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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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4회... 방랑시인 김삿갓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4회 방랑시인 김삿갓 ■ 방랑시인 김삿갓 기다란 죽장을 짚고 큰 삿갓으로 눌러쓰고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방랑하며 뛰어난 필력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세상과 인간사를 꼬집었던 김삿갓.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은 싸우지를 않고 반란군에게 항복한 죄로 처형당하자 모친은 6살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영월의 깊은 산중에 숨어살게 되죠. 20세 때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조부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지만 역적의 자손에 조부를 비판한 것.으로 자괴감을 느껴 가족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들어선 김삿갓. 멀리 화순땅에서 졸(卒)하였지만 첩첩산중 와석리 노루목에 안장된 유택은 어떤가? 제반 여건상 경황(景況)이 없어서였을까? 마대산(1052m)에서 지현굴곡으로 달려온 내룡은 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과룡의 한 지맥의 안쪽 가장자리인듯하나 호위하는 좌우 용호사가 뚜렷하지 않고 좌향은 남향이나 안산은 높으면서 주인 에게 투권(鬪拳)모양새고 향전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할각수로 반배를 하니 안정감등을 봤을 때 잠시 숨어 있는 것은 가(可)하나 영면하는 유택자로는 빛 좋은 개살구격이라 아쉽다. 지기는 별 볼 일 없지만 납기는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준비해간 제물을 진설하고 예를 갖춘 후 하산을 서두르자 자꾸 더 있다가 가라고 옷깃을 잡는다.... PS 본명은 김병연[(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본관 신 안동.자는 성심(性深), 호는 이명(怡溟)·지상(芝祥)·난고(蘭皐), 별칭은 방랑 시인(放浪 詩人),일명은 김난(金鑾, 金蘭, 김란), 속칭은 김삿갓, 김입(金笠, 김립).아버지 김안근(金安根), 어머니 함평 이씨 부인(咸平 李氏 夫人) 시를 보면 가관(可觀)으로 과연 김삿갓이다. 아마 이는 속세의 모든 걸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다보니 그랬우리라... 書堂乃早知(서당내조지-서당을 일찍부터 알았으니) 學童諸未十(학동제미십-방 안은 모두 귀한 자제들이라.)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학동은 모두 열 명도 안되고) 訓長來不謁 (훈장내불알-훈장은 와서 인사도 않는다.) 毛深內䦢 必過他人(모심내활 필과타인-털 깊고 속 넓으니 필히 누가 지나갔다.) 溪邊楊柳不雨長(계변양류불우장-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라고.) 後園黃栗不蜂坼(후원황률불봉탁-뒤뚤의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잘 벌어진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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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2회... 정종 태실비(正宗 胎室碑)와 공자 명당론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2회... 정종 태실비(正宗 胎室碑)와 공자 명당론 ■ 정종 태실비(正宗 胎室碑)와 공자 명당론 [한국풍수신문] 태실은 왕이나 왕족들의 태반을 묻는 석실무덤을 말한다.산수(山水)가 어우러지면서 사세가 잘 갖춰지고 지기가 취적(聚積)된 곳에 태반을 묻을시 건강은 물론 장수한다는 풍수설에 기인해 산수가 빼어난 곳을 찾아 묻고 이름도 태봉산으로 명명(命名)하죠. 정조대왕의 태실이 있는 산은 강원도 영월읍 동쪽에 닭의 발을 닮았다는 계족산(鷄足山-890m)인데 개발로 인해 본래 자리가 아닌 과룡지처에 쓸쓸히 있다.일찍이 공자 선생은 명당(明堂)의 풍수관에 대해 말하기를ᆢ. 1.산사태가 안날 자리. 2.수맥지가 아닌 자리. 3.동물이 훼손 안 할 자리. 4.개발되지 않을 자리. 5.후손이 팔아 먹지 못할 자리.가 명당이라고 했다. PS [정조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영월읍 정양리 계족산(鷄足山)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에 조성되었고, 1800년 가봉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구실로 전국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니 정조대왕 태실에서도 태 항아리를 꺼내 갔다. 6.25전쟁 이후 석회 비료 광산의 개발로 파괴·매몰되었던 것을 1967년 수습하여 영월읍내 금강공원의 KBS방송국 안으로 옮겨 놓았다가, 본래 자리에 석회석 광산과 송정탑이 들어서는 바람에 현재 위치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태실석함 등 태실조성에 사용된 석재와 태실비가 있고, 본래 태실이 있던 정양리에도 일부 석재들이 남아 있다. 태실비는 전면에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육년십월이십칠일건(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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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1회...장릉(莊陵)과 정령송(精靈松)[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11회... 장릉(莊陵)과 정령송(精靈松) 단종(1441~1457.재위1452~1455)은 문예(文藝)에 뛰어났던 문종의 영향을 받아 무(武)보다는 문(文)을 중시하고 덕(德)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성군이었다.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모든 걸 빼앗겨 다정했던 어린 왕비와도 생이별을 하고 결국은 청령포에서 죽임을 당하니 어린 신부 또한 부인으로 강봉(降封)되어 한 많은 삶을 살다 가죠. 사후에 복위(復位)는 되었지만 영혼은 얼마나 애타고 체백(體魄)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체 백(體魄)이 경기도 남양주와 영월에 있어 사릉(思陵)에 있는 영기(靈氣)가 서린 소나무를 낭군의 묘역 입구에 심어 놓아 수백 년 동안 못다 한 사랑을 마음껏 누리기를 기원해 봅니다. 좌향(坐向)은 술좌진향(戌坐辰向)에 손사파(巽巳破)로 양공의 88향법상의 정묘향(正墓向)이다. 이는 묘고장지(墓庫藏地)라 주로 귀(貴)보다는 부(富)로 큰 부자가 된다는 향이니 자식으로 봐서는 주로 막내쪽.이고 재물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선호하는 향이다. 또한 발부발귀(發富發貴)하고 인정대왕(人丁大旺)하며 복수쌍전(福壽雙全)까지도 한다. 당판은 유혈(乳穴)이다. 유혈은 선익(蟬翼)이 필수이니 재혈시에 눈여겨봐야 한다. 천장지비(天藏地祕)의 자리는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마 단종의 조부인 세종같은 성군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 장릉(莊陵)은 조선 제6 대왕 단종의 능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 중 17세에 죽임을 당함.영월호장 엄흥도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신을 현 장릉에 모셨다. 1698년에 왕으로 복위되고 왕릉으로 정비. 묘호를 단종, 능 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사릉(思陵)은 조선 제6 대왕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송씨(宋氏) 능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상왕.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면서 부인(夫人)으로 강봉. 평생을 평범한 서민으로 보내다가 죽은 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 정씨가(鄭氏家) 묘역에 묻혔다가, 1698년(숙종 24)단종의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追上)되고, 묘를 높여 사릉(思陵)이라고 하였다.(위치: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정령(精靈) 1. 산천초목이나 무생물 등 갖가지 물건에 깃들어 있다는 혼령 2. 죽은 사람의 영혼 3.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장릉과 정령송(精靈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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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0회... 조순 선생의 생가 터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10회... 조순 선생의 생가 터 [한국풍수신문] 양택지(陽宅地)의 조건(條件) 예전부터 양택지(陽宅地)와 양택에 있어 말하기를 1.배산임수(背山臨水-뒤는 산 앞은 물이 흐름) 2.전착후관(前窄後寬-집앞은 좁고 뒤는 넓음) 3.전저후고(前低後高-집 앞은 낮고 뒤는 높음)를 [한국풍수신문] 양택의 3대 요소라 하는데 여기 그러한 3박자를 손색없이 다 갖춘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다름 아닌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472의 조순 전 경제부총리 겸.서울시장의 생가 터다. 집의 주산은 금성체의 산으로 아주 다정스럽게 집을 감싸 안았고 집의 입구는 좁은 반면에 문을 들어서면 널다란 정원과 뜰이 나온다. 집은 조당보다 높아 물의 침범이 있을 수 없었고 집터는 기운이 소천서사를 지나 안방을 통해 뚤방에 멈추어 서니 어디 흠잡을 데가 없다. 재물을 뜻하는 물은 1차로 집 앞의 조당에 쌓인 물 2차로 도로. 3차로 집 앞으로 흐르는 냇가 물로 재물 또한 풍족하고 인정(人丁)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안산(案山)도 옥대사(玉帶砂)로 과갑(科甲)하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그래도 흠을 잡아 본다면 집을 감싸는 뒷산이 아담하지만 생각보다 높지 않고 조당에 비해 집터가 그리 높지 않아 기개에 조금 약함을 보일 것 같다. 권력 쪽에서도 강하지 못하고 밀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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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9회... 명주군왕릉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의 묘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9회... 명주군왕릉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의 묘 ■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묘 [한국풍수신문] 명주군왕(溟州郡王)인 김주원(金周元)은 신라태종 무열왕의 5대손으로 ,선덕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당시 시중 겸 병부령인 김주원(金周元)은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 쟁탈전에 패하여 785년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한편 김경신은 김주원을 무마하고자 786년(원성왕 2)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명주 관하의 3개 군과 1개 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PS 명주군왕(溟州郡王)인 김주원(金周元) 묘는 조선 선조(1552~1608) 때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김첨경(金添慶.1525~1583)은 강릉부사 재임 시,김주원(金周元) 의 현몽(現夢)으로 선대(先代)부터 실전(失傳)된 시조 묘소를 찾기로 결심하여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 끝에 지금의 자리를 찾았는데 발견할 때 능묘(陵墓)앞과 사면은 돌로 만든 층계가 있었고, 그것의 네 모퉁이에는 1척 남짓한 돌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무덤 속에서 유해를 담은 백사(白沙) 항아리가 나왔는데,그 뚜껑에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8c후반 ~9c초의 무덤이 700년이상 실전되었다가 각고의 노력끝에 찾아낸 묘이기에 본래의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에는애매하다. 명주군왕(溟州郡王)묘의 좌향은 갑죄경향(甲坐庚向)에 파구는 신파(申破)다. 양공의 88향법으로 보면 향상(向上)으로 임관방(臨官方)을 충파하는.살인대황(殺人大黃泉)으로 대흉이다..살인대황(殺人大黃泉)은 다 큰 아들이 상(喪)을 당하고 패절(敗絶)하고 절름발이. 피부병. 혈압. 노질. 토혈.ᆢ등의 증세가 있으며 먼저 차남 집이 상(傷)하고 나머지 집에도 파급된다.고 하니 극히 조심해야 할 수법이다. 하지만 700년이상 실전되었다가 복원한 묘이기에 지형지세가 변했을수도 있고 조성시 점혈과 재혈이 다를수가 있어서 취기처와 좌향.파구등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좀 그렇다 현재의 취기처에서 본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에 신유분금(辛酉分金). 파구는 신파(辛破)로 하면 용진혈적.천간자 파구.백보전란.으로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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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7회...포은 정몽주 선생의묘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7회...포은 정몽주 선생의묘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 묘 [한국풍수신문]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는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사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PS 충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택이 과연 신[神ㅡ시신을 고향 영천으로 운구하던 중 만장(輓章)날아가 따라가 보니 털어진 곳이 천하명당의 길지라 영천으로 가던 걸 포기하고 만장이 떨이진 길지에 용사했다.]이 점지할 정도로 길지인가?. 문수산(221 1m)에서 발조하여 辛戌인 행도하다 서향인庚酉龍.으로 기복굴곡을 하여 다시 辛戌龍으로 횡룡입수하여 유혈로 취기한 곳이다.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청룡과 백호사(龍虎沙)는 삼중으로 중중히 호종하니 국세가 장엄하면서도 편안하다. 유혈의 당판이라 좌우 선익사가 뚜렷하여야 하는데 인작으로 인해 구별이 쉽지가 않는 곳이다. 내.외사가 중중일때는 내사가 더 우선이라 내사를 중시하면 취기처는 조금 더 윗쪽으로 가야ᆢㆍ청룡보다는 백호가 중중으로 유정하게 호종하니 장손보다는지손. 딸.또는 외손이 더 발음(發蔭)을 받고 발음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좌향(坐向)은 辰坐戌向 庚戌分金 乾亥 破口.다 이는 양공의 진신수법의 하나인 火局의 정묘향(正墓向)이다.정묘향(正墓向)은 관대룡.우선룡에 좌선수(좌수도우ㅡ水가 絶방으로 나감)로 書에 이르길 신입건궁백만장(辛入乾宮百萬壯ㅡ辛向을 하고 乾方으로 물이 나가면 큰 부자가 됨)이란. 바로 이 향이다. 이는 발부발귀(發富發貴). 人丁이 大旺하며 복수쌍전(福壽雙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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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6회 ....조선 개국의 발음을 한 준경묘(濬慶墓) · 풍수지리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6회 조선 개국의 발음을 한 준경묘(濬慶墓)입구에서 본 준경묘(濬慶墓) 전경 [한국풍수신문] 준경묘(濬慶墓)는 이양무 장군의 묘다. 이양무[李陽茂, ? ~ 1231년(고종 18년).는 본관 전주(全州)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장군[(將軍)을 지냈다. 조부 : 대장군 이용부(大將軍 李勇夫) 아버지 : 내시집주 이린(內侍執奏 李隣) 태조 이성계의 현조부(5대조)이다. 전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아들인 이안사와 삼척(三陟) 활기리(活耆里)로 이주하여 1231년(고려고종 18년)까지 살았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에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묘는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있으며 신좌을향이다.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조선왕조가 장자보다 중자들이 계통을 잇게 되었다.한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이 이곳에서 죽자, 목조대왕은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산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고 한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개토제(開土祭) 때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강원도 삼척의 마을인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덤은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그리고 대한제국기인 1899년에 이르러 황실에서는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하고 노동의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濬慶墓), 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PS 조선 개국의 발음처로 알려진 준경묘(濬慶墓)묘역 사방이 5봉으로 5백 년을 이루었다. 하여 천하 대명당으로 보고 있다는데 어떤가? 두타산에서 출발한 용은 지현굴곡으로 박환을 하여 금체의 주산을 이루고 다시 위이굴곡을 하여 신술룡(辛戌龍)으로 입수를 하였다.혈형(穴形)은 와겸유돌(窩鉗乳突) 중에서 유형(乳形).이다혈장의 당판은 옹골차면서도 튼실하다 혈장 크기 상하(上下).사세는 용립(聳立)으로 주인인 혈장을 압도하니 자식들이드셀 것이다. 단점.은 용호(龍虎)의 용립(聳立).에 좌견(左肩)이 함몰되어 중자(中子)에 변고가 있을 것이다. 안산은 백호 안산으로 장손보다는 지손이 더 득세할 형국이다. 끝은 무정(無情)하게 달아나므로 종국에는 음(陰-여자)의 배반이 있겠다. 묘의 좌향(坐向)은 신좌을향(辛坐乙向)에 갑묘파(甲卯破).로向上의 녹방위(祿方位)를 충파하니 소황천(小黃泉)이다. 소황천은 궁핍하고 요수(夭壽)하니 용진혈적하지 않으면 극히 삼가야 한다. 취기와 이기상으로는 경유좌(庚酉坐) 갑묘향(甲卯向)에 을진파(乙辰破)로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으로 해야만이 합당하다. 차고소수자왕향(借庫消水自旺向).은 시(詩)의 유유쇠방가거래(惟有衰유유쇠방가에 합당하여 양공(楊松)의 진신수법(眞神水法)이다.이는 발부발귀(發富發貴)는 물론 수고(壽高)하며 인정(人丁)이 왕한다.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정자각 비각안에 있는 묘비 준경묘 설명 앞에서 본 준경묘(濬慶墓)ㅡ가져온 주과포로 기본 예를 표하고 도두에서 본 준경묘(濬慶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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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선생의 문화탐방 5회... 적멸보궁(寂滅寶宮)의 기도터-설악산 봉정암(鳳頂庵) · 풍수지리■ 적멸보궁(寂滅寶宮)의 기도터-설악산 봉정암(鳳頂庵)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 중인도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였던 적멸도량을 의미한다."적멸"은 모든 번뇌가 소멸돼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으로 불가에서는 성지 중의 성지로 여기기에 남녀노소는 물론 원근(遠近).고저(高低).험양(崄壤)를 따지지 않고 참배 수행은 물론 기도(祈禱)및 기원을 위해 불철주야 찾는 곳이죠.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 했다는 설악산(1708m) 봉정암(1224m)은 5대 적멸보궁 중에서 제일 영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죠.북현무 주산은 우람한 목성체 암반이고 좌우용호 또한 괴암괴석과 고봉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중심에 자리잡은 대웅전의 중앙자리(사진5)는 주인자리로 손색이 없는 곳이니 수행자나 기원.축원을 원하는 분들은 꼭 이용해보시라 추천합니다. 대웅전 좌향은 진좌술향.사리탑 좌향은 축좌미향으로 두 곳 다 재물과 관계 있으니 사업하는 사람이기원.축원하면 더 운발이 설 수 있는 곳이네요,허공기도를 원하는 분은 사리탑 앞에서 하시고 건강.수행,지혜.소원.축원.기원...등을 원하는분들은 대웅전내 중앙에서 하시면 좋겠습니다.고봉이고 괴암.괴석에서 흐르는 맑은 영심천을 따라 수렴동계곡,구곡당계곡,용소폭포,관음폭포 쌍용폭포를 지나 깔딱고개를 따라 올라가니 눈에 아련히 들어 온 고찰이 봉정암....초행자도 쉽지 않는 코스(백담사에서 약10.5km)라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십이 좋습니다. P.S5대 적멸보궁은?1.오대산의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 2.설악산의 봉정암의 적멸보궁. 3.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4.태백산의 정암사 적멸보궁. 5.양산 영취산의 통도사 적멸보궁.적멸보궁은 寂(편안.열반).滅(멸하다)寶(보배) 宮(궁궐.종묘)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부처님이 미혹(迷惑)의 세계를 벗어나 적멸(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의 날을 누리는 곳으로 불상이나 후불 탱화도 없고 불단에 방석만 준비되어 있으며 법당 바깥에 사리를 모신 탑이나 전각을 말하죠.봉정암은 조계종 제3교구인 백담사(百潭寺)의 부속암자로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져와 이곳에서 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하였으며.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鳳頂)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기에 "봉정"이라 했다,한다.헌데 보물 제1832호인 봉정암 오층석탑은 자장 율사가 사리를 봉안하였던 때보다 훨씬 후대의 양식을 띠고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기단부를 따로 조성하지 않고 자연의 암반 위에그냥 탑신을 안치하였으며, 탑신 자체는 잘 정제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5층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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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4회...조선 8대명당 후보-윤관(尹瓘)장군 묘 · 풍수지리■ 조선 8대명당 후보-윤관(尹瓘)장군 묘 윤관(?∼1111)은 본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시호 문경(文敬), 문숙(文肅)으로 태조를 도운 삼한 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고손이며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 어머니는 경주김씨(경순왕의 손녀)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 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 하지만 여진족이 무력항쟁을 하거나 여러 조건을 대며 애걸하는 통에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되자 패군의 죄를 뒤집어쓰고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卒하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참고 : 다음백과) PS 윤관장군 묘는 조산이 박달산(360m)으로 건해(乾亥)-신술(辛戌)-곤신(坤申)의 수리봉들을 거쳐 甲龍-寅-子-癸-丑-艮寅-巽-辰-卯-艮-丑-甲卯-艮寅龍입수하였다.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 득수는 午득수. 파구는 .경파(庚破)로 양공(楊筠松-834~900.당나라 국사)의 이기법상 진신수법의 하니인 木局의 절처봉생향(絶處逢生向) 목욕소수(沐浴消水)다. 일명 문고소수(文庫消水)로 書에 이르길 녹존류진 패금어(祿存流盡佩金魚).라 말하며 이는 부귀하여 복수쌍전하지만 약간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패절하니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먄 용진혈적(龍眞穴的)하면 무방하다. 부를 논하는 물은 안산인 매봉이 치고 나오니 물은 자연 반배를 하게 되어 재물과는 큰 인연이 없겠다. 허지만 중간에 도로가 살포시 감싸고도는 형국이라 의식주에 구애받지는 않을 것 같다. 貴를 관장하는 주산은 금성체로 끝없이 문무의 권력을 지향하고.후손과 귀를 상징하는 용.호사는 내용호사는 주인과 같이 뻗어나가고 외용호사는 끝이 전체적으로 감싸고 밀어주지를 못해 아쉽다. 따라서 조상의 발음으로 출세는 지속적으로 할 수 있지만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내룡이 급하게 오면서 결인을 미처 못 하면 제동역할을 해주는 요석이 있거나 구(毬)가 있어야 하고 첨하가 뚜렷해야 하는데 인작으로 첨하를 길게 늘어뜨려 귀함이 떨어진게 아쉽다. 박달산은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산이라 명명됐다는데 이웃의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독수리가 많아서 수리봉 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지 내룡을 밟아보니 경사도는 있어도 높지 않아서 박달니무가 있어도 독수리들이 많이 서식했을 것으로 보인다. 통상 한 절에 발복이 30년간 오는데 실지 올라가보니 족히 30절은 넘어 보여 천여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어 여전히 발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수 있다. 더구나 400년간 산송문제로 다퉜던 청송 심씨와 화해를 하고 입수도두에 있던 심지원 묘를 천장하여 이제는 직접적인 흉작용은 없어져 학인의 한사람으로서 참다행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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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3회...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주인(主人)!-청풍김씨 시조묘 · 풍수지리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3회...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주인(主人)!-청풍김씨 시조묘 ■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주인(主人)!-청풍김씨 시조묘 청풍명월은 말 그대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다. 산수(山水)가 어우러져야만 맑고 깨끗한 바람이 일어나고 산수가 어우러지면 대기층이 좋아져 달이 유난히 밝아 보이고 별도 초롱초롱 보인다. 즉 산수가 어우러지고 깨끗한 동네라는 것이다. 산수가 어우러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심이 좋아 타 지역에 비해 덕을 많이 쌓게 되고 사후(死後)에 덕을 쌓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우월한 후생(後生)을 살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청풍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어 온 지명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상징하여 약 1300여년전 경치가 수려하여 시인.문인들이 즐겨 찾아 시문을 읊던 곳으로서 청풍명월이라 불리었다 한다. 청풍명월의 유래는 송나라 시인 소동파(1036~1101)가 적벽강에서 뱃놀이하면서 "이 세상에서 내것이 아니면 어느것 하나 가질 수 없지만 강 위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 위에 뜬 밝은 달은 어느 누가 가져도 말리는 이 없으니 아름답고 맑은 기운을 무진장으로 가져 가라"고 했다는 말에서 유래 됐다 합니다. 산수가 어우러진 청풍명월의 고장에 "내가 주인이여"라고 산천에 선언하고 터를 자리잡은 곳이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 산8번지에 자리잡은 청풍김씨 시조묘인 김대유(金大猷)다. 김대유는 신라 김알지의 46세손이고 56대 경순왕의 4남인 김은열의 18세손이다. 이 묘 발음으로 조선조에 왕비2(18대 헌종비인 명성 왕후. 22대 정조비인 효의왕후)명.상신8명.대제학 3명.청백리1명.공신7명...문과급제자 110명을 배출하였다. 도전리 마을 입구엔 단소가 있는데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맞은편 산에 위치한 시조묘를 향해 제를 올린다고 하는데 이건 산소가 물형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데 닭등에서 제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실지로 국세를 보면 횡룡입수하여 비룡승천(飛龍昇天)한 수국(水局)으로 결지한 혈장(穴場)인데 입수맥(入首脈)이 후부(厚附)하고 좌우용호사가 아주 유정(有情)하면서도 조화롭게 균형을 맞춰서 주인을 호위하고 있어 음양(陰陽-남자.여자)이 골고루 출세 성공 할 것이고 안산은 중첩으로 있어 후손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튼실한 래룡맥이 비룡승천하여 입수를 하였고 혈장도 튼실하고 좌우용호사도 주인을 향해 유정하고 재혈도 적중하여 조상의 발음이 자손만대(子孫萬代)의 향화지지(香華之地)로 끊이질 않을 것으로 본다. 임자룡(壬子)입수이니 정양(淨陽)으로 입수이고 내파(內破)가 손사파(巽巳破)로 수국이니 12포태법으로 쓸수 있는 용은 임자룡.신술용.경유룡.곤신용으로 좌(坐)를 정할 수 있으나 정음정양법에 맞는 향은 오(午)만 있어 자좌오향이 법수에 맞다.실지로도 그 당시 자좌오향으로 용사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조상의 체백을 좋은 자리에 모셔 자손 대대손손 영화를 누리게끔 하고 본인은 대대손손 후손들로 부터 깎둣한 대접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으리요. 국세로 보나 혈장으로 보나 기운의 세기로 보나 용사의 정확도로 보나 조선8대 명당에 당당히 올리고도 남을 자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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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풍수신문, 주암 선생의 문화탐방 2회...'장인과 사위' 행정의 달인이자 대마도를 정벌한" 김사형과 신효창"(좌측 주암선생) ■ 장인과 사위! 행정의 달인이자 대마도를 정벌한 김사형(金士衡) 풍수의 달인 신효창(申孝昌)은 장인과 사위관계다. 후손들의 번창과 부귀영화는 물론 자신의 아방궁이 될 좋은 길지를 찾았다면 과연 어떻게 할까? 소인들은 무조건 자신.또는 부모님리하 직계 조상을 모실것이고 대인들은 길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가려 모실것이다. 아래 묘가 그러한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말과 조선초의 혼란기에 문무를 겸비하고 좌의정으로 균형잡힌 정치력을 발휘해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은 대인인 장인을 주인 자리에 모시고 지리도사인 자신은 조금 못미치는 주인자리 아래에 묻혀 장인을 보필하는 형국이라 상.하 의 위계질서를 떠나 참으로 사랑스런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김사형. 김사형(金士衡.1341~1407)은 고려 말 저선 초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평보(平甫), 號는 낙포(洛圃).시호(諡號)는 익원(翼元).고조부는 고려때 명장 군이자 충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재상 忠烈公 김방경(金方慶-안동김씨 시조).증조부는 文英公 김순(金恂)조부는 貞簡公 김영후.부는 부지밀직사사 김천. 사위가 평산신씨 제정공 신효창.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鸚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을 거처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후 조준(趙浚)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개성부윤·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를 역임함. 1390년(공양왕 2) 밀직사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지문 하부사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했다. 1392년 삼사좌사·동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상락백의 작위를 받았다.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는 적장자 에게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종이 즉위 하자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401년(태종 1) 좌정승,영사평 부사를 지내고 상락부원군이 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신효창 신효창(申孝昌.~144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 평산(平山). 字는 우지(友之).시호 제정(齊靖조부는 고려 말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낸 신군평 (申君平).조선 개국 당시 음관으로서 대사헌.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특히 풍수지리에 밝아 풍수학제조(風水學提調)를 지냈으며 자신의 신후지지와 장인인 김사형의 묫자리를 자신이 직접 잡았는데...? ★풍수적 고찰. 청계산(658m)을 태조산으로 辛戌-壬子-乾亥-丙午로 지현굴곡으로 달려와 辛戌로 입수하는데 용진혈적이다 과협은 참 좋은데 마지막 변화가 조금 미흡하지만 도두에 이르러서 융기한 후 혈장으로 입수를 한다. 워낙 기운이 강해 한 곳에 다 흡수를 못하고 더 내려가 끝맺음을 하는데 그곳을 자신의 신후지지로 잡은 사위, 안산은 주인과 상응해야 하고 주인을 포근히 감싸주는게 좋은데 유정하지 못한게 아쉽다. 좌.우 용호사는 유정하기보다는 기골이 장대한 호위무 사형이고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에 내파는 신파(辛破)외파는 유파(酉破).이나 내파가 우선이니 이는 火局의 묘향묘파(墓向墓破)다.이는 우선룡에 좌선수 (좌수도우) 을좌신향에 신술파.辛方수구다. 좌수가 우로 흘러 향의 을방으로 나가며 戌字를 범하지 말고 백보전란.용진혈적.천간자.파구면 묘향묘파로 대부부귀하게 되는데 만약 약간이라도 차질이 있다면 황천을 범하여 패절하는 화를 입으니 신중해야 한다. 다행히 풍수 달인이어서인지 재혈을 적중해 장인(김사형)이 사위(신효창)덕분으로 편안히 계시리라. 물은 혈장자리에서 보이지 않고 혈장자리가 장군대좌 형처럼 우뚝 솟는 형세이니 富보다는 貴.武.權에 가까워 보인다. 1.파구가 내파.외파가 다를시 내파 우선적용. 2.좌우로 쓰기보다는 상.하로 쓰는 게 좋음. P.S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두 분을 기리고자 올리는 것이니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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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1부 퇴계 이황의 건축학개론 도산서당[한국풍수신문] 유가의 대가로, 시대의 스승으로 손꼽히던 퇴계 이황. 하지만 이황에게는 유학자의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황에게는 건축가의 면모가 숨어 있었다. 건축가 이황이 자신의 건축학을 뽐낸 건물은 바로 도산서당. 그런데 이황이 직접 설계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며 만든 도산서당의 규모는 고작 3칸 건물이었다. 조선시대 가장 조촐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3칸 건물’에 건축가 이황이 새겨놓은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퇴계 이황이 만든 도산서당을 만나본다.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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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1부 조선 최초의 서원[한국풍수신문] 1542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주세붕은 지역출신의 성리학자 안향의 위패를 모실 사당을 건립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풍기지방에선 극심한 가뭄이 들어 재정이 궁핍하고 민심도 흉흉하던 때였다. 하지만 지방행정관으로서, 그가 가장 먼저 해결한 과업은 서원의 설립이었다. 가뭄을 극복하고, 지역의 민심을 보살피는 것보다 서원의 건립에 더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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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시리즈 경북궁 설경[한국풍수신문] 한국의 건축문화의 산실인 궁궐과 종묘, 명승지의 겨울 풍경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구성하여 기록한 영상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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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종묘제례악2부 세종이 만들고 세조가 완성한 종묘제례악[한국풍수신문] 종묘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함께 어우러지는 악기연주와 노래, 춤이 종묘제례악입니다. 종묘제례악은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곡들을 처음 만든 사람이 세종이고, 이 곡들을 종묘제례악으로 쓰게 만든 왕이 세조입니다. 세종이 처음 만들고 아들 세조가 완성해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 봅니다.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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