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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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 청와대(靑瓦臺)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2022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한 공간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열두 명의 대통령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명칭을 '청와대'로 변경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기에 건물의 보수·증축과 함께 녹지원 조성, 영빈관 신축 등 청와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에 관저와 춘추관을, 1991년에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현재의 청와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1993년 구 본관을 철거 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20대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청와대는 국민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1991년 지어진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이 집무와 외빈 접견 시에 사용한 곳이다. 본관 외부에는 전통 건축양식의 팔작지명에 15만 여장의 청기와를 올렸으며, 내부에는 현대적인 건축과 성을 갖추고 있다. 본관 중앙부에는 2층 한옥양식의 를 두고, 좌우에는 단층 한옥양식의 별채를 배치하였다. 이는 2담회나 소규모 만찬장으로 사용한 인왕실, 영부인의 집무실과 무궁화실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접근 및 회의 긴소로 사용한 집현실이 있다. 서쪽의 별채에는 국무회의가 열렸던 사실, 동쪽의 별채에는 임명장 수여식 등에 사용된 층수 안에 있다 청와대(青瓦臺)의 이 터전을 고려조(高麗朝)의 이궁(離宮)으로 조선조(朝鮮朝) 경복궁(景福宫)의 후원(後園)으로 천년(千年)에 걸친 역사(魔史)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일제(日帝)가 우리의 옛 건물(建物)들을 헐고 이 곳에 지은 총독(總督)의 집을 국가원수(國家元首)가 건국(建國)이후 이제껏 써왔다 노태우대통령(盧泰愚大統領)은 1988년 12월 17일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전통(傳統)을 잇고 드높아진 나라의 위상에 어울리는 청와대(青瓦臺)를 신축(新築)토록 하였다 관저(官邸)가 1990년 10월 25일 완공(完工)되고 본관이 1991년 9월 4일 준공(竣工)되니 천하(天下)에 으뜸가는 복지(0福地)위에 겨레의 앞날을 무한히 밝혀줄 청와대(青瓦臺)가 새로 지어졌다 ● 풍수적 고찰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청와대(靑瓦臺)로 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향명이치(嚮明而治)를 못하고임기 말년에 좋지 않는 행로를 보여 왔는데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먼저 청와대로 입수한 용맥부터 보자. 청와대는 한북정맥의 북악산 지룡의 산진처에 자리 잡았다. 주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악산(北岳山.342m)이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맥으로 수우산(水于山)·-대성산(大成山)·-운악산(雲嶽山)-·주엽산(注葉山)··불곡산(佛谷山)·홍복산(弘福山)·도봉산(道峰山)·삼각산(三角山)·노고산(老姑山)··현달산(見達山)··장명산(長命山)으로 행룡한다. 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면사 청와대의 주산(主山)이다. 북악산의 정맥은 급하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탈산(脫殺)을 하면서 암석 지대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하나의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 있는 곳으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行龍)한다. 청와대 주맥(主脈)은 소조산이 배면(背面)한 우측의 한 지맥이 청와대 본관으로 급하게 입수(入首)하고 있다.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는 게 대원칙이라 할 수가 있는데 청와대 본관이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이 아니라 음룡(陰龍)이다. 음룡이라 협소하니 용맥을 크게 절단하여 터를 넓혀 건축한 곳이라 지기(地氣)와 사세(四勢)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주산이 후덕(厚德)해야 거주자의 심신(心身)이 안정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가 어우러져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에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니 관대룡(冠帶龍).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로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한다고 하는데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미흡하다 보니 본관에 들어간 자마다.인정(人丁)보다는 금권(金權)에 눈이 멀어 자못 오점이 점철되지 않았을까.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지 집무실.회의실.등을 살펴보니 풍수이론에 합당하기보다는 합당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는 관계라 완전한 평화의 무대가 펼쳐진 것은 아니기에 최고의 책임자가 거처한 곳을 이전한 것은 섣부른 감이 있으나 청와대 본관이 성군이 머무르기에는 흡족한 곳이 아니기에 그렇게 나쁘게 볼일은 아니다. 다만 용와대의 대통령실은 가보지를 않아 가타부타 언급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앞으로 최고 통치자는 위에서 군림하는 권위보다는 국민이 바라는 성군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 천하제일복지.ㅡ구 청와대 본관 터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이 곳은 일찍이 명당 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後苑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융문당降文室, 융무당降武堂, 경농재, 벽화실碧華室, 오운각五閣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운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웅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秘地).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美軍政) 사령관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 관저를 건축했고 다음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 집으로 남게 되었다.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관사 건물을 철거한 후 옛 지형 그대로 복원해 원래 이 터의 이름을 따라 경무대구 본관 터라 하였다. 구(舊) 본관터는 1948년부터 43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한 구 본관이 있었던 자리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 현재의 본관과 관저를 신축하였고,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구 본관을 철거하였다. ● 풍수적 고찰 북악산(北岳山.342m)에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금성체의 아담한 소원봉을 이루고 석맥의 결인을 한 후 취기(聚氣)를 한 곳이 구(舊) 본관터다. 혈장(穴場)이 생각보다 넓지 않아 양택지(陽宅地)보다는 음택지(陰宅地)로 활용해야 할 곳이다. 지세(地勢)의 좌향(坐向)은 정남향(正南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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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2회... 유가사(瑜伽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2회... 유가사(瑜伽寺) 유가사(瑜伽寺)는 비슬산(琵瑟山.1083.4m)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827년(흥덕왕 2) 도성(道成)이 창건하였고, 889년(진성여왕 3) 탄잠(坦岑)이 중창하였다. 1047년(문종 1)에 학변(學卞)이 중수하였으며, 1452년(문종 2)에 일행(逸行)이 중수하였다.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나, 임진왜란의 전화로 소실되었다. 그 뒤 1682년(숙종 8)에 도경화상(道瓊和尙)이 대웅전을 보수하였으며, 1729년, 조선 영조 5년 취화(就和)와 파봉(巴峰)이, 1760년, 보월(寶月)이, 1776년, 밀암(密庵)이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31본사사찰령」에는 유가사가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로 되어 있어 당시 유가사의 사세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76년에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하였으며, 1979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용화전(龍華殿) ·나한전 · 산령각 · 범종루(梵鐘樓) · 천왕문(天王門) ·백화당(白華堂) · 동산실(東山室)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범종루는 취적루(翠滴樓)로 불리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2003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유가사 석조여래좌상과 괘불(掛佛), 삼층석탑, 15기의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괘불은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적군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에는 괘불에 소원을 빌고 대견사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높이 364㎝이며, 아래쪽에 있었던 원각사터에서 1920년에 옮겨온 고려시대 양식을 띤 작품이다. 또, 이곳에 있는 15기의 석종형 부도는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아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낙암당(洛巖堂) · 월호(月湖) · 휴영당(休影堂) · 설청(雪淸) · 해백(海白) · 경수(景修) ·진흘(眞汔) · 명학(明學) · 처명(處明) · 사옥(思玉) · 영규(靈圭) · 도경 · 풍렬(豊烈) · 하초(夏初) · 세민(世敏) 등의 부도이다. 부속암자로는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수도암(修道庵)과 경상북도의 3대 수도처 중의 하나인 도성암(道成庵)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풍수적 고찰 비슬산(琵瑟山.1083.4m) 이름은 다분히 풍류적이다.비슬산은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비슬산(琵瑟山) 정상에 유가사(瑜伽寺)가 있다. 유가사(瑜伽寺)의 유(瑜)도 아름다운 구슬옥을 넣어 지은 것을 보면 돌들이 빼어난 곳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비슬산의 한 맥은 동남쪽으로 행도하여 당나라 문종이 꿈에서 알현했다는 대견사의 명찰을 낳았고. 또 다른 한 맥은 서진하여 유가사의 명찰을 낳았다 실지 유가사 터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암반.석수등이 용호(龍虎)의 맥(脈)뿐만 아니라 곳곳에 있는데 나름대로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인 국세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나 용호(龍虎)가 제대로 감싸지 못하고 있어 재물보다는 수행처가 더 적합하다. 그래도 석맥(石脈)을 타고 내려온 기세가 있어 혹 기원이 필요하시거나 탐방(探訪)을 하게 된다면 산신각에서 발원을 하면 좋을듯하다. 좌향은 지세에 맞게 서향을 하였는데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 이는 향상(向上)으로 임관(臨官)을 충파하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이다. 살인대황천은 다 큰 아들이 喪을 당하고 패절하며 절름발이.피부병.혈압.노질.토혈.등의 증세가 있으며 먼저 둘째 집이 상(傷)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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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1회... 은해사(銀海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1회... 은해사(銀海寺) 은해사(銀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하여 해안사라고 불렀다. 1270년 홍진국사가 크게 확장하면서 대가람이 되었고, 이후 중건과 중창이 계속되었다. 1546년 천교가 현재 위치로 옮겨 새로 절을 지었으며, 이때 인종의 태실이 되면서 은해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으며, 1667년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했다. 1847년 창건 이래 가장 큰 화재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중수를 시작해 근대까지 이어졌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설선당·심검당·종루·보화루 등 24동, 말사 39개, 포교당 5개, 부속암자 8개가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거조암영산전(국보 제14호)·백흥암극락전수미단(보물 제486호)·운부암청동보살좌상(보물 제514호) 등이 있다.(참고문헌 : 다음백과.) ● 풍수적 고찰 은해사(銀海寺)의 한자는 은하수(銀)에 바다(海)자로 은하수와 바다처럼 큰 불보살님들이 계신다는 도량깊은 절이라는 것인데 풍수적으로는 어떨까?기세와 기운 좋기로 소문난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은해사. 팔공산은 태백산맥의 보현산(1124m)에서 서남쪽으로 연결되어 서봉.ㅡ비로봉.ㅡ동봉의 중조봉들을 성봉한 후 을진(乙辰)-갑묘(甲卯)-을진(乙辰)의 동남으로 행도하여 병오룡(丙午龍)으로 입수하여 좌정坐定)하였다. 좌향은 불국토의 이념을 정립한다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천년고찰이고 불도량이라 이기법을 논하기가 좀 그렇지만 굳이 설펴보면 동봉에서 발원한 지일천의 물이 은해사를 금성수로 환포하면서 을진방(乙辰方)으로 우수도좌(右水到左)하고 있다. 이는 향상으로 관대방(冠帶方)을 충파하여 유년의 총명한 아들이 상(傷)하고 규중의 부녀와 딸들이 상(傷)하고 재산이 패하며 오래되면 패절한다는 수법이나 불법도량이니 생각보다 큰 영향은 없으리라. 은해사로 들어오는 맥은 두 갈래다. 한 맥은 극락보전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 맥은 우향각으로 들어오고 있다. 주인이 우뚝 서야 단일대오가 돼 모든 게 일사천리로 되는데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치일천이 금성수로 환포를 하고 있어 재무상에 문제는 없는 곳이다. 다만 안산이 주인에 비해 좀 높아 음불자(陰佛子)의 입김이 좀 더 서는 형국이다. 또 안산이 지척이라 기도발 반응이 빠르게 나타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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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0회...민족의 성지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0회...민족의 성지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석굴암 석굴(石窟庵 石窟)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신라의 호국사상을 잘 나타내는 암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국보 제 24호로. 현대에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서 토함산 아랫자락의 불국사. 해인사. 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1995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10년(771)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혜공왕 10년(774년)에 완성했다.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다.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다. 이것은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설계였다.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돼 결로 현상이 일어나므로, 샘물로 석굴암 바닥을 냉각해 일부러 바닥에 결로를 일으켜 습기를 배출하게 한 것이다. 복원 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만약 해체 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제대로 조립되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제대로 조사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로 해체공사를 추진했다. 결국 일제의 야심찬 복원 계획은 거액만 쓰고 망했다고 한다. 24시간 365일 내내 돌아가는 에어컨 작동이 잠깐이라도 중지된다면 지금도 바로 다시 습기 문제가 발생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미봉책이었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현대 과학의 산물인 공기 순환 설비가 돌아가고 있다. 관람 시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매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금지된 상황이다.(참고문헌: 나무위키.) ● 풍수적 고찰 석굴암 석굴은 토함산(745m) 배면(背面) 중턱에 있다. 토함산은 태백산맥의 한 줄기인 해안산맥(海岸山脈)의 한 줄기로 신라 시대에는 오악(五嶽) 가운데 동악(東嶽)이라 하여 호국의 진산(鎭山)으로 신성시하였으며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석굴은 참배객이 백호방으로 올라가 백호방으로 들어가 본존불을 알현하고 청룡방으로 나와 청룡방으로 내려가는 일방통행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음양론(陰陽論)에 따랐으면 더 좋으련만 아쉬움이 있다. 석굴 중앙에는 백색 화강암으로 된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술좌진향(戌坐辰向)으로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과 통일신라를 영원불멸 국으로 지키고자 바다에 묻힌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있다. 토함산에서 급하게 내려온 맥은 소원봉을 이룬 후 낙맥을 한 곳에 석굴이 있으며 석굴에는 진응수가 솟아난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지를 못하니 상세한 고찰은 어렵지만 본존불 상태와 소원봉의 형태와 국세.본존불 아래에서 샘솟는 진응수.취기.내부의 건축양식...등을 보면 민족의 성지로 흠이 별로 없는 곳이니 사업에 관심이 있는 분이나 기타 발원 할 일이 있으신 분들은 이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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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49회... 대릉원(大陵苑)(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9회... 대릉원(大陵苑) 대릉원(大陵苑)은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위치한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사적 제512호로 지정되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총면적 약 12만 5400평으로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있다. 대릉원(大陵苑)이라는 이름은 "미추왕(味鄒王) 이사금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 지냈다"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금관총이나 봉황대와 같은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원래는 지금의 담장 둘러쳐진 구역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40호)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문화재청에서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을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참고문헌:나무 위키.) ● 풍수적 고찰 대릉원은 여러 왕과 왕족들의 무덤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다. 특이한 점은 평지라는 점이다. 초기에는 풍수지리라는 개념이 정립이 안 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살펴보면 ㄱ.권력보다는 평화와 안정을 위한 것이다. ㄴ.왕궁이나 거처에서 가까운 곳으로 언제나 선조를 돌볼 수 있다. ㄷ.위험한 곳이 아니니 언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ㄹ.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럼 능은 왜 그리 크게 했을까? ㄱ.왕과 왕비.귀족들이니 권위의 상징. ㄴ.내세(來世)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에 각종 부장품(副葬品)을 같이 매장하기에 능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좌향은 주로 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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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48회... 불국사(佛國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8회... 불국사(佛國寺) 청룡처불국사(佛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가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원찰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된 것이다. 석탑을 포함한 석조물은 병화를 입지 않아 신라시대의 원형을 유지한 것들이 꽤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0년의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ㄱ.법화경 (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ㄴ.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ㄷ.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에 의하여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된다. 크고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석단 위에 청운교· 백운교, 칠보교·연화교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청운교·백운교는 자하문을 거쳐 석가모니의 사바 세계인 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쌍탑구조이며, 뒤편으로는 경론을 강술하는 무설전을 두고 대웅전 일곽을 동·서 행랑으로 에워싸고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되며 그 안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다.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 이외에도 토함산 일대에는 몽성암과 보덕굴을 비롯하여 불국사 부속암자들이 다수 있다. 칠보교 아래에는 2쌍의 당간지주와 석조가 있고, 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구석구석 ● 풍수적 고찰. 창건한 지 1272년의 천 년을 넘은 고찰 불국사(佛國寺)는 불국토(佛國土)를 지향하는 신라의 상징으로 토함산(吐含山.745m)자락에 있다. 토함산에서 출맥(出脈)한 용은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동진(東進)하다 남서방(南西方)으로 횡룡(橫龍)하여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산진처(山盡處)에 이르러 재차 남(南)으로 횡룡하여 좌정한 곳에 위치해 있다. 맥기상(脈氣象)으로는 남서향(南西向)으로 가야 하는데 남향(南向)으로 하였다. 이는 아마도 불국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일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청룡방(靑龍方)에서 득수(得水)하여 조당(朝堂)을 지나 정미방(丁未方)으로 나가니 발부발귀(發富發貴). 인정대왕(人丁大旺).하는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으로 앞으로도 신라의 위상을 드높이고 서민들의 심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으로 계속 유지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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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7회 양택...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생가(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7회 양택...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생가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본관은 영일(迎日, 지금의경상북도 포항시). 字 달가 호 포은(圃隱) 아버지 정운관(鄭云瓘) , 어머니 영천 이씨 부인.이다. 의종 때의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진현관제학을 지낸 정종흥(鄭宗興)의 5대손이며, 그의 고조부 정림(鄭林)은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증 개성부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는 직장과 동정(同正) 등을 지냈다.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초명은 몽란, 몽룡,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뜻을 같이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정세를 엿보고 돌아오던 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름을 몽란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부친 정운관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 주나라 문왕의 아들, 정치가)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이름을 고칠 때 몽주라 하게 된다. 소년기 때 영일 청림동에서 외가가 있는 영천으로 이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여름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이 주관하는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10월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 포은 정몽주의 가족 관계 고조부 : 정림(鄭林) 증조부 : 정인수(鄭仁壽) 할아버지 : 정유(鄭裕) 아버지 : 정운관(鄭云瓘, 다른 이름은 운권 어머니 :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영천 이씨 부인 : 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 이씨(慶州李氏, 판사사(判事士) 이빈(李斌)의 딸) 증손녀 사위 이석형(李石亨, 1415년 - 1477년) 손녀 사위 선성군, 정종의 다섯째 서자, 이방원의 서조카 참고문헌:나무 위키 ● 풍수적 고찰 포은 정몽주 생가는 도덕산(702m)에서 출맥한 용이 기복굴곡 (起伏屈曲)으로 서서진(西西進)하여 우항리에 이르러 빼어난 주산(主山)을 성봉한 후 위이굴곡(逶迤屈曲)을 하여 산진처에 이르러 임좌(壬子)로 횡룡(橫龍) 결작(結作)한 곳이다. 700여 년의 유구한 세월이 흘러 명확한 고증은 쉽지가 않지만 횡룡결작한 곳이라 생가의 뒤는 높지는 않다. 그래도 전체적인 국세는 평사낙안(平沙落雁)의 편안한 곳이다. 도덕산에서 발원한 물은 금성수로 생가를 감싸고 도니 인심(人心 또한 후덕(厚德)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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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6회... 첨성대(瞻星臺)(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6회... 첨성대(瞻星臺) 첨성대(瞻星臺)는 633년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 때 지어진 천문대다. 원형을 유지하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높이 9.17 m, 밑지름 4.93 m, 윗지름 2.85 m로 중간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있으며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위쪽 방형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당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 즉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 있다고 믿는 것이었는데 첨성대는 반대 형상이기 때문이다. 천체의 상징과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구조라는 설과.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교 우주론 속 수미산의 형상을 반영했다고 주장한다. 불경에 따르면 수미산의 정상 도리천은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입구는 남동쪽을 향하였다. 첨성대의 정자석(井字石). 2016년 경주 지진으로 약 4cm 이동했다.상단의 삐져나온 돌 4개는 방틀심석이다. 화강암 벽돌 364개를 이용해 석축 27단을 쌓았음 역시 '1년'의 시간과 28수 별자리, 혹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1년 12달, 합치면 24절기에 대응한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으로 채웠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 장대석이 있다.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광이 창문을 통해 첨성대 밑바닥을 완전히 비추고, 하지와 동지 때는 완전히 사라지게끔 만들었다. 한편 첨성대의 문이 탑의 중간에 위치한 것은 석가모니가 어머니 마야부인의 겨드랑이(혹은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며, 첨성대에 사용된 364개의 화강암 벽돌은 각각 1년의 하루를 상징하고 거기에 선덕여왕의 1이 추가되어 1년 365일이 완성된다는 해석이 있다. 고대의 천문 관측은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다. 첨성대의 지반은 지하 16m까지 퇴적층, 그 아래는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북쪽 지반이 약해 급속한 침하가 이뤄질 수 있으며, 경주 일대는 활성단층인 불국사 단층선이 지나가는 지진 위험 지대이기 때문에 유지 보수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첨성대는 현대 들어서 금이 많이 가고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짐이 심해지고 있다. ● 풍수적 고찰 천문대냐? 천문대가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한 첨성대. 겉에서 본 모양은 천원지방(天元地方).이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이 네모지다.의 이론에 따른 것을 보면 천문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듯싶다. 고대의 천문 관측은 과학 연구를 할 목적보다는 국가의 존망(存亡)을 예측하고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용도였기에 첨성대도 왕궁 근처에 있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633년(선덕여왕 2)에 건립했다고 문헌비고.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한다으며, ‘서운관지’와 ‘문헌비고’에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첨성대가 위치한 맥은 남산(468m)의 지맥으로 남산에서 병오룡(丙午龍)으로 기복굴곡(起伏屈曲)과 지현굴곡(之玄屈曲)을 하여 산진처(山盡處)인 평지에 장엄하게 세워져 있는데 지금은 물길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1400여 년의 유구한 세월에도 끄떡없던 지반이 약해져 인근에서 발생한 지진의 진동에 약 2.13cm가 더 기울어져 총 22.58cm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안타까움이 앞선다. 선조들의 하늘에 대한 연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던 만큼 우리 후손들은 우주개발에 더욱 분발하여 우주 강국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또 앞으로 수천 년을 길이길이 보전해야 할 찬란한 문화유산이기에 주변의 개발은 물론 지하수의 사용도 자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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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5회 ...임고서원(臨皐書院)(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5회 ...임고서원(臨皐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조선전기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553년(명종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54년에 ‘임고’라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장현광(張顯光)과 1787년(정조 11)에 황보 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며,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1965년에 복원되어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존영각·강당·포사(庖舍)· 유사실(有司室) 등이 있다. 사우인 문충사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유사실은 유사가 집무를 보는 곳이고, 포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고사는 고직(庫直)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 《포은문집 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유설 芝峰類說》 목판 71판, 《포은집》· 《어사성리군서 御賜性理群書》 11권 외에 200여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만여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풍수적 고찰 충절의 상징인 고려말 대학자,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임고서원의 맥(脈)은 기룡산(965.5m)에서 출맥하여 남서인 정미(丁未)로 기복굴곡으로 백리내룡하여 산진처에 이르러 갑묘(甲卯)로 횡룡입수하였다 420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란의 화재와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지만 숭고한 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여전히 굳건히 우뚝 서 빛을 발하고 있다. 420여 년인 1603년에는 현재의 서원 우측에 있었던 것을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로 확장 이전하였다고 하는데 지기상으로는 본래의 자리가 주인의 자리이고 더 낫다. 서원이나 향교.학교...등 교육기관의 터는 어디가 좋은가? 1.지기(地氣)가 있어야 하고. 2.주위에 문필봉이 있어야 하고. 3.국세가 갖춰져야 하고. 4.조안(朝案)이 열려 있어야 하고. 5.조당(朝堂)이 있어야 하고..6.환포하는 금성수가 있어야 좋고. 7.핍착이 없어야 좋다. 참고로 임고(臨睾)’라는 지명은 기룡산 기슭 언덕 밑에 임하여 고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동쪽 언덕에 올라가 조용히 읊조리고(登東睾以舒嘯 ),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臨)’자와 ‘고(睾)’ 자를 따서 ‘임고(臨睾)’라고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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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4회...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한국풍수신문 ) 주암선생 문화탐방 44회...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한국풍수신문] 선덕여왕(善德女王.~647.1.8)의 본명은 김덕만.이다. 신라 27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632년∼647년.이며 본관 경주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 배우자는 음갈문왕.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써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신하들이 유언을 듣고 도대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으니 낭산이라고 대답하여 그대로 낭산에 장사지냈는데, 후에 문무왕이 선덕여왕릉 밑에 사천왕사를 세워 선덕여왕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한다. 불교의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는 거대한 수미산이 있다. 수미산은 정상이 정사각형 모양이고 산체(山體)는 정육면체, 또는 뒤집어놓은 피라미드처럼 생겼다고 한다.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이 거주하는 사왕천(四王天)이 있고, 정상에는 제석천과 다른 신들이 사는 도리천(忉利天)이 있다. 사천왕사가 낭산의 밑에 있으니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꼭대기는 당연히 수미산의 정상, 즉 도리천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신 단을 '수미단'이라 부르는데, 부처를 수미산의 정상에 모신다는 상징적인 뜻이다. 선덕여왕릉은 비석과 같은 명문이 기록으로 확실히 무덤의 주인이 알려진 무열왕릉이나 흥덕왕릉과는 달리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서 비교적 확실히 무덤의 주인이 알려진 무덤이다. 참고로 지금의 선덕여왕릉은 과거 수해를 입어 무너졌었으며 근세, 근대에 들어서 무너진 부분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즉, 지금의 선덕여왕릉의 돌 기단은 당시의 것이 아니다. 1968년 12월에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미수로 끝난 일이 있었다. 신라 27대 왕 선덕여왕 능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위키백과) ● 풍수적 고찰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은 한등산(268.7m)에서 출맥하여 병오(丙午)ㅡ신술(辛戌)룡으로 행도하여 낭산(狼山.99.5m)을 성봉하고 낭산의 9부 능선에 임자(壬子)룡으로 입수하여 좌정하였다. 낭산의 높이가 99.5m가 되는데 역사 기록에 의하면 수해의 피해를 입었다.하니 얼마나 큰 홍수였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총명함과 지혜의 여왕으로 각인된 선덕여왕은 사후의 집인 자신의 신후지지를 정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명성에 어긋남이 없이 좋은 자리다. 당판도 좋고.지기도 좋고.토색도 자윤하고 재혈도 손색이 없다. 좌향(坐向)은 임좌병향(壬坐丙向). 파구(破口)는 정미(丁未)파 이는 구빈(求貧)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로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이다.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은 임관룡(壬官龍).우선룡(右旋龍)에 좌수도우(左水到右). 병오향(丙午向)에 정미파(丁未破)로 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쇠방으로 물이 나가도 되고 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여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대왕(人丁大旺)을 하며 장수(長壽)하는 좋은 향법이다. 간방수가 들어오면 삼길육수의 水가 되어 비상한 인재와 문장이 나고 급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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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3회 ... 한승수 부모 묘(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3회 ... 한승수 부모 묘 [한국풍수신문] 대한민국 제39대 국무총리 한승수(韓昇洙) 출생지 :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박사마을)[1] 본관 청주 한씨 몽개공파 호 춘강(春崗)·지암(志岩)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로, 김진재는 사돈 지간이다. 육영수의 언니인 육인순의 둘째사위로서 장덕진 전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바로 손아랫동서이다. 그리고 김세연 전 국회의원의 장인이므로 김세연의 아버지인 고 김진재 전 국회의원과는 사돈 지간이다. 1936년 12월 28일 강원도 춘천군(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 박사마을에서 아버지 한석린(韓錫麟, 1910. 8. 28 ~ 1995. 8. 17)과 어머니 진천 송씨(鎭川 宋氏, 1910. 11. 6 ~ 1959. 9. 13)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5년 춘천고등학교(27회), 1960년 연세대학교 졸업. 1968년 7월 영국 요크 대학교 대학원(University of York)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 등을 각각 취득했다. 1971~1988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 역임. 제13대 15대 국회의원 당선. . 1994년 12~1995년 12월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 2008.2.9~2009.9. 28 제39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2010년 5월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 이사회 초대 의장에 내정. 2022년 10월 20일 유엔 총회의장협의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 풍수적 고찰. 한승수 부모 묘는 뒷재봉(501.4m)에서 출맥한 용이 기복굴곡을 하여 을진(乙辰)의 동남으로 남진하여 다시 병오(丙午)룡으로 입수하여 좌정하였다. 당판(當坂)은 튼실하고 취기(聚氣)도 잘된 곳이다. 안산은 거리는 좀 멀지만 일자문성으로 후부 해 보여 재혈이 제대로 되면 군왕지로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좌향(坐向)은 임좌병향(壬坐丙向.).병오(丙午) 분금이다. 저ㅏ수(左水)가 우(右)로 흘러 정미방(丁未方)으로 나가니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이다. 이는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유유쇠방가거래-쇠방으로 물이 나가도 되고 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고.발부발귀하고 오래 살고 인정(人丁)이 왕한다.. 봉분 후미가 허물어지고 있는데 속히 사초를 하여 설기가 안되게끔 하기를 고대해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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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2회 ... 죽서루(竹西樓)(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42회 ... 죽서루(竹西樓) [한국풍수신문] 죽서루(竹西樓)는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정면 7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로 세워져 있는데,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하였고,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누각에는 이이(李珥)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가 붙여져 있는데,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라는 대액(大額)은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건 것이다. 현재의 크기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좌우 각 1칸에 놓인 공포(栱包)의 모습이 다르고, 또 내부 천장에 당초 측면 밖으로 나와 있던 도리의 뺄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기둥 윗몸에서 소첨차(小檐遮)를 보의 방향으로 놓고, 이 위에 대접받침을 놓아 초제공에 놓은 첨차를 받치고, 이 첨차는 외이출목도리(外二出目道里)의 장여를 받치고 있는 주심포식(柱心包式)의 건축이지만, 각 부재들은 오히려 다포식의 모습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가구(架構)는 7량(七樑)으로 앞뒤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첨차와 소로[小累]로 싸여진 포작식(包作式)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고, 이 종량 위에 초각된 판형(板形)과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특히, 이 누각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基壇)과 초석이 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그렝이질하여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세운 것이다. 누각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며, 우물마루바닥 밖으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기둥 사이는 벽체나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하였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0] ● 풍수적 고찰 죽서루(竹西樓)는 예로부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누각 동쪽 대나무 숲 너머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죽장사 서쪽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竹西樓)'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죽서루는 현존하는 관동팔경의 누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누각(樓閣 )은 선비나 명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음주가무(飮酒歌舞)를 하기 위해, 산이나 언덕, 물가 등의 풍광명미(風光明媚)한 곳에 높이 지은 다락집이기에 좌향에는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다. 물가에서는 주로 물을 바라보거나 물을 끼고 도는 곳에 짓는데 죽서루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십천(五十川)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오십천의 계곡수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정면 7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로 세워져 있다. 오십천(五十川)은 태백시의 백병산(白屛山.1259m)에서 발원하여 유역면적이 좁은 편이라 곡류가 심하여 동해로 흘러가기까지 50번가량 꺾여야 한다고 해서 오십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한다. 죽서루에서 눈여겨봐야 할것은 덤벙주초다. 기둥의 받침돌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자연석 위에다 기둥을 맞춰서 그대로 건축했다는 점이 풍수적으로 볼 때 자연을 사랑하는 면이 돋보인다. 정자나 누각의 입지 조건은 어디가 좋은가? ㄱ.주변 지형지세와 어울려야 좋다. ㄴ.유서(由緖)깊은 곳이면 좋다. ㄷ.산수가 어우러지는 곳이 좋다. ㄹ.지기(地氣)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ㅁ.풍광이 좋아야 한다. ㅂ고산준령(高山峻嶺)은 피하는 게 좋다. ㅅ.물이 금성체로 흐르면 좋다. ㅇ.탁수(濁水)가 아닌 청수(淸水)가 좋다. ㅈ.물이 좌수도우(左水到右) 하면 좋다. ㅊ.물이 장대하면 좋다. ㅌ.물 흐름이 완만하면 좋다. ㅍ.수심은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아야 좋다. ㅎ.바닥은 늪이 아닌 자갈이나 암반이 좋다. 0.너무 위험한 절벽이 아니어야 좋다. 0.흉석위나 흉석이 보이는 곳은 피하는 게 좋다. PS ●성혈에 대한 설명 용문바위 위에 있는 성혈(性穴). 성혈은 선사 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 칠월칠석 자정에 아녀자들이 성혈터에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아놓고 치성을 드린 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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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1회 ...살신성인의 표본 강재구(姜在求 1937,~1965, )주암선생 문화탐방 41회 ...살신성인의 표본 강재구(姜在求 1937,~1965, ) [한국풍수신문] 1937년 7월 26일 경기도 인천부 금곡정(現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동) 54번지에서 태어났다. 인천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16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수도사단 및 전후방의 각 부대를 전속, 대위로 진급하였다. 1965년 정부의 월남파병 결정 이후 파병을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10중대에 배속되었다. 파병되기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던 중 부하의 실수로 수류탄이 중대원 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덮쳐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고 사망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고, 소령으로 추서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평소 그의 신조는 " 굵고 짧게 살자" 였다고 한다. 배우자 온영순 자녀 강병훈(아들) 사망 1965년 10월 4일 (향년 28세) 순직한 곳ㅡ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성동천 부근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시절 2중대였던 강재구 소령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2중대가를 '재구가'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재구가'는 '타오르는 횃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재구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해달같이 눈부신 기백과 정열 끝없이 타오르는 횃불을 보라 동지들을 구하려고 제몸 던졌네 저님은 살아있는 의기의 상징 내 나라 내 겨레 위해서라면재구처럼 이 목숨 아끼잖으리 2.장미같이 향기론 피를 품어서 거룩한 불사신의 이름 새겼네 지축을 흔드는 정의의 외침 너와 나 가슴마다 메아리친다 내 나라 내 겨레 위해서라면 재구처럼 이 목숨 아끼잖으리 풍수적 고찰.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의 목숨을 살린 강재구 소령. 굵고 짧게 살자.라는 좌우명.에 걸맞게 살신성인의 표본이 된 그의 추모탑이 있는 추모공원은 취기된 곳은 아니지만 맥선에 따라 조성되어 안정감이 있다. 부디 많은 방문객들이 내방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빛나는 정신을 되새기고. 살신성의 정신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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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40회... 노동서원주암선생 문화탐방 40회... 노동서원 [한국풍수신문]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원조인 최충(崔冲)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서원에 봉안된 두 분의 영정은 1628년 (영조 24)의 거작(巨作)으로서, 1984년 6월 27일 강원도 일반 동산문화재(江原道一般 動産文化財)로 각각 등록되었으며 그 외 제기(祭器)일체가 또한 문화재로 등록, 현재 서원(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대지 1500평에 건평 20평의 정전(正殿)과 14평 의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으며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이 각각 2棟씩 있다. 정전(正殿)에는 문헌(文憲), 문화(文和) 두 분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인(儒人)들이 체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는 곳이다. 또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 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특히 인근 초,중,고 학생들의 유적순례지로서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본 서원은 원래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 하여 1932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6.25동란에 소실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일부를 개축(改築)하고 수차에 걸쳐 중수(重修)하였다. 또한 정례행사인 제향을 유림행사(儒林行事)로서받들며 년 1회 봉제사를 올린다. 최충[崔沖.984년(성종 3)~ 1068년(문종 22)]인은 해주 최씨의 시조인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옛 고구려 영토인 해주 출신 최충은 은퇴 이후 총 9곳의 학당이라는 뜻의 '9재학당'을 세워 문관을 배출했다. 이른바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인데 '최 시중의 공도들'이란 뜻으로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이다. 시호 문헌공(文憲公).자(字) 호연(浩然)호 성재(惺齋)ㆍ월포(月圃자(字) ㆍ방회재(放晦齋) 최충 아들 최유선 영정 시호 문화공(文和公). 본관 해주 최씨(海州 崔氏) 최유선[崔惟善. ? ~ 1075년 1월]고려왕조 문종 인효대왕 시기의 유학자, 문관. 해주 최씨의 시조인 최온(崔溫)의 손자이며 최충의 장남, 최사추의 큰아버지이다. 고려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벼슬은 문하시중까지 올랐다. ● 풍수적 고찰. 노동서원은 좌방산(487m)에서 동진하여 술좌(戌坐)로 좌정하였다. 서원 뒤는 밭으로 사용중이나 서원으로 입수전에 기운이 상승하니 조금 뒤로 좌정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좌향(坐向)은 술좌진향(戌坐辰向)이다. 파구(破口)는 을진파(乙辰破) 당문출수)當門出水)다. 양공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묘향묘파(墓向墓破)에 해당되는데... 우선룡에 좌선수 술좌진향.에 을진파.을방수구 1.좌수가 우로 흘러 향의 을방으로 나가며 辰字를 범하지 말고 백보전란.용진혈적.천간자.파구면 묘향묘파로 대부부귀하게 되지만 약간이라도 차질이 있다면 황천을 범하여 패절하는 화를 입는다. 2.우수가 좌로 흘러 향상의 乙字로 나가면 絶水가 도충묘고(到沖墓庫-절방수가 묘고로 나감)하는 것이다. 당면으로 곧게 나가도 견동토우(牽動土牛).다 書에 이르길 을병수방손수선(乙丙須防巽水先-살인대황천).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황천살을 범하였으니 패절한다. 초기에는 수법이 맞아 잘 나가나 끝에는 황천살을 범하니 조심해야 한다. ● 당문출수가 합법이 되려면 ㄱ. 용진혈적(龍眞穴的)해야 한다. ㄴ. 右水가 左로 흘러 향상의 乙字로 나가며 辰字를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ㄷ.백보전란(百步轉欄)해야 한다. 양택은 양룡(陽龍)이어야 한다. 취기보다는 국세가 갖추어지고 안(案)이 좋아야 한다. 본래에 있던 자리[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 하여 1932년 5월에 이전.]가 어떤지는 확인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사학의 웑조이신 분이 좀더 양명한 곳에 계셨으면 더 좋았을것인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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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주암선생 문화탐방 39회... 수타사(壽陀寺)주암선생 문화탐방 39회... 수타사(壽陀寺) [한국풍수신문] 수타사(壽陀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강원도 홍천군 동면 공작산(孔雀山)에 있는데 통일신라의 제33대 성덕왕 7년 708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처음에는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으며 영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혀 오다가 1568년(선조 2)에 현위치로 이건(移建)하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린 뒤 1636년(인조 14)에 공잠(工岑)이 중건하였고, 1644년에 학준(學俊)이 당우(堂宇)를 확장하였다. 1683년(숙종 9)까지 계속하여 중건하여 옛모습을 재현하였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11년(순조 11)이다.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총 2,999평의 대지에 171평의 건물을 갖춘 이 절은 풍수로 볼 때 공작포란지지(孔雀抱卵之地)라는 명당이며, 주위는 동용공작(東聳孔雀)·서치우적(西馳牛迹)·남횡비룡(南橫飛龍)·북류용담(北流龍潭)으로 표현되는 포근한 골짜기에 있다.(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풍수적 고찰 수타사는 공작산(孔雀山. 887.4m.ㅡ사방으로 뻗은 능선이 공작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공작산이라 함.)에서 발조 후 西進하여 수리봉을 성봉한 후 다시 경유(庚酉)로 행도하여 약수봉(558m)의 소원봉을 이룬 후 다시 출맥한 용(龍)이 곤신(坤申)-신술(辛戌)로 기복굴곡(起伏屈曲)과 박환(剝換)을 거듭하며 행도하여 공작의 알에 해당하는 주산(主山)을 이루고 산진처에 이르러 을진(乙辰)-갑묘(甲卯)로 입수하여 좌정한 곳이다.혈형은 계소혈(鷄巢穴)에 가깝다. 당판은 튼실하고 조당은 금성수로 환포하니 유정하기가 그지없고 평화로우면서 안정적인 재물 명당이다. 취적이 저절로 되는 곳이니 재물 걱정은 안해도 될 곳이다. 청룡이 유정하게 감싸면서 안산을 이루니 청룡작국이다. 청룡작국이니 인정(人丁)도 왕하고. 안산 형태가 토체이니 큰 재물이 왕하는 곳이다. 좌향(坐向)은 묘좌유향(卯좌酉向).으로 정동향이다. 파구는 좌수도우(左水到右)하여 신술(辛戌)로 파구(破口)되니 양공(楊公. 834~900.唐나라 국사)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이다. 이는 임관룡(臨官龍).우선룡에 좌수도우.경유향에 신술파.로 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方可去來(쇠방으로 물이 나가도 되고 들어와도 좋다)]에 합당하여 발부발귀.하고 오래살고 인정(人丁ㅡ인물과 장정)이 왕(旺)한다. 국세.형세.지세가 좋고.이기(理氣)법에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 인정과 재물이 발현하는 곳이니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리라... 인정(人丁)과 재물에 대한 발원이 필요하시면 수타사에 가 기원하시고 특히 재물에 대한 발원이 필요하신 분들은 대적광전에 있는 취기처에 가 발원해보심이 좋을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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