라 하여 혈을 찾는 방법으로 형국이나 형세가 주 가 아닌 혈을 찾는 방법을 논한 것이다. 이는 형에서 상을 찾고, 상에서 혈을 찾으므로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터를 찾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풍수가나 양균송의 이론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인다. 특히 인자수지에서 구분하는 용,혈,사,수의 체계는 양균송의 강서학파의 체계가 기본이 된다. 풍수지리는 장풍득수나, 용.혈.사.수.향이 아니다. 청오경에서 말하는 내기와 외기가 서로 상승해야 풍수지리가 된다. 특히 음양 오행의 기나 오기, 오성이 풍수지리의 기본 이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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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연재 3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연재 3회 3) 풍수지리 기본 이론은 금낭경의 오기(五氣)와 옥수진경의 오성(五星)이다. 풍수지리 경전인 청오경, 적정경, 금낭경의 특징은 모두 기(氣)를 우선으로 논한다. 태초의 혼돈상태에서 음양의 기운이 나와 천지 만물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작용을 기(氣)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청오경에서는 내기(內氣)와 외기(外氣)로 풍수를 설명하고, 금낭경은 땅속으로 행하는 오기(五氣)로 풍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적정경은 음양(陰陽)의 기(氣)로부터 오행(五行)의 기(氣)와 오성(五星)의 기(氣)를 논한다. 이러한 이론의 접근이나 체계는 향후 풍수지리 이론의 기본이 되는 경전(輕典) 연구에 중요한 기본이 되어야 한다. 송대 이전의 풍수 이론은 역리(易理)의 기(氣)이론을 기본으로 오성(五星)과 오기(五氣)의 작용으로 길흉화복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풍수지리 옥수진경에서 말하는 오성은 송대 이전의 오성과는 차이가 있다. 송대 이전의 오성은 하늘을 운행하는 오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대 일행의 오성 이론을 이어받은 송대 장자미의 오성(五星)은 하늘을 운행하는 오성(五星)을 지상의 산의 형태에 비추어 오성(五星)을 논하니 이것이 곧 만두(灣頭)가 된다. 이러한 내용은 송대 이후 명대(明代)에 주경일이 지은 산양지미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풍수지리에서 산의 형태를 말하는 오성(五星)이론은 송대 장자미의 옥수경(玉髓經)의 이론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옥수진경은 최원정이 자미(子微)의 7세손(世孫) 가부공(駕部公)으로부터 책을 얻어 발휘를 완료한(소희(紹熙:1190~1194)) 360년 후 명(明) 가정(嘉靖) 29년(1550년),복주부간(福州府刊)에서 32책(三十二冊) 3,200 페이지로 목판본으로 출간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이처럼 옥수진경이 만들어진 뒤 300여년이 지나서야 출간 된 이유 역시 차후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는 아마도 양균송의 풍수 학파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유윤중은 옥수진경총서(玉髓眞經總序)에서 『늦게서야 오성(五星) 만두(巒頭)라는 문자를 깨닫고 마음속에 심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오성(五星)으로 꿰어 낼 수 있으니 오성이 아니면 안 된다. 즉 오성(五星)으로 모든 것을 두 밝힐 수 있으니 오성(五星)이 아니면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만두(巒頭)로 상(象)을 취하는 것은 부족하고 절박하니 묘미를 다하지 못할까 의심해야 한다.』 유윤중은 채원정이 옥수진경에서 발휘(發揮)하면서 "유씨조에 의하면” 『按劉氏祖談』이란 글로 보아 채원정이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 또한 최원정은 옥수진경의 발휘서(發揮序)에서 『국초(國初) 국사(國師) 장자미(張子微)는 오성(五星)으로 용법(龍法)을 일으키고, 오행(五行)으로 조화(造化)를 예측(測)하니 법(法)은 천지자연의 수(數)로 혈법(穴法)의 기준이 된다. 이전의 지리의 서(書)에는 대개 그것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오성(五星)의 생성과정을 옥수진경에서 장자미, 유윤중, 채원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原文: 玉髓眞經 前部 上冊 五星龍隨第一』 『太極未判混沌成 鑿開混沌天地明 二氣融液交搆精元氣元形會結生 天上行次有五星 地下行龍分五形 五星五星均一體 地下五刑參五星 五星五刑作五樣湏要劈析極分明.』 장자미(張子微); 「"천지개벽(天地開闢) 초에 태극(太極)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아 혼돈(混沌)이 되었고, 혼돈을 뚫고 열었으니 천지가 밝게 되었다. 음양(陰陽)의 두 기운이 녹아 흘러 정(精)을 만들고, 원기(元氣)와 원형(元形)이 만나 생(生)을 이루었다. 하늘 위를 성(星)이 순서대로 지나가니 하늘에는 오성(五星)이 있고, 땅으로는 산(山)이 행룡(行龍)하니 오형(五形)으로 나눈다. 오성(五星)과 오형(五形)은 고르게 한 몸이니, 지하의 오형은 천상의 오성을 본뜨고, 오성과 오형은 5가지 모양을 만드니 반드시 쪼개고 나눔이 반드시 분명(分明)해야 한다.”」 장자미는 오성(五星)의 생성 과정을 음양(陰陽)의 기운으로 기(元氣)와 형(元形)이 만나 생(生)을 이루었고, 하늘에는 오성(五星)이 있고 땅에는 산의 형태가 나누어 다섯 가지 형태가 있으니 하늘의 오성과 땅에 있는 오형은 한 몸이다. 그래서 지상의 다섯 가지 산의 형태는 하늘의 오성을 본 따 만들었다. 그러므로 내기로 들러오는 기운의 분별이 분명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고 오성의 생성 이론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유윤중(劉允中)은 이 구절의 해설에서 「"오성(五星) 가운데에는 형체(形體)가 비슷한 것이 있지만 실은 같지 않다. 금성(金星)과 토성(土星)은 비슷하지만 청탁(淸濁)의 분별(分)이 있고, 화각(火脚)과 수각(水脚)은 서로 비슷하나 뾰족하고 둥근 첨원(尖員)의 차이가 있다. 토요(土曜)는 유(柔)하므로 문(文)이 되고. 석요(石曜)는 강(剛)하므로 무(武)이다. 그러므로 토요(土曜)와 석요(石曜)는 서로 비슷하나 전변(傳變)의 다름이 있다. 만약 쪼개고 나누어짐(劈析)이 분명하지 않으면, 즉 화복(禍福)의 차이(差)가 다르다. 혹 서로 두 배(倍蓰)이상 차이가 나면 응험(應驗)이 없다. 따라서 오성은 분명하게 쪼개고 나누어짐이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유윤중은 장자미의 오성(五星) 이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다. 즉 만두(灣頭)의 오성인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형태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채원정(蔡元定)은 발휘(發揮)에서 「"오성(五星)의 근본(本)은 천문(天文)에 있다고 지리에서 말하는 것을 술가(術家)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다. 요즘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미와 이치(義理)가 뒤 섞여 순수하지 못하니(駁雜) 어지러워 함부로 취할 수 없다. 일행선사(一行)의 오성(五星) 형체(形體)는 간략(略)하여 상세(詳)하지 않다. 또한 만두(巒頭)는 즉 오성(五星)이 변(變)한 이름(名)으로, 풍수가 전해오는 가문(專門)의 명가(名家)들 사이에 잘못(訛誤)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책들을 보면 즉 다른 술가(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특히 한 둘 뿐이다.”고 하였다. 채원정은 이러한 오성의 이론을 사용하는 술가(術家)는 장자미을 포함하여 한 둘 이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다른 술가에서는 아마 구성의 이론을 활용한 풍수지리가 주류를 이룬 듯 하다. 또한 채원정은 발휘(發揮)에서 「장자미(張子微)의 오성(五星) 형태를 첨(尖), 원(圓), 방(方)과 장(長), 단(短), 기(欹), 정(正), 고(高), 평(平)으로 구별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장자미의 오성으로 오성산의 형태를 분별(辨)할 수 있으니 풍수지리의 화복(禍福)의 경중(輕重)을 말 할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성(五星)의 변명(變名)은 자미(子微)의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生)하는데, 첨(尖), 원(圓), 방(方)과 장(長), 단(短), 기(欹), 정(正), 고(高), 평(平)으로 그것을 논(論)한다.” 고 발휘(發揮)한다. 이상의 옥수진경의 오성 이론을 살펴보면 오성(五星)의 이론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당(唐)일행선사(一行禪師)로 보인다. 그러나 일행선사의 오성 이론은 너무 간략하고 상세하지 않아 이를 송대(宋代) 장자미가 옥수경(玉髓經)에서 완성하고, 유윤중과 채원정이 발휘를 더하여 옥수진경(玉髓眞經)의 기본 이론을 이룬다. 특히 3,200여 페이지로 완벽한 옥수진경의 완성은 채원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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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2회...'장인과 사위' 행정의 달인이자 대마도를 정벌한" 김사형과 신효창"(좌측 주암선생) ■ 장인과 사위! 행정의 달인이자 대마도를 정벌한 김사형(金士衡) 풍수의 달인 신효창(申孝昌)은 장인과 사위관계다. 후손들의 번창과 부귀영화는 물론 자신의 아방궁이 될 좋은 길지를 찾았다면 과연 어떻게 할까? 소인들은 무조건 자신.또는 부모님리하 직계 조상을 모실것이고 대인들은 길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가려 모실것이다. 아래 묘가 그러한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말과 조선초의 혼란기에 문무를 겸비하고 좌의정으로 균형잡힌 정치력을 발휘해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은 대인인 장인을 주인 자리에 모시고 지리도사인 자신은 조금 못미치는 주인자리 아래에 묻혀 장인을 보필하는 형국이라 상.하 의 위계질서를 떠나 참으로 사랑스런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김사형. 김사형(金士衡.1341~1407)은 고려 말 저선 초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평보(平甫), 號는 낙포(洛圃).시호(諡號)는 익원(翼元).고조부는 고려때 명장 군이자 충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재상 忠烈公 김방경(金方慶-안동김씨 시조).증조부는 文英公 김순(金恂)조부는 貞簡公 김영후.부는 부지밀직사사 김천. 사위가 평산신씨 제정공 신효창.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鸚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을 거처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후 조준(趙浚)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개성부윤·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를 역임함. 1390년(공양왕 2) 밀직사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지문 하부사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했다. 1392년 삼사좌사·동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상락백의 작위를 받았다.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는 적장자 에게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종이 즉위 하자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401년(태종 1) 좌정승,영사평 부사를 지내고 상락부원군이 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신효창 신효창(申孝昌.~144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 평산(平山). 字는 우지(友之).시호 제정(齊靖조부는 고려 말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낸 신군평 (申君平).조선 개국 당시 음관으로서 대사헌.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특히 풍수지리에 밝아 풍수학제조(風水學提調)를 지냈으며 자신의 신후지지와 장인인 김사형의 묫자리를 자신이 직접 잡았는데...? ★풍수적 고찰. 청계산(658m)을 태조산으로 辛戌-壬子-乾亥-丙午로 지현굴곡으로 달려와 辛戌로 입수하는데 용진혈적이다 과협은 참 좋은데 마지막 변화가 조금 미흡하지만 도두에 이르러서 융기한 후 혈장으로 입수를 한다. 워낙 기운이 강해 한 곳에 다 흡수를 못하고 더 내려가 끝맺음을 하는데 그곳을 자신의 신후지지로 잡은 사위, 안산은 주인과 상응해야 하고 주인을 포근히 감싸주는게 좋은데 유정하지 못한게 아쉽다. 좌.우 용호사는 유정하기보다는 기골이 장대한 호위무 사형이고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에 내파는 신파(辛破)외파는 유파(酉破).이나 내파가 우선이니 이는 火局의 묘향묘파(墓向墓破)다.이는 우선룡에 좌선수 (좌수도우) 을좌신향에 신술파.辛方수구다. 좌수가 우로 흘러 향의 을방으로 나가며 戌字를 범하지 말고 백보전란.용진혈적.천간자.파구면 묘향묘파로 대부부귀하게 되는데 만약 약간이라도 차질이 있다면 황천을 범하여 패절하는 화를 입으니 신중해야 한다. 다행히 풍수 달인이어서인지 재혈을 적중해 장인(김사형)이 사위(신효창)덕분으로 편안히 계시리라. 물은 혈장자리에서 보이지 않고 혈장자리가 장군대좌 형처럼 우뚝 솟는 형세이니 富보다는 貴.武.權에 가까워 보인다. 1.파구가 내파.외파가 다를시 내파 우선적용. 2.좌우로 쓰기보다는 상.하로 쓰는 게 좋음. P.S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두 분을 기리고자 올리는 것이니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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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 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연재 2회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장원기 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2회 2) 풍수지리의 최초 경전은 적정경(赤霆經)과 청오경(靑烏經)이다. 청오경(靑烏經)은 일반적으로 약 810여자로 구성된 한 대 청오자(靑烏子)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의 최초 경전(經典)이라고 알려진 청오경(靑烏經)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태고의 혼돈상태(無極)에서 기(氣)가 싹트는데 크게 순박하였다. 음양(兩儀)이 나누져 맑고 탁한 것이 이루어지고,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는데 누가 실로 이를 주관 했겠는가?” 『盤古渾淪, 氣萌大朴. 分陰分陽, 爲淸爲濁, 生老病死 誰實主之』 즉 "천지개벽 초의 기(氣)가 음양으로 나누어져 청(淸)이 되고 탁(濁)되어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주관 한다”고 하였다. 이는 우주만물의 기(氣)를 언급하고 이후 생기(生氣)를 언급 면서 풍수지리의 이론을 전개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음양(陰陽)이 부합(符合)하여, 천지(天地)가 서로 통하면, 내기(內氣)는 생명을 싹트게 하고(萌生), 외기(外氣)는 형상을 이룬다(成形). 그러므로 내기(內氣)와 외기(外氣)가 서로 상승(相乘)하면 풍수(風水)는 스스로 이루어진다.” 『陰陽符合, 天地交通, 內氣萌生, 外氣成形. 內外相乘, 風水自成.』 이 구절은 풍수지리의 이론을 함축하는 말로 이후 송대(宋代 ) 옥수진경(玉髓眞經)의 기본 체계를 이룬다. 적정경(赤霆經)은 한 대(漢代) 장자방(張子房) 지은 것으로 옥수진경의 뒤에 부(附)하여 전해져 내려왔으며, 송대 국사 장자미는 장자방의 32세 손(孫)이라고 명기하였다. 따라서 장자미의 옥수진경은 장자방의 적정경을 근본으로 하고 당대(唐代)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오성론을 받아들여 옥수경을 만들고 유윤중과 채원정이 해설을 더하여 완성된다. 적정경(赤霆經)은 상중하(上中下)로 구성되어있다. 앞에서 언급한 적정경의 진위 여부를 보아 상권이 풍수지리의 기본 이론으로 제일 중요한 내용으로 보인다. 특히 상권에서 서술한 체계를 보면 풍수의 기본이론 체계가 청오경 보다 더 명확함을 볼 수 있다. 적정경의 상권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지개벽(天地開闢) 초 기(氣)는 혼돈(混沌) 상태(狀態) 에서 나누고 갈리어 흩어져 나란히 비슷하게(比類) 되었으니, 가볍고 맑은 기운(輕淸)은 하늘(天)이 되고 무겁고 탁한 기운(重濁)은 땅(地)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처하는 그 가운데는 성장이 부드럽고 온화하고 따듯하고 온화하여 삼재(三才)를 이용하니 만물이 법도를 따랐다.” 『混沌劃裂 氣散比類。人處其中 冲 和溫粹。兼用三才 萬物從制。』 적정경의 시작 문장을 살펴보면 청오경의 시작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천지개벽초의 기(氣)의 나눔으로 경청(輕淸)한 기운은 하늘이 되고, 중탁(重濁)한 기운은 땅이 되어 우주의 기본 질서인 삼재(三才)를 말하고 그 가운데 인간과 풍수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차이를 보인다. "처음에 전욱(顓頊)은 사리에 어두워(蒙) 깊이 깨닫지 못하고(罔覺) 이치를 알지 못하였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의 피하고 꺼림을(避忌)알지 못하였으나 이에 성인 이 나와 바르게 열어 창시(創始)하였다.” 『厥初顓 蒙 罔覺攸利。吉凶禍福 未識避忌。廼 生聖人 開端創始。』 "황제(黃帝)가 비로소 대요(大橈)에게 명(命)하여 갑자(甲子)를 만들고 역상(曆象)과 성신(星辰)은 요제(堯帝)가 갖추었다. 선기(璿璣) 옥형(玉衡) 으로 순(舜)임금이 들여다보고 관찰 하였다.” 『哲爾大撓 式造甲子。曆象星辰 備於堯帝。璿璣玉衡 舜以窺視。』 적정경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제왕(帝王)인 황제(黃帝)의 손자(孫子)인 전욱(顓頊)의 행적과, 황제가 대요(大橈)에게 명하여 갑자(甲子)를 만들고 역상(曆象)과 일월(日月) 성신(星辰)을 관찰하는 내용을 보여 풍수의 활동을 볼 수 있다. "오성(五星)의 운행 법도(行度)로 칠정(七政:日月木火土金水)을 가지런히 하고, 우(禹)임금은 산천(山川)과 양자강, 황하(江河) 회수, 제수(淮濟)에 제사(奠)지냈다. 오행(五行)은 질서(秩序)가 있고, 팔괘(八卦)는 경도 위도(經緯)가 있다.” 『五星行度 以齊七政。禹奠山川 江河淮濟。五行秩序 八卦經緯。』 청오경에서는 기(氣)와 생기(生氣)를 위주로 풍수를 논한다. 반면에 적정경에서는 오성(五星)으로 칠정(七政)을 논하고 풍수지리의 이론인 주역의 법칙을 논한다. 그러므로 풍수지리의 기본 이론인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주역(周易)의 이론을 기본으로 함을 볼 수 있다. 특히 옥수진경의 기본 이론이 되는 오성(五星)을 논하고 있으니 이는 향후 장자미의 옥수경의 기본 이론이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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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장원기 교수, 송대 장자미와 채원정이 완성한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연재 1회 · 풍수지리( 원광디지텔대학교관광학과 겸임교수,관광학 박사 ) 장원기교수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송대 장자미와 채원정이 완성한 3,200페이지 풍수지리(風水地理) 경전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역(解譯)을 마치면서... [한국풍수신문, 장원기 교수.. 옥수진경 풍수 연재 1회] 풍수지리 옥수진경(玉髓眞經)은 한 대(漢代) 청오경(靑烏經)과 적정경(赤霆經), 진대(晉代) 금낭경(錦囊經), 당대(唐代) 일행선사(一行禪師)를 거쳐 송대(宋代) 채원정의 발휘(發揮)로 완성(1,190년)된 후 300여년이 지난 명대(明代)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이처럼 늦게 발간(1,550년)된 이유는 당 말(唐末) 황소의 난(875~884년)때 양균송이 경림서고에서 훔쳐간 풍수서적으로 당시의 풍수는 새로운 국면을 맡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전자도서관에 묻혀 있던 3,200페이지의 옥수진경 목판본을 우연히 만나 번역과 해설을 더하여 출판한지 5년이 지났다. 그 당시 번역을 하면서 옥수진경의 기본이론과 형상혈수(形象穴髓)편은 상.중.하 로 3권 발간하였지만(2018년) 나머지 한권은 발간하지 않았다. 서둘러 발간하지 않은 이유는 번역을 하면서 채원정의 신선(神仙)같은 해설과 심오(深奧)하고 신비한(神秘)한 내용이 자칫 기본 실력이 없는 일반 풍수인이 비법(秘法)으로 잘못 사용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내용을 해설하여 발표하니 1,000여 년 전 장자미의 글을 유윤중이 해설하고 채원정이 발휘하던 모습을 상기시키며 풍수학계의 새로운 도약을 바래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옥수진경을 번역하고 강의하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을 기록하고 싶다. 1. 풍수지리(風水地理) 이론(理論)의 형성 배경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경전(經典)을 한 대(漢代) 자술된 청오경(靑烏經)을 근본으로 한다. 그리고 동진(東晉)시대 곽박(郭璞)이 지은 금낭경(錦囊經)을 장경(藏經)으로 하여 풍수지리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나 한 대(漢代) 장자방(張子房)이 지은 적정경(赤霆經) 역시 청오경과 같은 시대인 한 대(漢代)에 만들어졌으니 적정경(赤霆經)도 풍수의 경전(經典)으로 재고(再考)해야 할 것이다. 청오경을 풍수의 경(經)으로 추론하는 것은 청오경(靑烏經)의 구절이 곽박(郭璞)이 지은 금낭경(錦囊經)과 백학(白鶴)이 지었다고 하는 호수경(狐首經)에 인용된 경왈(經曰)의 문장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금낭경 기감편(氣感編)의 『經曰 地有四勢 氣從八方』은 청오경의『三岡全氣八方會勢前遮後擁諸祥畢至』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무, 청룡, 백호의 세 기운이 온전하고 팔방에서 세가 모여들어, 앞에서는 막아주고 뒤에서 끌어 안아주면 모든 상서로운 것들이 모두 모여 든다”고 하였다. 청오경에서는 삼강전기(三岡全氣) 팔방회세(八方會勢)라 하였으나, 금낭경에서는 이를 (地有四勢, 氣從八方 )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적정경(赤霆經)이 전해오는 것을 보면 송대(宋代) 장자미가 지은 옥수경(玉髓經 )을 유윤중이 해설하고 채원정(蔡元定) 발휘를 더하여 완성된 옥수진경(玉髓眞經)의 부(附)에 전해진다. 옥수진경(玉髓眞經) 부(附)에는 한나라 국사 장자방의 저술(大漢帝師留侯張子房撰)이라 기록 되었고, 장자미 역시 장자방의 32세 손 동현 자미 전(大宋國師三十二世孫東玄子微傳)이라 기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적정경(赤霆經)에 대하여 "「후인이 장자방의 이름에 가탁한 글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이 있는데 이는 옥수진경(玉髓眞經) 악록문답(嶽麓問答)에서도 언급한 내용이 있다. '감히 묻겠는데 적정경(赤霆經)은 자방(子房)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확실한 진위 여부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上 ), 중(中) 두 권은 자방의 글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하권본(下卷本)에 삼식(三式)이 있는데 지금은 단지 그 하나만 있다. 문리(文理)가 속되어 후인이 그것을 그대로 가탁하였거나, 혹 원래 이 권에 있던 진본을 잃고서 후인이 논술하였을 것이다. 상권에서 논하는 지리는 뒤에 나오는 호수경(狐首經), 곽박의 서(郭書) 등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처럼 송대(宋代)에도 풍수 경전의 진위 여부는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옥수진경에 나와 있는 유윤중의 서문을 살펴보면 "금릉(金陵)에 유랑 갔을 때 모산(茅山)에 올라 경치를 보았는데 우연히 도사(道士) 곽수일(郭守一)을 만났다. 그는 자칭 곽경순(郭景純)의 후예라고 하였으며 지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여 그 강론을 들었다.” 그리고 복주부간에서 옥수진경의 목판본이 최초로 발행되는 1550년 하계고(何繼高)는 서문에서 『풍수지리 이론은 진대(晉代) 곽경순(郭景純)에 이르러 드디어 분명해져 조(祖)라고 한다. 이에 땅을 가지고 길흉을 판단하는 종(宗)이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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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군, "북두천마 말골마을 스토리델링" 축제 · 풍수지리충청남도 금산군, "북두천마 말골마을 스토리델링" 축제 [한국풍수신문]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북두천마 말골마을 추진위원회는 마을의 숨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지역 문화관광과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문화축제 개막을 12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충청남도와 금산군이 숨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듯 깊은 행사와 문화유산 북원 작업을 함께 했다. (말둠벙 복원 개수제) 북두천마 말골마을 스토리텔링 책을 펴낸 장원기 겸임교수(원광디지털대 웰니스문화관광학과)는 "북두천마"와 "말둠벙 복원 개수제" 와 "오룡골 팔도 꽃테마 공원" 조성은 부족한 기운을 채워주는 비보 풍수로 좋은 기운이 말골마을에 함께 할수있도록 함이라고 말했다. 말골마을의 말과 이웃 불이리 마을의 말은 오룡골을 사이에 두고 고속도로가 잘라 버렸다. 그리고 오룡골에는 높다란 고속도로의 기둥이 흉물스럽게 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고속도로를 하늘로 비상하는 북두천마의 신기루로 명명하고, 흉물스러운 고속도로 기둥을 오룡골 다섯 마리 용의 다리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다섯 마리 용의 다리 아래에 팔도 꽃 태마 공원을 조성한다. 우리나라 팔도의 꽃을 주제로 한 화합의 오룡골 팔도 꽃 테마 공원을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23년도 도 예산 5억 확보). 이러한 테마 꽃 공원을 통하여 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북두천마 말골마을 산책로를 탐방하며 북두천마의 명당에서 재배한 마을 로컬 푸드를 구입한다. 이처럼 훌륭한 마을의 문화는 말둠벙, 할아버지 할머니탑, 효열비, 조례근 공적비, 팔도 꽃 테마공원을 통하여 북두천마로 승화되는 것이다. 한편, 북두천마 말골마을 (추진위원장 박성춘)은 숨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지역 문화관광과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