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종합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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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6회 ... 해평윤씨 영의정 윤은보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6회 ... 해평윤씨 영의정 윤은보의 묘 윤은보의 묘는 의정부시 신곡동에 있다. 주변이 온통 개발되어 홀로 외롭게 도심지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물론 후손들은 조상이 물려준 땅으로 인해 흐뭇한 상황이겠지만 말이다. 풍수적인 특징은 별로 찾기 어려운 펑퍼짐한 언덕위에 여러기의 무덤이 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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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5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5회 4) 금토(金土)의 조화로 부귀쌍전(富貴雙全) 이나 수(水)가 없어 수(秀)가 없는 터 【1】 고산(高山)의 금(金)이 낙(落)하여 금(金)을 생(生)하고, 【2】 토(土)가 다시 잉육(孕育)하여 물러나(退出) 어린 금(嫩金)이 되었다. 【3 】금(金)이 아래로 두 개의 작은 금(金)을 만들고 다시, 큰 금(金)의 자취(躅)를 만들어 다시 두터운 토(土)를 만들었다. 【4】 그리고 터에 이르러 금성(金星)의 터를 만드니 무신(武臣)의 복(福)이 있다. ☞ 금(金)은 본래 무성(武星)인데 토(土)가 더하면 탁(濁)하다. 그러므로 토(土)는 오직 무신(武臣)의 복(福)이 된다. ☞ 그러나 그 조화(造化)를 논(論)하면 금토(金土)가 생왕(生旺)하면 금 (金)은 귀(貴)하고, 토(土)는 부(富)하니 역시 부귀쌍전(富貴雙全)의 땅이다.☞ 단 문(文)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조화(造化)의 정미(精微)함을 논(論)하면 오히려 수(水)가 없어 수기 (秀)를 발하지 못하는 것이 흠(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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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6회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 연천군에 묻혔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復辟)운동이 일어나기 딱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 때도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서 각각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것. 사실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도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참고로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 때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휴전선 남쪽에 들어와 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경순왕릉 묘비가 있는데 내용은"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ㅇ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마지막에는 영조 23년(1747년)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한국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풍수적 고찰 권불십년(權不十年-높은 권세라도 10년못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권력 맛을 본 사람은 죽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코자 자신의 핏줄인 자식에게까지도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헌데 천 년(935년간) 가까이 이어온 종묘사직을 통째로 넘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통일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 도중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빈 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은 자결을 명해 죽자 왕의 먼 친척인 김부(金傅)를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56대 경순왕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핍박(逼迫)을 당하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에 평화적으로 종묘사직을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결혼해서 23년간 살다 76세에 생을 마쳤다.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료가 약하고 대신 장자인 마의태자는 울분을 삭이고자 산천을 헤매다 생을 마쳤고 나머지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럼 사후의 유택은 어떨까? 경순왕 묘가 맨 처음 있던 곳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1514.위쪽이었는데 1985년에 이장한 곳이 현재의 능이 있는 경가도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이다 좌향(坐向)은 계좌(癸坐)인 남향이다. 앞의 전순은 전부 쌓아 올린 것이고 좌우 용호사는 나(주인=혈)에게 다가온 듯하나 약하고 주산은 금성체로 가까이 있어 좋으나 너무나 내려오면서 퍼져 내려와 취기가 되질 않고 있다. 안산은 청룡작국이나 비주(飛走)하는 형태이다. 앞인 조당은 툭 터져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늑한 감을 주어 납기(納氣)명당은 괜찮아 보이나 자세히 보면 지기(地氣)는 약하고 용호(龍虎)의 호위가 약해 명당이라 말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인생을 100으로 본다면 살았을 때가 50% 사후가 50%인데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후에는 명당혈에 들어가야 편안하고 안온한 후생이 되는데 경순왕릉은 망국의 한(恨)을 간직한 분이라 후생에는 좋은 곳에 계셔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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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4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4회 3) 순금(純金)으로 융회(融會)하여 무직(武職)으로 문(文)이 나타나지 않는 터 【1】 조산이 금(金祖)이고, 금성의 부(金父), 금성의 모(金母), 금성의 자(金子)로 모두가 금성으로 금(金)이 왕(旺)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화(火)가 아니면 아름답지 못하다. 【2】 4개의 강환 금(金)을 (火)로 녹이니 둥글고 순수한 아름다운 금(金)이 된다. 【3】 그러나 변화하지 않고 순금(純金)으로 융회(融會)하면 즉 무직(武職)이고 문(文)이 나타나지 않는다. ☞ 즉 완고하고 강한 금(金)이 되면 화토수(火土水) 세 개로 조화(造化)를 이루어야 녹여 이룰 수 있는 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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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문화재청, 매장유산 보존 시(현지보존, 이전보존) 국가가 비용 지원한다(문화재청 = 제공) 문화재청, 매장유산 보존 시(현지보존, 이전보존) 국가가 비용 지원한다 [한국풍수신문] 문화재청은 1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발굴된 매장유산의 현지보존이나 이전보존 조치에 따른 비용지원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국민의 재산권 피해를 최소화하고, 매장유산 보호 기반을 보다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개정으로 사업시행자가 그간 부담하였던 성토(유구보호를 위한 흙 추가쌓기), 매장유산 이전, 수목 및 잔디식재, 안내판, 전시물 제작 등의 비용에 대한 국가 지원이 가능해져 매장유산 보존에 따른 국민 부담이 크게 경감되고, 보다 효과적으로 매장유산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는 발굴조사로 건설공사가 완전히 무산된 경우에만 국가와 지자체가 그 해당 토지를 매입하여 매장유산을 보호·관리하였고, 발굴결과 보존조치(현지보존 또는 이전보존)가 지시된 경우에는 사업시행자가 모든 보존조치 비용을 부담하고 사업을 시행하였다. 문화재청은 개정안이 공포되면 6개월 이내에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시행령에 구체적인 지원대상과 범위를 정하여, 오는 2025년부터 신규 예산을 편성하여 지원할 예정이다. 한편, 문화재청은 올해 50억 원의 예산을 신규 편성하여 매장유산 유무를 판단하는 진단적 성격의 표본·시굴조사 사업을 추진 중에 있으며, 이와 함께, 농어업인·소규모 사업자에게 지원하는 발굴조사 비용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매장유산 보존에 따른 국민의 부담을 경감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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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남양주시, 2024년도 제1차 남양주시 광릉숲축제 추진위원회 개최...‘광릉숲축제를 전 국민의 축제로!’(남양주시 = 제공) 남양주시, 2024년도 제1차 남양주시 광릉숲축제 추진위원회 개최...‘광릉숲축제를 전 국민의 축제로!’ [한국풍수신문] 남양주시는 지난 24일 시청 영석홀에서 ‘2024년도 제1차 광릉숲축제 추진위원회’를 개최했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는 주광덕 시장을 비롯한 관계 공무원과 문화예술분야 전문가·지역 주민 대표·유관기관 관계자로 구성된 추진위원(위원장 김기철)이 참석한 가운데, 제19회 광릉숲축제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축제 시기 및 운영 방향 등이 논의됐다. 시는 올해 광릉숲축제를 오는 9월 28일부터 29일까지 양일간 개최하기로 결정했으며, 광릉숲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친환경 축제 프로그램들을 기획·운영할 계획이다. 주 시장은 "광릉숲 축제는 남양주시민 중심의 축제로,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광릉숲을 시민에게 더욱 의미 있게 보여드릴 수 있도록 준비해 전 국민의 축제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광릉숲은 우리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생물종이 서식하고 있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寶庫)로,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며 세계적으로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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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5회 ...진위향교(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5회 ...진위향교 평택 진위면에 자리한 진위향교를 살펴본다. 영의정 심순택의 묘를 보러 가는 길에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둘러보게 되었다. 약간은 경사지고 언덕진 곳에 자리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입지선정에 있어 풍수를 중시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음택과 양택 입지선정의 기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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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3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3회 2) 금화(金火)와 금수(金水)의 조화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터 【1】 조산의 헌천금(獻天金)이 낙(落)하여 소금(小金)이 되었다. 그러므로 연하고 어리다. 【2】 다시 석산(石火)이 나온다. 그러므로 쇳돌 같은 금인 광금(礦金)이 되었다. 화(火)가 있으나 금(金)을 상(傷)하지 않는 화(火)이다. 【3】 완고하고 쇳돌 같은 광금(礦金)은 화(火)를 밑천(資)으로 쇠를 녹이 고 단련하여야 비로소 아름다운 물질을 만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한 자(資)는 화(火)로 데우는 것이고, 화성(火星) 아래 둥근 금(金)이 나오면 즉 쇠를 녹이어 만든 용금(鎔鑛) 이다. 그러므로 금(金)을 녹이면(鎔) 둥글게 된다. 【4】 금(金)에 이미 화(火)가 나오면 반드시 수(水)로 담금질 하여야 견고하고 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水)는 금(金)을 담금질 하여 견고하게 하고 금(金)을 담금질 하여 그릇을 만든다. (淬金水) ☞ 그러므로 금(金)은 무성(武星)이니 수(水)로써 담금질 하면 수려(秀)해지고, 화(火)로 이루어(成)지면 녹(祿)을 이루니, 반드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가 나온다. ☞ 장군이 되어 제상이 된다. 그러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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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5회 ...석파정(石坡亭)(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5회 ...석파정(石坡亭) 석파정(石坡亭)은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였다. 이름은 흥선대원군의 호인 '석파(石坡)'에서 따왔다. 부암동에 있으며 정자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별서 전체를 석파정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석파정 명칭 자체는 정자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0다. 그래서 가옥 부분을 정자와 구분하고자 '흥선대원군 별서'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으로서 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김흥근의 별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이었다. 삼계동정사가 있는 자리는 경치가 굉장히 좋기로 유명했던 곳으로,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역시 이 주변의 경치에 반해 근처에 별서 무계정사를 세울 정도로 빼어난 풍광에 반한 고위층들이 별서를 두던 동네였다. 고종 즉위 후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야사 하나가 있다. 안동 김씨 세도를 꺾고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세도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흥근의 경치좋은 삼계동정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흥근이 순순히 내줄 리 만무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삼계동정사에 행차하게 한 다음 하루 자고 가게 한 것. 조선의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감히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흥선대원군에게 삼계동정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별장 주변의 장엄한 바위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짓고 별서의 이름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사후에는 흥친왕, 영선군, 이우가 세습해서 쓰다가 6.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천주교에서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했다. 그후에 병원에서 활용하다가 개인 소유로 넘어갔고 여러 번 경매에 오르는 등 소유자가 자주 바뀌었다. 1974년 1월 1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지정받았다. 2004년 12월에 빚으로 힘들어한 당시 소유자가 경매에 내놓았는데 2번이나 유찰되었다. 거의 대부분 부지가 문화재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등 개발이 제한된 구역이라 낙찰이 쉽지 않았다. (참고문헌 나무위키.) ● 풍수적 고찰 석파정(石坡亭)은 북악산(北嶽산.342m)에서 인왕산(仁王山332.m)으로 가는 둔덕에 위치한 곳으로 작은 국세를 이룬 곳이다. 작은 국세라 생활공간보다는 번뇌를 잠재우고 잠시 잠깐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였을까?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의 별서로 유명해세를 타 고종 황제까지 행차해 묵었던 곳이었으니 가히 짐작할만하다. 석파정(石坡亭)의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남향(南向)이다.아마 예전 나경으로는 정남향이었을것이디. 파구(破口)는 병오파(丙午破)다.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은 수(水)가 병오방(丙午方)으로 나가니 향상(向上)의 녹위(祿位)를 충파하는 것으로 소황천(小黃泉)이 된다. 소황천은 궁핍하고 요수하며 과부가 난다. 이 황천(黃泉)은 혹간 수(壽)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지만 여러형제가 많아도 결국은 핍사하고 곤궁하여 부자는 없더라. 미자상(未字上)을 침범하고 창도(創刀)와 악석(惡石)이 있으면 횡폭하여 투쟁을 좋아하는 자손이 나리라. 하였다. 별서의 좌향과 파구를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 唐의 國師)의 수법으로 봤을 때 소황천(小黃泉)이라 장기간 거주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지만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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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2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2회 4. 금성(金星) 1) 금수토(金水土)의 조화로 큰 무관이 나오는 터 【1】 금성(金星)이 조산으로 일어나고, 금(金)으로 락(落)하여 횡으로 넓다. 【2】 금성이 수(水)를 만나 다시 생(生)하니 더욱 왕(旺)하다. (金水相間) 【3】 또한 수성과 토성(水土)이 다시 자윤(滋)하여 좌(坐)를 일으키고 터를 만들었다. (水土會) ☞ 수려하고 또 문장이며 큰 무(穹武)의 관직(職)이다. ☞ 금(金)은 무성(武星)이다. ☞ 수(水)는 수성(秀星)이며 역시 문(文)이 있다. 바람이 다니면 물결 모양의 파문(波紋)이 일어나고 서리가 얼면(霜凝)물의 무늬(紋)가 나타난다. 이것이 물에 문(文)이 나타나는 바이다. ☞ 무성(武星)이 조산(祖)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터가 생(生)하니 사람이 태어나는(生) 바는 반드시 청귀(淸貴)하고 문(文)이 가능하다. ☞ 이에 무공(武功)이 나타나 공적을 쌓으니 역시 무직(武職)으로 몸이 드러나 지위가 높게 이른다. ☞ 금(金)은 수(水)로써 수려하게(秀)되는 것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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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4회 ...성주향교(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4회 ...성주향교 성주향교는 정말 좋은 곳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향교의 입지가 관아에서 가까워야 한다는 제한적인 요인으로 인해 좋은 곳이 드문데 성주향교는 단연 돋보이는 곳에 자리한다. 주산과 입수룡이 어우러진 곳에 대성전을 지음으로써 제향중심 향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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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4회... 청와대(靑瓦臺) 관저.(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4회... 청와대(靑瓦臺) 관저. 청와대 관저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했던 곳이다.대통령이 구 본관에서 집무하던 시기에는 구 본관 2층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노태우 대통령 때 새로운 본관을 짓기로 하면서 1990년 10월 관저를 신축하였고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구분되었다. 관저를 지을 때 전통 목조건축 양식을 도입하였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청기와를 얹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공간인 별채가 'ㄱ'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으며, 앞마당에는 뜰과 사랑채가 있다.관저의 대문은 전통한옥 삼 문 구조로 현판에는 '인수문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어질고 장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풍수적 고찰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청와대(靑瓦臺)로 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향명이치(嚮明而治)를 못하고 임기 말년에 좋지 않는 행로를 보여 왔는데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 청와대 관저가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이 아니라 음룡(陰龍)이다. 음룡이라 조당이 좁고 협소하니 5~7m 이상의 축대를 쌓아 조당격인 마당(뜰.정원)를 넓혀 건축한 곳이라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최적이 될 리 없다. 양택(陽宅)의 생명은 취기처(聚氣處)보다는 ㄱ.사세(四勢)가 갖춰지고 ㄴ.지기(地氣).천기(天氣)..조응기(照應氣). 형상기(形象氣)가 좋아야 하고 ㄷ.좌향(坐向)이 어긋(공망)나지 않고.ㄹ.택주(宅主)와 궁합이 맞아야 하고. ㅁ.인심(人心)이 있는 곳이어야 하고.ㅂ.물길.도로.길..등이 반배하지 않아야 한다. 양택삼요의 1.배산임수(背山臨水)-뒤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병풍처럼 있고. 앞은 물이 금성수로 흐르는 곳이면 좋다. 2.전저후고(前低後高)-집 앞은 집과 터보다 낮아야 하고 집 뒤는 적당한 높이가 되어야 좋다. 3.전착후관(前窄後寬)-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넓지 않으면서 좁아야 하고 집 안쪽은 좁지 않은 넓은 곳이어야 좋다. 재물이 모이는 조당을 물길이 금성수로 감싸고 돌면 금상첨화다. 그럼 양택(陽宅 -거주 공간)의 영향은 어떨까? 양택이 지기(地氣).천기(天氣).인기(人氣).조응기(照應氣).형상기(形象氣)가 좋으면 ㄱ.좋은 컨디션 유지 ㄴ.건강한 생활유지. ㄷ.매사에 자신감 ㄹ.사회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냄. ㅁ.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 ㅂ.종사하는 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ㅅ.적덕을 쌓게끔 하여 ㅇ.좋은 배우자 만나고 ㅈ.최상의 컨디션 상태에서 수태. ㅊ.최적의 태교가 되어 ㅌ.큰 인물이 될 좋은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난다. 대통령 관저로 입수한 용맥은 한북정맥의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 낙산(駱山,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인 현무(玄武)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자 청와대의 주산이기도 하다. 북악산의 주맥이 석맥으로 급하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탈산(脫殺)을 하면서 암석 지대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있는 곳으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한다. 청와대 주맥(主脈)은 소조산이 배면(背面)한 우측의 한 지맥이 청와대 본관으로 급하게 입수(入首)하고 소조산의 주맥 좌측 아래에 관저가 자리하고 있다. 관저의 전체적인 국세의 주산은 소운정에서 내려오는 석맥이다. 그런데 주맥을 주산으로 하는 건물은 대통령 숙소가 아닌 만찬장 건물이다. 풍수지리로 보면 만찬장 건물이 주(主)이고 숙소 건물은 객(客)인 행랑채격으로 주객전도(主客顚倒) 형태다. 좌향(坐向)은 신좌을향(辛坐乙向)의 동향이다. 재물을 관장하는 물길은 주산의 골에서 흐르는 물이 관저의 지하로를 통해 정미파(丁未破).또는 곤신파(坤申破)로 나간다. 이는 인정(人丁)과 재물이 날로 쇠하여져 불발하는 파구다. 아무리 높은 최고의 권력자들일지라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地氣)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잘 어우러져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이 편안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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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3회 ...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박정해교수 풍수이야기 53회 ...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 성인보의 묘는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다. 해석이 쉽지 않은 자리다보니 여러 의견이 있는듯하다. 어느것 하나 형세풍수의 원리에 부합하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양명하게 빛나고 있으니 더 어려운 것이다. 함께 공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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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1회(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장원기교수, 옥수진경(玉髓眞經) 해설(解說) 풍수 연재 81회 12) 목토(木土)의 조화에 토(土)가 강하여 문(文)이 짧고(夭) 탁부(濁富)의 터 【1】 조산의 목(木)이 낙(落)하여 토(土)가 되고 목(木)과 토(土)가 뒤섞여 어수선하여(錯雜) 주(主)가 없다. 【2】 또한 두 개의 토(二土)가 융성하고 후부 하여 횡(橫)으로 쓰러진 목(木)을 토(土)가 이기게 된다. 【3】 왕(旺)한 토(土)가 목(木)을 이기고 토성으로 전(傳)하여 터를 만들었다. ☞ 토(土)가 너무 왕(旺)하여 목(木)을 바꾸어 넘어져 쓰러져 엎드렸다. 때문에 문(文)과 수(秀)에 불리(不利)하다. ☞ 그러므로 모두 문(文)이 짧고 수(壽)가 탁(濁)한 것을 주관한다. ☞ 토(土)가 왕(旺)하여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 입목(立木)을 생(生)하여 점점 높이 솟아야 목(木)이 왕(旺)하고 이후에 터를 만들 수 있다. 그 조화(造化)는 마땅히 목(木)이 생왕(生旺)을 얻는 곳을 따라서 그곳에서 구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나아가 입목(入木)을 얻으면 길(吉)함을 생(生)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문(文)이 짧고(夭) 탁한 부(濁富)에 그치는 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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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연재]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한국풍수신문) [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 문화탐방 53회 ... 권력의 상징 청와대(靑瓦臺) 청와대(靑瓦臺)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2022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한 공간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열두 명의 대통령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명칭을 '청와대'로 변경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기에 건물의 보수·증축과 함께 녹지원 조성, 영빈관 신축 등 청와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에 관저와 춘추관을, 1991년에 본관을 새로 지으면서 현재의 청와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1993년 구 본관을 철거 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20대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청와대는 국민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1991년 지어진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이 집무와 외빈 접견 시에 사용한 곳이다. 본관 외부에는 전통 건축양식의 팔작지명에 15만 여장의 청기와를 올렸으며, 내부에는 현대적인 건축과 성을 갖추고 있다. 본관 중앙부에는 2층 한옥양식의 를 두고, 좌우에는 단층 한옥양식의 별채를 배치하였다. 이는 2담회나 소규모 만찬장으로 사용한 인왕실, 영부인의 집무실과 무궁화실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접근 및 회의 긴소로 사용한 집현실이 있다. 서쪽의 별채에는 국무회의가 열렸던 사실, 동쪽의 별채에는 임명장 수여식 등에 사용된 층수 안에 있다 청와대(青瓦臺)의 이 터전을 고려조(高麗朝)의 이궁(離宮)으로 조선조(朝鮮朝) 경복궁(景福宫)의 후원(後園)으로 천년(千年)에 걸친 역사(魔史)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일제(日帝)가 우리의 옛 건물(建物)들을 헐고 이 곳에 지은 총독(總督)의 집을 국가원수(國家元首)가 건국(建國)이후 이제껏 써왔다 노태우대통령(盧泰愚大統領)은 1988년 12월 17일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전통(傳統)을 잇고 드높아진 나라의 위상에 어울리는 청와대(青瓦臺)를 신축(新築)토록 하였다 관저(官邸)가 1990년 10월 25일 완공(完工)되고 본관이 1991년 9월 4일 준공(竣工)되니 천하(天下)에 으뜸가는 복지(0福地)위에 겨레의 앞날을 무한히 밝혀줄 청와대(青瓦臺)가 새로 지어졌다 ● 풍수적 고찰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청와대(靑瓦臺)로 들어간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향명이치(嚮明而治)를 못하고임기 말년에 좋지 않는 행로를 보여 왔는데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먼저 청와대로 입수한 용맥부터 보자. 청와대는 한북정맥의 북악산 지룡의 산진처에 자리 잡았다. 주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악산(北岳山.342m)이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맥으로 수우산(水于山)·-대성산(大成山)·-운악산(雲嶽山)-·주엽산(注葉山)··불곡산(佛谷山)·홍복산(弘福山)·도봉산(道峰山)·삼각산(三角山)·노고산(老姑山)··현달산(見達山)··장명산(長命山)으로 행룡한다. 삼각산(북한산-836.5m)에서 분지한 북악산[北岳山.342m.백악산(白岳山)으로도 불림]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남쪽의 남산(南山, 262m),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주산(主山)이면사 청와대의 주산(主山)이다. 북악산의 정맥은 급하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탈산(脫殺)을 하면서 암석 지대로 결인을 한 후 자그마한 소조산(小祖山)이자 소원봉(小圓峰)을 이루고 하나의 아담한 혈장(穴場)을 결지한 후 사산(四山)의 조응기(照應氣)가 있는 곳으로 안거(安居)를 찾아 행룡(行龍)한다. 청와대 주맥(主脈)은 소조산이 배면(背面)한 우측의 한 지맥이 청와대 본관으로 급하게 입수(入首)하고 있다. 양택(陽宅)이 자리할려면 양룡(陽龍)이어야 한다는 게 대원칙이라 할 수가 있는데 청와대 본관이 자리한 곳은 양룡(陽龍)이 아니라 음룡(陰龍)이다. 음룡이라 협소하니 용맥을 크게 절단하여 터를 넓혀 건축한 곳이라 지기(地氣)와 사세(四勢)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주산이 후덕(厚德)해야 거주자의 심신(心身)이 안정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가 어우러져야 편안한 곳이 되고. 편안한 곳에서 기거(起居)해야 심신에 활력이 생기고 활력이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또 성군(聖君)의 덕목인 향명이치(嚮明而治)가 가능하다. 좌향(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파구(破口)는 곤신파(坤申破)다.이는 구빈(求貧)인 양균송(楊筠松.834~900.唐의 國師)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정묘향(正墓向)에 해당된다. 좌수(左水)가 흘러 곤방(坤方)으로 나가니 관대룡(冠帶龍).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水到右-水가 絶방으로 나감)로書에 이르길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다).] 으로 발부발귀(發富發貴).인정대왕(人丁大旺). 복수쌍전(福壽雙全)한다고 하는데 지기(地氣)와 사세(四勢)의 조응(照應)이 미흡하다 보니 본관에 들어간 자마다.인정(人丁)보다는 금권(金權)에 눈이 멀어 자못 오점이 점철되지 않았을까. 음택(陰宅)은 지기(地氣)의 취기(聚氣)와 좌향(坐向). 수법(水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양택(陽宅)은 지기는 물론 사세(四勢)의 조응기(照應氣)와 동.서사택(東.西四宅)의 좌향법(坐向法)과 건물 내에서의 구성길흉법(九星吉凶法)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지 집무실.회의실.등을 살펴보니 풍수이론에 합당하기보다는 합당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는 관계라 완전한 평화의 무대가 펼쳐진 것은 아니기에 최고의 책임자가 거처한 곳을 이전한 것은 섣부른 감이 있으나 청와대 본관이 성군이 머무르기에는 흡족한 곳이 아니기에 그렇게 나쁘게 볼일은 아니다. 다만 용와대의 대통령실은 가보지를 않아 가타부타 언급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앞으로 최고 통치자는 위에서 군림하는 권위보다는 국민이 바라는 성군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 천하제일복지.ㅡ구 청와대 본관 터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이 곳은 일찍이 명당 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後苑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융문당降文室, 융무당降武堂, 경농재, 벽화실碧華室, 오운각五閣 등 총 232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운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웅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秘地).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내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美軍政) 사령관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 관저를 건축했고 다음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 집으로 남게 되었다.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관사 건물을 철거한 후 옛 지형 그대로 복원해 원래 이 터의 이름을 따라 경무대구 본관 터라 하였다. 구(舊) 본관터는 1948년부터 43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한 구 본관이 있었던 자리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 현재의 본관과 관저를 신축하였고,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구 본관을 철거하였다. ● 풍수적 고찰 북악산(北岳山.342m)에서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여 금성체의 아담한 소원봉을 이루고 석맥의 결인을 한 후 취기(聚氣)를 한 곳이 구(舊) 본관터다. 혈장(穴場)이 생각보다 넓지 않아 양택지(陽宅地)보다는 음택지(陰宅地)로 활용해야 할 곳이다. 지세(地勢)의 좌향(坐向)은 정남향(正南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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